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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희의 미디어아트 읽기

비디오 게릴라(guerilla video)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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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72호 편집팀⁄ 2010.05.31 16:28:36

진선희 (독립큐레이터) 지금까지 우리는 비디오 설치미술과 설치가들을 통해 비디오 아트만이 가질 수 있는 구심적인 원동력을 찾아볼 수 있었다. 설치미술이 비디오라는 전자적인 매체를 통해 표현형식에 있어 그 영역을 넓혀가며 새롭게 예술적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와, 기계적인 예술방식이 신선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예술 안에 포용 될 수 있었던 점은 지금까지 전자예술이 활발히 전개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한 계기라 할 수 있다. 비디오 설치는 아직도 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작업되지만 앞서 프랭크 포퍼의 비디오 아트 분류 형식에서 언급했듯이 초창기 비디오 예술가들이 비디오에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소비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텔레비전에 반하는 다큐멘터리적인 성격을 가진 표현방식, 즉 비디오 게릴라(guerilla video)와 비디오 퍼포먼스였다. 우선 비디오 게릴라는 사회적 또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매스미디어에 길들여진 대중에게 감춰진 진실을 폭로하며 사실을 드러낸다는 취지 아래서 이미지 또는 정보를 여과 없이 직접적으로 노출시킨다는 의미에서 정의된다. TV 등에 상업적으로 사용되던 비디오를 예술 매체로 사용하는 데 대해 반감 많았지만 백남준의 ‘모니터가 캔버스 대체’ 선언이 흐름 바꿔 포퍼에 따르면 비디오 게릴라는 초창기 인기가 상대적으로 시들해졌다가 80년대 말 이후 예술가들의 관심을 다시 끌었다고 한다. 첫 반사회적 작품으로는 프랭크 질레트(Frank Gillette)의 1965년 작을 들 수 있다. 거리의 히피들의 삶을 여과 없이 보여준 영상이었다. 작가는 뉴욕의 세인트 마크스에 모여 있는 히피들을 5시간 동안 예술적이거나 연출적인 시각 없이 투명하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촬영해 선보였다. 이는 대중적으로 가공되어 선입관을 주는 정보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과 함께 사실 또는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 예술의 본질적 역할이라는 점에 초점을 둔 것이다. 이러한 비디오 게릴라 작업들은 주로 70년대 초 미국에서 성행했는데 백남준 또한 플럭서스의 일원으로 뉴욕에서 게릴라 작업을 선보였다. 1965년 뉴욕에 방문한 교황의 모습을 거리 관객의 입장에서 소니 캠코더로 촬영하고 저녁에 카페 ‘고고’에서 그대로 편집 없이 모니터로 상영했다. 마이클 러쉬는 이를 두고 비디오 아트의 첫 출생이라 거론했다. 그러면서 러쉬는 비디오 게릴라에 대한 정의를 세운다. 우선 예술가가 촬영했고 어떠한 상업적 목적 없이 작업했으며 이 작업은 예술가의 개인적 성향을 담은 예술작업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백남준의 명제, 즉 ‘콜라주 테크닉이 유화를 대체했듯이 모니터는 캔버스를 대체할 것’이라는 선언은 이를 작품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TV매체를 이용한 영상은 상업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예술계에서는 모니터를 예술적 재료로 쓰는 데 대한 상당한 거부감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백남준은 이러한 기존 개념에 맞서 진취적인 모니터 작업을 추진한 선구적인 예술가이자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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