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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 19]소요산 단풍길

“이런 철에 단풍길 안 찾으면 철 모르는 철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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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98호 박현준⁄ 2012.10.29 10:56:58

지난 주로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도 지났다. 옛사람들은 어찌 보면 지금보다 훨씬 운치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날이 그 날 같은 우리네 삶 속에서 무엇인가 금을 긋고 산다는 것은 삶에 신선함을 가져다준다. 옛사람들은 찬찬히 살펴보니 해가 한 바퀴 돌아 제 자리에 오는 날이 360여일임을 알게 되었다. 그 날들을 12로 갈라 달(月)을 만들고, 달을 다시 둘로 나누어 절기(節氣, 엄밀히 말하면 氣: 15일)를 만들고, 이를 다시 셋으로 갈라 후(候: 5일)라 하였다. 그래서 5일마다 신경써야 할 농사일이나 물때도 살피고 15일마다 신경써야 할 계절의 변화도 느끼면서 살았으니 이를 기후(氣候)라 했다. 그러면서 철부지(不知)가 안 되려면 적어도 15일의 철바뀜은 알아야 하늘의 뜻에 따르기에 24절기(節氣)를 만든 것 같다. 24절기에 이슬내리는 상강(霜降)이 오면 서울 주변은 단풍이 짙어진다. 이런 날 물 한 병 김밥 한 줄 가벼이 챙겨 단풍길 나서지 않는다면 계절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전철 타고 떠나는 소요산(逍遙山) 단풍길이다. 소요산은 예부터 경기의 소금강(小金剛)이라 했다. 우리들의 중고등학교 시절 기차 타고 가을소풍 온 적도 있었고, 철나서는 단풍구경 온 날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등산화만큼은 단단히 조이고 출발이다. 산도 오르고 절터도 찾아가야 하는 길이니. 이런 날 물 한병 챙겨 단풍길 나서지 않으면… 1호선 전철 소요산행을 이용하여 소요산역으로 이동한다. 대략 30분 간격으로, 시청역 기준 80분 정도 걸린다. 이 전철은 청량리만 지나면 지상구간을 달리니 지루함은 없다. 소요산역에 하차해 길을 건너면 어느 길로 들어서도 소요산 상가지역으로 연결된다.

주차장 앞 보행로 좌측으로 조그만 비각(碑閣)이 서 있다. ‘애국지사 홍종문선생 추모비’다. 설명문에는 3.1운동 당시 선생께서는 1천여 명의 군중을 인솔하여 만세운동을 벌이셨다 한다. 일제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초를 겪으셨다는데 70년대에 이 지역 뜻있는 분들의 정성으로 비와 비각을 세웠다. 잠시 나아가면 관광지원센터가 있다. 이곳에서 소요산 안내서 한 부 꼭 챙기시기를. 거기에 소요산 산행지도가 비교적 자세히 실려 있다. 센터 앞쪽 화단 위에는 조그만 돌비석이 서 있는데 ‘李太祖 行宮址(이태조 행궁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600년 전 태조 이성계의 행궁터가 왜 이 골짜기에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조선초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이란 역사의 상처가 숨어 있다. 태조 1년(1392년) 8월 20일자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보자. “방석(芳碩)을 왕세자로 삼았다. …중략… “임금께서 물으시기를 누가 세자가 될 만한 사람인가?” 장자(長子)로써 세워야만 되고, 공로가 있는 사람으로써 세워야만 된다고 간절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배)극렴이 말하기를 “막내 아들이 좋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뜻을 정하여 그(방석)를 세자로 세웠다.”(芳碩爲王世. …중략… ‘上問誰可爲世子者? 未有以立長立功切言. 克廉曰: “季子爲可.” 上遂決意立之) 이태조 행궁이 이곳 소요산 골짜기에 있게 된 발단은 바로 이 날 이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고려 장군 이성계가 최영을 제거하고 실권을 잡은 후 반대파를 차례로 제거하여 역성혁명을 이룬 해가 1392년이었다. 태조 이성계에게는 향처(鄕妻: 고향 부인) 한씨부인과 경처(京妻: 서울 부인) 강씨부인이 있었는데 한씨부인에게서 6명의 아들을 두고, 강씨부인에게서 아래로 두 아들을 두었다. 문제는 세자책봉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건국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는 다섯째 아들 방원(芳遠)이었는데 방원은 세자책봉은 물론 공신(功臣)에도 오르지 못하였다. 방원의 세력을 꺾으려는 정도전 세력에 의한 견제였을 것이다. 8째 아들 방석(芳碩)이 세자책봉 된 것은 태조 이성계의 강씨부인에 대한 사랑도 있었겠지만 방원을 견제하려는 정도전 세력의 힘이 더 컸을 것이다.

