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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 변고 있을 때 땀 흘린다는 석상, 왜 감춰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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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83호 박현준⁄ 2012.07.18 09:49:02

계양산에 있던 고려적 옛절터를 찾아 간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곳 계양산에 12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열두 개 절 중 대부분은 잊혔고 기록으로 전하는 절 이름은 봉일사(奉日寺), 만일사(萬日寺), 명월사(明月寺)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부평도호부 불우(佛宇) 조에는 봉일사, 만일사, 명일사가 ‘계양산에 있다(在桂陽山)’는 기록과 함께 고려의 문신 이규보(李奎報)의 시가 소개되어 있다. 인천 지하철 1호선 계산역 5번(또는 6번) 출구에서 출발한다. 산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는 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체육센터와 도서관이 있다. 산 앞에 이르면 경인여대 방향으로 좌향좌 한다. 잠시 후 경인여대가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우향우하여 100여m 나아가면 학교 담장 끝으로 백룡사라는 70년대 설립된 절이 나타난다. 옛 봉일사는 이 백룡사 앞에 자리했었는데 1990년 안타깝게도 경인여대 건물이 그 자리를 점하였다. 봉일사 터를 실측했던 조사에 의하면 가로 세로 약 50m쯤 되는 작지 않은 절이었는데 이제는 기억으로만 남고 흔적이 없다. 이 봉일사는 1799년(정조 23년) 발행된 범우고(梵宇攷: 절 내력을 기록한 책: 국립도서관과 동국대도서관 소장)에 “이미 지금은 폐사되었다”고 기록한 것을 볼 때 고려 중기부터 조선 중기 정도까지만 향(香)을 밝혔던 것 같다. 조선 중기 이후는 절집(寺刹)의 수난시대였다. 승려의 신분이 천민으로 떨어져 곳곳에서 유생(儒生)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고, 절을 훼손하거나 심지어는 불을 놓는 일까지 있었으니 승려 생활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시주(施主)도 줄어 경제적으로 절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시기였다. 요즘 절에 가면 만나는 칠성각(七星閣)이나 산신당(山神堂)은 원래 석가모니의 가르침과는 관련 없는 민초들의 토속신앙이었는데 절집이 살아남으려는 자구책으로 이 시기에 절로 불러들인 것들이다. 생존을 위해 절(寺刹)들이 몸부림쳤던 아픈 흔적이다. 봉일사도 이 시기를 넘기지 못하였으리라. 나라에 변고 생길 때 땀 흘린다는 문인상은 왜 꼭꼭 숨겨놓았을까 백룡사 앞마당에는 아주 고졸(古拙)한 3층 석탑이 서 있다. 만일사 터에 쓰러져 있던, 고려 말쯤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탑을 옮겨 다시 세운 것이다. 예술적 가치는 적지만 시대를 알 수 있고, 이 지역에서 제자리에 보존된 유일한 탑이라서 가치가 있다. 백룡사에는 또 하나 궁금증을 자아내는 석물(石物)이 있다. 대웅전 옆에 미륵전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그 안에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석상이 모셔져 있다. 필자는 몇 차례 이곳에 들렸지만 그 때마다 미륵전 문이 자물쇠로 채워져 있어서 한 번도 미륵불의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언제나 궁금하였다. 그런데 필자와 똑 같은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초례 치른 신랑 신부의 첫날밤이 궁금해 창호지 문에 침 발라 구멍 뚫듯이 어떤 이가 미륵전 창호문 한구석을 살짝 손가락 굵기만큼 뚫어 놓았다.

