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세 번째 맞는 새천년 시대에 일류국가로 존재하기는 힘들다. 여성의 약진이 양과 질 모두에서 대단한 속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여성의 시대라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행동은 그와 반대방향을 향하고 있는 이 대한민국 사회의 애매모호한 태도를 어찌 이해해야 할까! 정당 전당대회에서 여성 당직자가 뺨을 맞는 이 사회가 여성을 존중한다고 할 수 있는 사회인지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니까. 성폭력과 성매매와 성희롱이 도처에서 활개치는 이 사회는 ‘젠더 레짐’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없다. 아예 귀를 막고 있다. 왜 저출산이 야기됐는지, 여성의 출산반란 현상이 어떤 사태를 반영하는지 핵심요인 논의는 피하면서 언저리에서 어설프게 대책을 말하고 있다. ‘복지 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에서 복지국가의 세 가지 유형 체계 분류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에스핑 앤더슨은 2009년 아주 예리한 지적을 하며 새로운 정치경제 모형을 제시한다. 그는 21세기 세계자본주의 시대에 사회적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3대 요인으로 첫째 여성의 역할 변화에 대한 제도의 적응 부족, 둘째 지식기반 경제로의 전환에 대한 아동의 대비 부족, 셋째 새로운 인구학적 변화에 대한 대응 부족을 꼽고 있다. 이 세 가지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가족도 아니고 시장도 아닌 다름 아닌 국가라고 그는 주장했다. 또한 새로운 복지국가 사회정책은 무엇보다도 양성평등을 지향하고, 가족의 불평등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와 인구고령화에 수반되는 불평등에 주목해야 함을 설파한다. 젠더의 중심성을 중점적으로 강조한 셈이다. 여성에 대한 고려 없이는 사회도 정치도 경제도 발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학문적 통찰로 알려주는 결론이다. 여성에 대한 고려를 늦춘다는 것은 눈뜨고 알려주는 지혜도 못 갖는 무모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나중에 후회해도 때는 늦을 것이다. 선택은 우리 모두에게 달려 있다. 2010년부터 새로운 성불평등지수(GII: Gender Inequality Index)로 대체돼 이제 더 이상 없어진 국제적 비교지표지만 여성권한척도(GEM: Gender Empowerment Measure)는 그동안 각국 여성들이 정치·경제활동과 정책결정 과정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는지를 점수로 환산해 1995년 이래로 발표해 왔다. 1995년 한국은 1점 만점에 0.25점이었는데 세계 116개국 중 90위로 거의 최하위권의 충격적 수준이었다. 그 후 매년 발표된 GEM에서 한국이 계속 하위권에 머물러 있어도 정부는 애써 외면하는 자세만 보였고 적극적으로 개선을 할 기미는 없었다. 요즈음에는 더욱 후퇴하는 경향마저 보인다. 여성가족부와 행정자치부의 노력은 미미하지만 역사적으로 공적도 있다. 행정관리직의 여성 비율이 세계 최하위권(2000년 4.7%)이라는 발표 이후 범정부 차원에서 관리직 여성 공무원 육성에 노력했다. 중앙부처별 여성 관리자 현황을 조사하고 육성 계획도 세웠다. 그간 한국의 행정관리직 여성 비율은 9.0%(2009년)로 향상됐으나 여전히 세계 평균 27.9%에 근접하지도 못하는 세계 최하위권(109개국 중 102위)에 머물러 있다. 한편, 2004년 이후 정치개혁의 일환인 여성공천할당제 등에 힘입어 국회에 여성 진출이 늘어나는 등 여성의 지위가 향상됐다. 그 결과 2009년 한국의 GEM은 0.55점으로 세계 109개국 중 61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경제순위 13위, G20 국가의 자랑이라고는 할 수 없는 수치다. 여전히 세계 하위권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0.75점에 크게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계 평균 0.58점보다도 낮다. 어떻게 우리나라가 양성평등에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는가? 아직도 원시국가임을 지표는 말해준다. 다시 정치의 계절이다. 여·야 모두 이번 정치개혁에서 젠더(성평등) 관점을 반영하지 못하면 우리의 비약적 발전은 또 다시 연기된다. 초고속으로 변해가는 시대에 발전의 원동력을 애써 외면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 아니겠는가? 새천년에 세계 중심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힘은 여성을 존중하고 여성의 역량을 강화하고 여성을 중히 쓰는 사랑의 정치에 있다고 믿는다. 여성인력 양성을 하지 않으면서, 준비된 역량있는 사람조차 중용하지 않으면서 사람 없다는 비겁한 이야기는 이제 정말이지 그만 듣고 싶다. - 안명옥 차의과학대학교 보건복지대학원 교수, 전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