태조의 한탄 “방번, 방석이를 죽이다니” 태조 7년(1398년) 8월 태조가 위독하였는데 왕자들은 모두 궐(闕)로 들어오라는 명이 떨어졌다. 방원은 태조의 위독함을 빙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한씨부인 아들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방원은 정도전 일파를 역습하여 제거하고 강씨부인 소생의 이복 아우 방번(芳蕃), 방석(芳碩)도 제거하였다. 이 사건이 ‘제1차 왕자의 난’인데 이는 정도전 세력과 이방원 세력의 권력다툼의 성격이 강하다. 여기에 충격을 받은 태조는 왕위에서 물러나 마음을 잡지 못하고 그야말로 주유천하(周遊天下) 하는 세월을 상당 기간 보낸다. 어느 날 백운사의 노승 신강(信剛)이 알현했는데 이태조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못하였다. “방번, 방석이가 모두 죽었소, 내 비록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구료(芳蕃、芳碩俱死矣. 予雖欲忘, 不可得也).” 배다른 형에게 죽음을 당한 어린 자식들에 대한 애비의 마음은 이런 것이었다. 그 많은 전쟁터에서 죽이고 죽는 삶을 살아 온 그도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거산 관음굴로, 평주 온천으로, 낙산사로, 보개산으로, 정릉사로, 안변 석왕사로, 금강산 유점사로…. 그러다가 방원이 왕위를 이어 받은 태종 1년(1401년) 11월에는 아예 짐 싸들고 이 곳 소요산(逍遙山)으로 들어왔다. 그 날의 실록기록은 이러하다. ‘中夜, 太上王幸逍遙山. 上欲送于門外, 不及’(한밤 중 태조가 소요산으로 갔다. 태종이 문밖에서 전송하려했으나 못 미쳤다). 요즈음 누군가 한밤중 가출하는 모습 그대로 아닌가. 이렇게 해서 태조 이성계의 소요산 생활이 다음해 6월까지 약 8개월 간 계속되었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야 소요사(逍遙寺)에 머무를 수 있겠으나 여러 날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태조는 드디어 궁중에서 문안차 나온 신하에게 절 아래에 집을 짓고 머무르겠다고 한다. 핑계는 훌륭한 스님이 있어서였다(此寺有名師, 欲於寺下營室居之). 이때가 엄동설한 한겨울이니 노복과 가까운 지역 백성들을 징발했는데 고생이 많았다. 드디어 태종2년(1402년) 3월 9일 별전(別殿)이 지어졌다(太上王營別殿于逍遙山下). 그런데 태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손님을 접대할 전(殿) 한 채를 더 짓고자 하였기에 한 채가 더 지어졌다. 이태조 별궁터의 정확한 위치는? 이렇게 소요사 아랫녘에 작은 규모의 두 전(殿)이 지어졌는데 현재 ‘이태조별궁지’ 표석이 서 있는 곳과는 거리가 있는 듯하다. 현종 때 남인의 영수로 노론 송시열과 대립각을 세운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란 분이 있었다. 고향 연천으로 가는 길에 소요산에 들렸던 이때 쓴 소요산기(逍遙山記: 요즈음 표현으로 하면 소요산 산행기)가 미수기언(眉叟 記言)에 실려 있다. 그 글에 별궁터를 비정할 수 있는 힌트가 있다. 골자기 입구 안팎 산 아랫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왕궁의 옛터 두 곳이 있는데 우거진 숲 속에 두어 층의 층계만이 남아 있으니, 이것은 영락(永樂: 명 성조/明 成祖의 연호) 때에 태상왕(太上王: 태조)의 행궁(行宮)이다. …중략… 궁터 위에 폭포가 있는데(谷口內外山下人相傳。‘王宮遺墟二處。荒草中有石砌數重而已。此永樂間太上行宮云 …중략… 宮墟上有瀑布…’).” 실록의 글과 소요산기를 종합해 보면 별궁은 두 곳으로 절(소요사, 지금의 자재암) 아래 더 구체적으로는 폭포(원효폭포) 아래쪽이 된다. 그렇다면 원효폭포에서 멀지 않은 아래쪽에 유허(遺墟)가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잠시 뒤로 미루어 두자. 관광지원센터 반대편 산 쪽으로는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기왕에 왔기에 잠시 들려 본다. 6.25 무렵 사용했던 탱크, 장갑차, 함포, 각종 포, 비행기 등과 참전 16개국의 참전비가 미니어처로 전시되어 있다. 오래 전 군(軍)을 전역한 이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이 될 것 같다. 이곳에서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박물관 건물 앞 오른쪽 끝에 서 있는 두 문인석(文人石)이다. 특이하게도 어유소(魚有昭) 장군 사패지(賜牌地) 경계석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사패지 경계석이라면 금표비(禁標碑)가 일반적인데 어찌 문인석으로 경계를 삼았을까?