그 틈에 카메라를 대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특이하다. 미륵전에 모신 분은 아무리 보아도 미륵불로 보기에는 어색하다. 홀(笏)을 들고 서 있는 조선의 문신상(文臣像)인데 특이한 것은 사모(紗帽) 위를 흔히 미륵불의 보개(寶蓋)처럼 둥글게 장식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와 달리 몸은 사각으로 새겼다. 네모진 몸에 둥근 머리장식을 통해 아마도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을 표시한 것인 듯하다. 이 석상은 본래 부평초등학교 담 옆 작은 당집에 있었는데 1700년대에 백룡사에서 옮겨 왔다고 한다. 전해지는 전설로는 이 석상에 땀이 흐르면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긴다는,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터부도 가지고 있었다 한다. 지금은 자리를 옮겨 백룡사 미륵전에 꼭꼭 감춰져 있다. 흔히 옛절터나 당집, 길가 등에 있던 비지정 문화재는 관리하는 이가 없다 보니 먼저 가져가는 이가 임자가 되기에, 그렇게 제 자리를 떠난 것들이 너무도 많다. 무너진 옛 성의 돌, 임자 잃은 절터의 부도와 장대석, 폐묘의 석상, 옛 건물터의 초석…. 이런 흔적들이 오늘도 속절없이 사라져 간다. 백룡사를 나오면서 사찰 연혁을 적은 안내판을 읽어 본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 ‘동국흥지승람’이 되고 봉일사(奉日寺)가 춘일사(春日寺)로 기록돼 있으니 편치가 않다. 길을 나서다 보면 절 안내판뿐 아니라 많은 안내판에서 오류나 석연치 않은 기록들을 만나게 된다. 한 번만 신경 쓰면 될 일인데 어찌 이리도 무심한 것일까. 이제 절 뒤 산길을 통해 우측(동쪽)에 자리한 연무정(鍊武亭)으로 간다. 전국에 얼마 남지 않은, 국궁(國弓)을 쏠 수 있는 활터이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부평도호부 청사에 6간(間)의 연무당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대로 우리 선조들은 ‘네 탓’보다 ‘내 탓’을 먼저 찾았는데… 예전 군자(君子)라면 모름지기 6가지 예(六禮)라 하여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를 익혀야 했는데 그 중 射(사)가 바로 활쏘기였다. 공자도 활을 쏘았고, 정조(正祖)는 당대 최고의 명사수였다. 이곳에서 활 쏘는 이들이 지켜야 할 계(戒) 12가지를 적어 놓았는데, ‘發射不中 反求諸己(발사부중 반구저기; 쏘아서 맞지 않으면 그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아라)’라는 말이 쿵~ 마음을 때린다. ‘네 탓이요!’가 판치는 세상에서 ‘내 탓이요!’의 신선함이다. 연무정을 뒤로 하고 잘 다듬어진 등산로를 따라 산길을 오른다. 오르기를 20분이 안 돼 작은 정상부에 도착한다. 앞쪽에는 육각정이 있다. 이 정상부의 이름은 해발 230m의 고성산(古城山)이다. 즉 ‘옛 성이 있는 산’이라니 무슨 성(城)이었을까? 그 성의 이름은 계양산성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계양산고성(桂陽山古城): 석축둘레가 1937척인데 지금은 모두 퇴락했다(石築周一千九百三十七尺 今皆頹落)’라고 기록돼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계양산성에 대해 ‘삼국시대에 설치했다(三國時所設)’는 기록이 추가돼 있다. 계양산성은 봉우리를 중심으로 둥글게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山城)이다. 등산로에는 안전을 위해 나무펜스를 설치했는데 이 펜스 너머로 내려다보면 돌로 쌓은 옛 성의 모습이 역력히 남아 있다. 20년 전 인천시 기념물로 지정돼 여러 차례 발굴을 거쳤고 복원될 예정이라 한다. 실측한 둘레는 1180m였다. 무슨 이유로 이곳에 산성을 쌓은 것일까? 과연 삼국시대에 쌓은 것은 맞을까? 발굴의 결과로 그 진위를 헤아릴 수 있었다. 발굴된 명문기와(銘文기와: 글씨가 새겨진 기와)에는 고구려 영토 시절의 이곳 지명이었던 주부토(主夫吐)와 관련된 글자들이 많았다. 主, 主夫, 主夫十夫口大(?)… 月, 官, 草, 天(?)…. 다양한 문양도 출토되었는데 사선, 격자, 생선뼈, 복합 문양 등 다양했다.

