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8일, 제 303회 정기국회에서 예술인 복지법이 드디어 통과됐다.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의 사망을 계기로 촉발됐던 이 법의 제정은 100% 흡족하지는 않지만 ‘예술인들의 복지’가 국가가 재원을 마련하고 신경써야 하는 대상이 됐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 무척 의미심장하다. 서구 선진국의 예술인 및 예술 정책을 들여다보면 나라마다 무척 다르다. 전체 맥락을 보지 않고 개별적인 정책만 따라하면 정책 간 균형이 맞지 않을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예술인 복지법을 마련하는 데 어려웠던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우선 ‘예술인’의 범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 부터가 문제였다. 영국의 경우 토니 블레어 총리 시대부터 창조산업을 주력 산업으로 육성하기 시작하면서 창조산업에 대한 정의부터 정비했다. 직접 창조를 목적으로 하는 협의의 창조산업부터, 일반 제조업이나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지만 구체적인 일은 창조에 해당하는 광의의 창조산업까지 이들 산업을 분류해 통계를 정비하니 정책을 입안하는 단계에서부터 정확도가 높았다. 국내의 경우, 예술인의 정의를 ‘예술 활동을 업(業)으로 하여 국가를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데 공헌하는 자로서, 「문화예술진흥법」 제2조 제1항 제1호에 따른 문화예술 분야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창작, 실연(實演), 기술지원 등의 활동을 증명할 수 있는 자’로 정했다고 한다. 예술인의 범위를 넓게 보면 32만 명, 좁게 보면 7만 명이어서 비용이 들어가는 정확한 통계는 잡기가 쉽지 않았다. 원래 예술인 복지법에 넣고 싶었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예술인을 기존의 고용보험 체계에 포섭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산재보험의 대상에 넣는 것이었다. 이번 제정법에서는 예술인이 산재보험 대상에 포함됐다. 지난번 국정감사를 준비하면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보험회사의 기준에 의하면 무대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직업이 ‘위험군’으로 분류돼 일반경찰, 군인, 운동선수 등 고도의 위험에 노출된 직업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이었다. 예술인복지법의 통과로 예술인들이 산재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지만, 실업보험까지 받게 하는 데는 실패해 아쉬움 남아. 이들이 보험에 가입하려면 보험료도 비싸고 한도액 높은 보험은 아예 가능하지 않은 곳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제정법을 통해 예술인들이 산재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기존의 상업 보험사가 제공하지 않는 부분을 정부 재원으로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실업보험은 아쉽게도 타결하지 못했다. 고용보험공단에 의해서 운용되는 고용 보험의 가입자는 작년 1000만 명을 넘어섰다. 이들 고용보험에 가입된 근로자는 급여수령급액의 0.55%를 원천징수하고 사업주 또한 급여로 지급하는 금액의 약 1%를 고용보험료로 부담하게 돼있다. 기존의 고용보험은 퇴직 전 18개월 중 180일 이상 근무를 계속한 사람이 실직했을 때 재취업을 위한 노력을 한다는 전제에서 가입기간에 따라 차등적으로 최종 임금의 50%를 실업 보험으로 지급한다. 이는 당장 수입이 없어졌을 때 단기간 구제를 하기 위한 사회안전망으로 무척 유용한 것이다. 그런데 예술인의 경우 특정 회사에 고용돼 1년 내내 고정적으로 일을 할 때는 이미 일반 고용보험의 대상이 되지만, 나머지 경우는 계약 형태도 애매할 뿐만 아니라 아예 계약 없이 일하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프리랜서로 일을 하는 경우에는 프로젝트를 아무리 많이 해도 1년 중 평균 6~8개월 정도밖에 일을 못한다고 하니, 적어도 나머지 4개월은 기존 법상 실직 상태가 된다. 이 같은 경우를 모두 실업 급여 대상으로 넣으면 그 재정적인 부담이 다른 보험 가입자들에게 전가돼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사실 예술인들의 어려운 형편을 생각하면 국가가 재정을 내어 구제책을 마련해야 하지만, 예상되는 재원이 너무나 크기도 하거니와 정확하게 대상을 특정하기도 어렵다. 이는 프랑스의 엥테르미탕 지원제도 같은 선례를 참조해 앞으로 설계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가가 마치 보험회사를 하나 만든다고 생각하고 별개로 접근해 그 가능성을 타진할 일이 남아 있다.
애초에 예술인 복지법이 고 최고은 씨처럼 억울한 상황에 처한 예술인들을 돕기 위한 것이라면, 나는 다른 방향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 최고은 씨는 아마추어 작가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영화사에 5편의 시나리오를 팔았던 프로였다. 그런데 영화 촬영이 크랭크인 되기 전에는 관련 작가나 스태프들에게 돈을 주지 않는 게 영화업계의 관행이었다. 최고은 씨가 시나리오를 준 영화들이 실제 크랭크인 되지 않자 그는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예전에 만화 진흥법 공청회를 했을 때였다. 마지막 질문 시간에 한 만화가가 일어섰다. 자신은 만화 잡지의 간판스타이고, 작품이 지상파 방송국에서 24편짜리 드라마로 만들어진 스타 작가인데, 한 달에 두 편 만화를 연재하고는 월 100만원(두 편이면 매달 56페이지에 이르는 작품을 써야하는데 용량이 부족해 더 이상 연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한다), 콘텐츠 진흥원에서 만화가에게 주는 지원을 모두 받아도 2년간 총 1000여만 원 밖에 수입이 없었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이 편당 4억, 총 96억짜리 드라마가 됐는데, 원고료는 달랑 600만원이었다. 이러한 처우가 공정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공정거래법은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영화사, 방송사, 드라마 제작사 등의 기업이 개인 예술인들에게 적절한 대우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 관행으로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들이 모래알처럼 모일 수 없기에 힘을 낼 수 없는 것이고, 계약을 협상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처우를 개선할 수 없다는 건 확실히 공정치 못하다. 문화 예술 산업에서의 불공정거래행위는 또 있다. 바로 드라마, 다큐멘터리, 오락 프로그램 제작사들의 경우다. 드라마 출연진들은 제작 환경이 거의 생방송 수준이라고 꼬집는다. 대본은 늦게 나와 인물을 파악할 수 있는 시간 여유도 없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촬영 현장과 휴게실에 냉난방이 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이며,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는다는 하소연이 대단하다. 대기업이 중소기업 괴롭히는 것만이 공정거래법 위반은 아니다. 힘있는 거대자본이 큰 이익을 내면서도 힘없는 작가-스태프에게 돈을 적게 주는 것도 불공정거래다 어떤 배우는 드라마를 찍다가 영화를 찍으러 가니 지옥에서 천당으로 간 것 같다고 하기도 했다. 특히 다큐멘터리 등을 제작하는 독립제작사들은 환경이 더 열악해서 정말 이 일에 ‘미쳤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생활을 생각하면 도저히 해나갈 수 없다는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방송사는 방송통신위원회가 관장하고, 드라마 제작사나 독립제작사는 문화관광부가 관장하는 등 영역이 나뉘어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감독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이런 문화 예술 산업 분야의 불공정거래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고 최고은 씨의 사망 사건 같은 비극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 공정위가 기존의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분야에만 천착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문화 예술 산업분야가 제대로 작동되는지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의 문화 예술 산업구조가 선진화 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예술인 복지법이 더 확장되는 것보다도 우리 공정위가 적극적으로 감독해 힘없는 개인 예술가들이 대기업처럼 당당한 대우를 받는 날이 먼저 오기를 바란다. - 조윤선 의원(한나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