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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군자 장계향 순례길 스토리텔링 ②]

전부인 아들의 교육 위해 매일 5리 업고다닌 장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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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96호 박현준⁄ 2012.10.15 11:35:26

포항IC에서 영덕·울진 방면으로 7번 국도를 타고 가다 영해사거리에서 창수방면으로 2㎞를 지나 우측을 보면, 병풍처럼 둘러쳐진 뒷산 아래 넓게 자리 잡은 마을을 만날 수 있다. 시원스레 펼쳐진 넓은 들 하며, 삼면을 에워싼 산, 남쪽에 가로 놓인 내는 한 눈에 보기에도 이곳이 명당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시원하고도 포근한 느낌을 주는 원경도 그만이지만, 마을이 가까워질수록 즐비하게 자리를 잡은 고택의 모습은 또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이곳 인량리가 경북 최대의 보리 산지라고 하니 보리가 한창인 계절에 이곳을 찾는다면 새 생명의 풋풋함과 세월의 결을 그대로 품은 고택의 풍경이 조화롭게 어울려 한결 아름다울 것 같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마을, 나랏골 인량리 우리나라 5대 길지 중 하나이자, 한 마을에 8대 성씨의 12종가가 자리를 잡은 인량리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영남의 대표적인 양반 마을이다. 인량리(仁良里)라는 지명 역시 어질고 인자한 현인들이 많이 배출되는 마을이라 하여 광해 2년에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이전에는 마을 뒷산의 형국이 학이 날개를 펼친 곳 같다고 하여 나래골, 익동(翼洞), 비개동(飛蓋洞)으로 불렸다. 인량리는 현재 전통 테마 마을과 정보화 마을로 선정되어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마을로도 불리는데, 장계향의 흔적을 찾아 곱씹어보는 이 여행 역시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 만나고 대화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마을이 겪는 변화와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장계향이 인량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인량리가 남편 석계 이시명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19살에 재령 이씨 가문으로 출가하여 고향인 안동 검재를 떠나 충효당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후 시아버지 운악 이함이 별세하여 영양으로 분가하기 전인 43세까지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대가족을 이루고 살던 전통사회에서 혼인은 곧 삶의 확장을 의미했다. 낯선 시가의 가풍을 새롭게 익혀야 할 뿐 아니라 혼인으로 맺어진 수많은 관계와 의무를 책임져야 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아내, 며느리,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생애사적 과업을 수행하며, 장계향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지혜롭게 감당하고 삶을 확장시켜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석계 이시명이 운악 이함의 셋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장계향은 치가(治家)와 가문경영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맏며느리와는 달리 그 부담이 비켜선 자리에 있었지만, 시집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장계향이 혼인할 당시 충효당은 갑자기 들이닥친 두 아들(운악 이함의 첫째 아들 청계와 둘째 아들 우계)의 죽음으로 충격과 비탄에 잠겨 집안의 분위기가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큰 동서 무안 박씨는 곡기를 끊고 남편을 따라 순절할 생각을 굳히고 있었고, 잇따라 아들을 앞세운 참사로 집안일에 뜻을 잃은 시어머니를 대신해 젊은 안주인으로서 모든 역할과 책임을 져야 했다. 몰입과 삶의 확장, 인량리에서의 새로운 삶 아직 살림나지 않은 두 명의 시숙과 신일과 부일을 비롯한 청계공의 5명의 유자녀, 그리고 상일을 비롯한 남편의 전처소생 세 남매를 돌봐야 했다. 장계향은 그 모든 일에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여 치가하였다. 어려운 현실을 체념하거나 한탄하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살지 않고 어머니의 큰 품으로 끌어안으며 돌봄과 보살핌의 가치를 실천해 나갔던 것이다.

특히 그녀가 공인 들인 것은 자녀교육이었다. 전부인 소생의 여섯 살 배기 상일의 공부를 위해 어린 상일을 남쪽으로 5리 남짓 떨어진 남경훈 선생 집으로 매일 업고 다녔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 같은 새 며느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시아버지 이함은 “어미를 잃은 것이 아니고 죽은 어미가 살아 돌아온 것”이라며 동리 이웃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후 장계향은 실천과 선행을 강조하는 교육으로 전부인과 자신의 소생 7남 3녀를 모두 한결같이 훌륭한 인물로 키웠다. 장계향은 시집뿐만 아니라 효의 도리에 입각해 친정도 살뜰하게 보살폈다. 아버지 장흥효가 환갑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홀로 남게 된 아버지와 차마 떨어질 수 없었던 그녀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하락 하에 친정에 머물며 아버지를 보살폈고, 안동 권씨를 새어머니로 모신 후 살림을 꾸려갈 수 있을 만큼 도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새어머니와 4남매를 시집근처로 데려와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으며 이후 동생들이 고향 검재에서 일문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도 마련해 주었다.