이 시대라면 당연히 한강 하류의 패권을 다툴 때이니 물길로 움직이는 적의 동태를 살피고 군사 조처를 취하기에는 최적의 입지였을 것이다. 이 산성이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떠오른 것은 공교롭게도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서였다. 선조 25년(1592년) 5월 19일 부평에 진출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계양산성을 수축하고 본거지로 삼았다. 이들은 황어(黃魚), 김포를 지나 한강을 건너고 개성, 평양으로 내달았다. 조명(朝明) 연합군이 반격해 오자 밀려 후퇴하면서 행주산성에서 권율에게 참패를 당했는데, 이 패잔병들이 한강을 건너와 계양산성에 머물던 잔류세력과 함께 분탕질을 하고 후퇴했던 것이다. 이렇게 아픔을 간직한 계양산성에 또 하나 아픔을 준 것은 근세에 이곳을 공동묘지화한 일일 것이다. 죽은 영혼들이 다리 하나 제대로 뻗을 수 없을 정도로 빽빽했던 묘소도 이제는 대부분 옮겨갔다. 빠른 시일 안에 산성이 다시 살아나 삼국(三國)이 정립(鼎立)했던 그 시대의 꿋꿋했던 바람이 다시 이 산록을 스쳐 갔으면 좋겠다. 서울과 서해 두루 아우르며 제압하던 교통요지였는데… 서쪽을 바라보며 계양산 정상 방향으로 간다. 잠시 후 고성산과 계양산을 가르는 잘룩한 안부(鞍部) 하느재(하늘재)에 닿는다. 그 옛날 이 고개를 넘던 이들에게는 하늘 같이 아득한 고개였을까? 나무 데크로 쉼터를 만들어 놓아 등산객들이 쉬는 곳이다. 좌측은 남쪽 계산동으로 이어지는 도심 구간을 향하는 길이며, 우측은 무당골이라 불리는, 한때 기도처가 많았던 곳이다. 더 나아가면 고려나 조선 시절 금륜역(金輪驛)이 자리했던 역굴마을(현 多男洞)이다. 그 옛날 교통요지였건만 이제는 깊고 깊은 농촌 지역이다. 하느재에서 계양산 정상까지는 30여분 숨 가쁜 구간이다. 나무층계를 잘 설치해 놓아 어려움은 없다. 드디어 395m 정상에 오르면 송신소 탑이 높게 솟아 있고 정상석이 땀에 젖은 길손을 맞는다. 터진 시야는 넓고도 넓다. 서울의 모든 산, 인천 앞 바다 섬들, 북으로 김포, 일산, 교하, 파주, 남으로 한남정맥의 산줄기 사이에 있는 부천과 그 서쪽 인천 지역 등 모두가 속속들이 보인다. 하산 길로 들어선다. 피고개로 향하는 길이다. 피고개 하산 길은 중심성(징맹이고개) 방향으로 잠시 내려오다가 우측으로 갈라진다. 피고개까지는 750m의 비교적 가파른 길이다. 피고개로 내려오면 길은 4거리로 갈리는데 119신고 G-13 표지판이 있고, 길 안내판에는 좌로 징맹이고개(1540m), 앞으로 피고개산(200m), 우로 목상동솔밭(650m)임을 알리고 있다. 징맹이고개로 방향을 잡는다. 길은 숲길이어서 피로함은 없다. 10여 분 후 길이 습해지면서 작은 지붕을 덮은 길가 샘물을 만난다. 물웅덩이를 알리는 표지판도 있다. 조심스레 살피면 발밑으로 기와 파편들이 밟힌다. 좌로는 비스듬한 경사면에 길게 밭을 일구어 놓았다. 계양산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던 만일사(萬日寺) 옛터이다. 절터로 올라가 본다. 밭이랑 사이에 기와편과 도기, 자기편, 깨어진 전돌들이 무수히 깔려 있다. 절터는 2단이었다. 800여 년 전 이 절에 왔던 고려 문신 이규보가 생각난다. 동국여지승람과 동국이상국집에는 이때 이규보가 지은 시문이 남아 있다.

계양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면서 느낀 바를 적은 망해지(望海誌)에는 ‘만일사(萬日寺) 누대 위에서 바라보니, 큰 배가 물결 가운데 있는 것은 마치 오리가 헤엄치는 것 같고, 작은 배는 곧 마치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서 머리만 조금 내놓은 것 같고, 돛단배가 가는 것은 사람이 높은 모자를 쓰고 가는 것 같다(萬日寺樓上望之 大舶點波心僅若鳧鴨之游泳者 小船則如人入水微露其頭者 帆蓆之去僅類人揷高帽而行者)’라고 하였다. 이제는 이규보가 올랐던 누대는 흔적조차 없고 그 터마저 무너져 내렸다. 시간 너머로 아스라이 그리움만 남는다. 이규보는 최충헌에 비판적이었다가 위기에 몰렸는데 다행히 그 아들 최우의 배려로 고려 고종 6년(1219년) 5월 중앙관서에서 계양도호부사로 좌천됐다. 이듬해 6월까지 13개월 동안 이규보는 계양에 대한 60여 편의 시문을 남겼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규보의 개인적 불행이 800년 뒤 이 지역에 풍성한 문화유산으로 남게 되었다는 점이다. 매를 징발했다고 해서 징맹이 고개 이제 징맹이고개로 향한다. 계양산 둘레를 도는 길이다. 20여 분 후 징맹이고개 중심성(重心城) 옛터에 닿는다. 징맹이고개. 인천 부평구에서 서구로 넘어가는 큰 고갯길이다. 이 고개 이름에는 고려의 부끄러운 한 단면이 숨어 있다. 고려 25대 충렬왕은 유부남으로 40대에 원(元)나라에 가 세조 쿠빌라이의 딸(제국대장공주)과 겹치기결혼을 하였다. 원에서 배운 취미가 매사냥이었는데 고려로 돌아와서도 그칠 줄을 몰랐다. 국영매방을 설치하고 매를 키우며 송도에서는 물론 장단 도라산에서도 즐겼는데, 이 때 궁녀들을 동행시켜 호색(好色)함도 빼놓지 않았다.

