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19세기 초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안톤 루빈스타인(Anton Grigorievich Rubinshtein)과 차이코프스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낭만주의 음악을 열심히 연구하고 가르쳤다. 이때 다섯 명의 아마추어 출신 작곡가들이 러시아 민족음악을 살려야 한다는 각오로 작곡 활동을 시작했는데 후일 이들에게 ‘오인방(The Five)’ 또는 ‘위대한 한 줌(The Mighty Handful)’이라는 별명이 붙어졌다. 이들은 지도자 격인 발라키레프와 쿠이,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보로딘이다. 이들 모임은 1856년에 시작되었다. 모두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으며, 나이는 열여덟에서 스물여덟까지 다양했다. 보로딘은 화학 교수였으며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해군 장교, 무소르그스키는 산림청 공무원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독일, 오스트리아와는 다른, ‘진정으로 러시아적인’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1870년에 와해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발라키레프가 음악을 중단한 것과, 일부 멤버들이 유럽식의 실내악을 작곡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젊은 시절부터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와 ‘스페인 광시곡’을 비롯해 보로딘의 ‘중앙아시아의 대초원’을 좋아했다. 그 당시 중동이나 중앙아시아에 대해 거의 아는 바는 없었지만 이들 음악은 가장 매혹적이며 잊히지 않는, 어딘가 모험과 위험이 기대되는 미지의 세계로 가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림스키-코르사코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해군 장교 출신으로 해군의 음악 감독을 지내면서 전 세계를 여행했다. 오묘한 이야기들을 품은 세계를 여행하면서 쌓은 그의 경험들은 4막으로 된 교향시 ‘세헤라자데’에 잘 묻어난다. 이 작품은 ‘천일야화’의 이국적인 내용을 음악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후대의 러시아 음악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스트라빈스키의 스승이자 친구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의 민속 음악을 잘 살려서 가장 러시아적인 발레 음악을 작곡함으로써 음악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이로 평가받고 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971년 스물일곱의 나이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으며, 무소르크스키가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를 작곡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정식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있던 차이코프스키를 찾아가 도움을 받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는 민족적 러시아 음악에 집착하기보다는 유럽의 낭만주의 음악을 추구했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5인방과 친하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시기하지는 않았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이론이 아닌 ‘현실적 작곡’을 가르치면서 자신에게 부족한 음악 이론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새로운 지식을 이용해 이전에 작곡한 ‘사드코(Sadko)’와 ‘안타르(Antar)’ 같은 오페라를 수정하였다.
1873년에 러시아 해군은 그를 모든 해군 밴드의 감독관으로 임명했으며, 그는 군복을 벗고 교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동시에 관악기에 대한 이해와 능력을 높일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음악적 경험으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실내음악과 심포니를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나머지 5인방은 이를 러시아 민족음악으로부터의 이탈로 보고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 음악을 떠나지 않고 많은 러시아 민요를 정리하고 러시아 작곡의 할아버지 격인 글린카(Mikhail Ivanovich Glinka)의 음악을 현대적 수준으로 교정하는 데 많은 노력을 했다. 1886년 러시아 심포니가 출판되었을 때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음악적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무소르그스키의 음악 ‘민둥산의 하룻밤’을 수정해 주고 첫 공연을 지휘했다. 1889년에는 러시아에서 바그너의 ‘반지’가 처음으로 공연되었는데 바그너의 오케스트레이션에 크게 감동을 받은 그는 그 이후 주로 오페라를 작곡했다. 차이코프스키는 1907년에 이르러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Pavlovic Dagilev)의 초청을 받고 파리에서 러시아 음악을 공연했는데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그의 오페라 ‘사드코’와 ‘눈의 처녀’가 파리에서 공연되었다. 그리고 그는 스트라우스의 ‘살로메’와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같은 혁신적인 유럽 음악을 듣고는 5인방의 시대는 지나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그는 1890년경부터 협심증으로 고생하기 시작했으며 1905년 2월 혁명이 일어난 후 그의 상태는 계속 악화돼 1908년에 사망했다. 그리고 보로딘, 그린카, 무소르그스키와 더불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네브스키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보로딘 보로딘은 ‘중앙아시아의 대초원(In the steppes of Central Asia)’의 작곡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교향시는 러시아의 영토를 확장시킨 알렉산더 2세의 25주년 통치를 축하하기 위해 작곡되었으나 그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초연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1880년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이 음악은 러시아 상인들이 러시아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중앙아세아의 사막과 초원을 횡단하는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음악은 지금가지도 콘서트홀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영화와 뮤지컬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보로딘의 또 하나 명작은 오페라 ‘이고르 왕자(Prince Igor)’다. 이 오페라에 나오는 ‘폴로베츠인(Polovtsian) 춤’은 콘서트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곡 중 하나로 꼽힐 것이다. 보로딘은 이 곡이 완성하기 전, 1887년에 갑자기 사망했는데,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이 오페라를 완성시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무소르그스키 무소르그스키의 피아노곡 ‘전시회의 그림’은 가장 인기 있는 피아노곡 중 하나다. 무소르그스키의 음악은 주로 러시아의 역사와 민요 등 민족적인 테마를 사용하는데 그의 작품 중 ‘보리스 고두노프’ ‘민둥산의 밤’ ‘전시회의 그림’이 가장 유명하다. ‘전시회의 그림’은 무소르그스키의 개인적인 체험과 관련 있는 음악이다. 1874년 미술가이자 건축가 하트만이 사망하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400점이나 되는 하트만의 그림을 전시했는데 이 전시회를 다녀온 무소르그스키가 그 기억을 바탕으로 피아노곡을 작곡한 것이 바로 ‘전시회의 그림’이다. 이후 여러 작곡가들이 ‘전시회의 그림’을 편곡하였으나 지금은 라벨의 편곡이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다. 무소르그스키는 여섯 살 때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열살 때 하우스 콘서트를 할 정도로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하지만 가문의 전통에 따라 열세 살에 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폭음하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알코올 중독으로 마흔두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각기 다른 일을 하던 아마추어 출신의 러시아 5인방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바탕으로 음악 세계를 펼쳐갔다. 이제는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이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러시아의 민족 음악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러시아 민족의 전통과 정기를 살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