한편, 살림이 크지 않았던 친정과 달리 당시 운악종가는 소문난 재력가로 거듭된 전쟁과 흉년으로 인한 기민을 구휼하는 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곳간을 열어 곡식을 내고, 그것도 모자라면 피난민과 굶주린 인근 사람을 먹이기 위해 도토리를 주어다가 죽을 쑤어 나누어 주었다. 구휼을 위해 산에서 모은 도토리가 1년에 2백가마나 되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지금도 충효당 대문 앞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오롯이 서 있는데, 시아버지가 심은 이 은행나무 아래에 솥을 걸어놓고 몰려드는 기민들에게 도토리 죽을 쑤어 구휼했다고 한다. 충효당에서의 삶은 친정에서 자라며 배우고 깨달았던 것을 생활 속에서 더욱 철저하게 실천하며 깊이를 더해가는 시간이었고, 현실의 문제에도 처절하게 눈을 떠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실천과 경험, 한층 깊어진 사유를 바탕으로 장계향과 이시명은 석보로 이주하며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된다.

장계향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영덕군 답사길 인량리 충효당 → 우계종택 → 자운정 → 갈암종택 → 원구리 난고종택 → 오촌리 갈암고택 ● 충효당과 은행나무 재령 이씨의 입향조인 이애가 지은 충효당은 장계향이 분가하기 전까지 살던 곳이다. 마을의 가장 뒤쪽 높은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곳에 서면 마을의 아름다운 한옥이며, 푸른 산, 넓은 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앉아 보이는 풍경이 흡사 넓게 펼쳐놓은 종이와 뾰족한 붓끝처럼 보여 사람들은 그 모습을 ‘문필봉’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문필봉을 보고 자랐기에 충효당에는 갈암 선생 같은 훌륭한 학자가 많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충효당의 대청마루 천장은 건축 당시 원형대로 서까래 위해 산자만 엮은 채 흙을 바르는 앙토 마감은 하지 않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다. 이는 인간이 미완성의 존재이듯 미완성 건축을 통해 겸손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 우계종택 충효당 아래에 있는 우계종택은 고즈넉한 초가지붕의 행랑채가 돋보이는 집이다. 운악 이함의 둘째 아들인 우계 이시형이 분가하기 위해 지은 집으로 무려 400년 전의 고택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모두 붙어 있으며 사랑채의 규모가 크지 않은데, 아마도 큰 손님을 모시는 사랑채의 기능은 뒤쪽에 있는 큰 종가인 충효당에서 담당했고, 분가한 집이기에 사랑채를 크게 짓지 않은 것 같다고 전해진다. 우계 역시 학문과 재능이 무척 뛰어났다. 당시 영해부에서 시비가 있을 때면 간명하고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화해를 주선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우계는 과거에 응시하고 돌아오는 길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는데, 아내인 무안 박씨 역시 남편을 따라 순절하였다. 두 동서가 남편을 따라 순절한 후 장계향은 실질적으로 맏며느리 역할을 하게 된다. ● 자운정 자운정은 장계향 내외가 처음 분가하여 살림을 낸 집터이다. 영남학파의 거두이며 이조판서를 역임한 갈암 이현일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후세에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자운정’이라 명명하고 태실을 지어 보존하고 있다.

● 갈암종택 갈암종택은 장계향의 셋째 아들이자 숙종 때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퇴계 학통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거두 갈암 이현일의 종택이다. 원래 갈암종택은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해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갈암은 어머니의 삶을 존경하여 그 행적이 담긴 ‘정부인안동장씨실기’를 남겼다. 실기 덕분에 장계향의 삶이 오늘에 전해질 수 있었으니 여러 아들 중에서도 특별히 그 인연이 깊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량리에서 갈암의 흔적을 조금 더 엿볼 수 있는 곳은 종택 외에 갈암묘소와 신도비, 냉천이 있다. ● 난고종택 조선 중기 학자로서 짧은 생애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의병장이자 효자로서 충과 효, 학문 등에서 훌륭한 삶을 보여준 난고 남경훈의 아들 남길이 인조 2년에 건립한 종택이다. 장계향은 첫째 부인인 광산 김씨 소생의 아들 상일을 가르치기 위해 나랏골에서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살던 남경훈을 찾아 매일 업고 다니는 정성을 보였다. ● 갈암고택 오촌리에 소재하고 있는 갈암고택은 갈암 이현일이 형인 존재 이휘일과 함께 임진왜란으로 황폐화된 오촌리 마을을 개척했을 당시에 건축된 것이라고 전해지며 거주기간은 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촌리는 인량리에서 창수면 소재지를 지나 차로 20분 정도 가면 나타나는데 이곳 역시 재령 이씨 집성촌으로 갈암고택 외에 존재종택과 명서암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 김명화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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