제국대장공주가 질색을 하자 송도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계양산 고개에 국영매방을 설치했다. 그리고는 계양도호부의 격을 높여 길주(吉州)라 하고 죽은 뒤 이 땅에 묻어 달라고 했다. 이 정도면 마니아를 지나 광증(狂症) 아니겠는가? 그러나 충렬왕은 사후 이곳에 묻히지 못했다. 한편 매를 징발해 징매(徵鷹)고개가 됐고, 그 뒤 ‘징맹이고개’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정식 명칭은 景明峴(경명고개)이다. 고개가 험해 조선시대에는 임꺽정이 출몰했다고도 전해진다. 아마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임꺽정이 활약했던 구월산과는 장단 ~ 교하 ~ 고양 ~ 김포 ~ 계양으로 해서 삼남으로 연결되는 주요 통로였으니 앞뒤가 맞는 말이다. 이 고개에는 조선 고종 때 쌓은 중심성(重心城)이 있었다. 이제는 성돌 하나 찾을 수 없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사건 등을 겪은 조선 조정은 외세가 서울로 닥칠 일에 걱정이 많았다. 육로로 닥칠 경우 적절한 대비책이 없었다. 서울 도성에서 서해에 이르는 길은 세 길이 있었는데 도성에서 철곶포(양평동)에 이르고 여기서 강화로 이어지는 길이 120리, 인천 바다로 이어지는 길이 90리, 부평을 지나 서곶으로 이어지는 길이 70리길이었다. 그러니 부평을 통해 바다로 이어지는 길에 대한 수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길이 서곶(인천 서구) ~ 징맹이고개 ~ 부평 ~ 고음달래현(화곡동 곰달래길) ~ 철곶포(양평동) ~ 양화진(양화대교)이었다. “백성 넉넉하고 정사 편하면 된다”던 정조대왕 이에 징맹이고개에 성(城)을 쌓기로 했는데 나라에 돈이 없으니 고종은 돈 한 푼 안 주고 조칙만 내렸다. 그렇다고 부평부에 달리 예산이 있을 수 없었다. 부평부사 박희방(朴熙房)의 고민을 풀어 준 사람들은 바로 이 지역의 민초들이었다. 그들은 60금(金)을 출연했고 공역도 제공해 고종 20년(1883년) 공사 1개월 만에 징맹이고개 위에 성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에 부사 박희방은 백성들의 마음을 모았다는 뜻으로 성의 이름을 중심성(重心城)이라 했고, 고개 위에 오석(烏石)으로 중심성 사적비(重心城 史蹟碑)도 세웠다. 이렇게 마음 모아 세운 성은 1914년 일제에 의해 헐렸다. 사적비는 남아 있다가 해방 후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옮겼는데 인천상륙작전 때 맥아더 부대의 함포 사격으로 산산이 부서져 흔적도 없다. 이제는 성도 사적비도 사라지고 이름으로만 남은 중심성, 다행히 6.25 전 실시한 인천사적보고서 자료에 원고지에 흘겨 쓴 사적비 내용이 남아 있다. 계양구에서 발행한 ‘계양사’와 인천 어느 대학에서 조사한 ‘중심성 일원 문화유적 분포도’에 원문과 번역문이 소개돼 있다. ‘계양사’에 번역된 내용이 정확한 듯하다. 징맹이고개에서 앞길로 10여분 내려오면 삼림욕장이다. 이곳에서 계곡길 등산로를 30여분 오르면 산 중턱(119 안내 G-46) 좌측에 또 하나 이름을 알 수 없는 절터가 있다. 일부 자료에는 명월사(明月寺)라 하나, 명월사에서 쓴 이규보의 시를 보면 명월사는 아니다. 명월사는 계양산 북측이다. 되돌아 다시 산을 내려온다. 삼림욕장에 이규보의 시비가 있다. 그러나 오늘의 답사는 계양에서 읊은 정조(正祖)의 시로 마무리하려 한다. 桂陽山色克嬋娟: 계양산색은 곱다라는 말로는 다 못하네 百里秋登上上田: 백리 가을 곡식 익어가는 최고의 들판이여 民富政平斯可矣: 백성은 넉넉하고 정사 편하면 이 되지 않겠나 誰能更續武城絃: 누가 능히 새롭게 강태공의 태평세월을 이을 것인지.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걷기 코스 계산역 5번 출구 ~ 봉일사지(현 백룡사) ~ 연무정 ~ 계양산성 ~ 하느재 ~ 계양산 정상 ~ 덕고개 ~ 만일사지 ~ 징맹이고개(중심성) ~ 일명사지 ~ 계양산림욕장 ~ 버스정류장(경명로)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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