어유소 장군은 남이 장군과 같은 시대에 활약한 당대의 대표적 무장이었다. 남이 장군과 함께 이시애의 난 평정에 큰 공을 세웠고, 어유소 장군은 좌장군으로, 남이(南怡) 장군은 우장군으로 여진을 정벌하기도 했다. 장군답게 영평(永平: 포천 동두천 지역) 함정현 활터에서 성종을 모시다가 과로로 급서(急逝)했으니 장군의 나이 56세였다. 남이 장군에 비해 너무 쉽게 잊힌 장군의 이름이 아쉽다. 이곳을 내려와 다시 산 방향으로 들어간다. 단풍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좌측으로 요석공주(瑤石公主)와 원효대사를 캐릭터화한 그림도 붙이고 꾸며 놓은 요석공원을 만난다. 원효대사가 소요산에 들어와 관음보살도 친견하고 깨우침을 얻었으며 소요사(자재암)도 창건하였다는 설화(說話)를 구체화한 것이다. 더욱이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과 함께 이곳에 와 별궁을 짓고 도 닦는 대사 곁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이런 설화를 살려 요석공주가 살았다는 요석궁지(瑤石宮址) 표지석도 세워 놓았다. 물론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설화를 살린 관광테마로서는 재미가 있다. 원효대사가 찾아헤맨 ‘자루 빠진 도끼’ 삼국유사에는 원효대사가 요석공주를 만나는 스토리가 실려 있다. 춘의(春意)가 동(動)한 대사는 길거리를 다니면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시겠소? 내 하늘을 받힐 기둥 하나 쪼개 보리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그러나 아무도 이 노래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 깎은 사문(沙門)의 입에서 차마 나올 수 없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자루 빠진 도끼(沒柯斧)란 여자의 성기(性器)를 묘사했으니 그것을 허락한다면 하늘을 받힐 아들 하나 낳겠다는 노래였다.

그러나 임자가 있는 법, 태종 무열왕이 빙긋이 웃는다. “대사께서 아들을 얻고 싶어 하는군.” 무열왕이 대사를 모셔 오게 했는데 심부름 나온 궁리(宮吏)도 만나기 전에 대사는 요석궁 앞 문천교에서 덜커덩 물로 빠져 버렸다. 급하기도 하셔라. 어찌 할 수 없이 옷을 말리러 요석궁에 갔는데 과수댁이 되어 홀로 살고 있던 요석공주와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지 공주가 임신하여 아들 설총을 낳았다. 이후 대사는 승복을 벗고 속복(俗服)을 입고 다녔으며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하였다. 안쪽 길로 계속 들어가면 매표소를 만나고 이어서 야생동물보호구역 말뚝이 서 있는 앞으로 운동시설이 있는 공터를 만난다. 이 공터 좌측 산 쪽으로 작은 공터가 있는데 이곳에는 오래 전 기와 파편이 수습된다. 다시 앞으로 100m 정도 나아가면 ‘천천히’ 주행하라는 교통표지판 좌측 산언덕에 작은 공터와 벤치 두 개가 있는데 이곳에서도 오랜 기와편 한두 점이 수습된다. 앞쪽 길 100여m 전방에 일주문 너머로 원효폭포가 있다. 혹시 두 개의 이태조 별궁터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일주문을 지나면 눈 앞 만학준봉(萬壑峻峰) 사이에 원효폭포와 원효굴을 만난다. 이 계곡으로는 길이 막혀 있기에 우측 속리교(俗離橋)를 건넌다. 오늘 절터 찾아 가는 길은 108계단 지나 자재암 가는 길부터 방향을 잡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소요산에 4개의 절이 소개되어 있다. 중대암(中臺菴), 백운암(白雲菴), 소요사(逍遙寺), 소운암(小雲菴)이다. 안타깝게도 소요사를 제외하고는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미수 선생의 소요산기에도 4개의 절 이름이 거론되었다. 중대 쪽 큰 절터, 소요사, 현암(懸庵), 사자암(獅子庵)이다. 이제 나무로 만든 108계단을 오르면 해탈문이다. 머리맡에 종을 매달아 놓았는데 지나는 사람마다 종을 울려 해탈의 경지로 들어간다. 해탈문 바로 앞에 그 옛날 원효대사가 도를 닦았다는 원효대가 있고 이곳을 지나면 1978년에 열반한 추담선사부토탑과 신도비가 있다. 그 앞으로 층계를 오르면 자재암(自在庵)에 이른다.

“젖 같은 맛의 옥 같은 샘물” 옛 이름은 소요사였는데 잠시 영원사가 되었다가 그 후 자재암이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소요사를 태조의 원찰로 삼고 밭 150결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태조가 머물다 간 인연의 결과였다. 이 절에는 세조 10년(1464년) 간행된 ‘반야바라밀심경 약소(略疏)’가 보물 1211호로 보관되어 있다. 나한전 옆 바위가 우뚝 선 곳 바위 사이에 샘이 있는데 원효샘(井)이다. 봉선사와 그 말사를 기록한 봉선본말사지에는 원효성사(聖師)가 주장자를 꼽았는데 거기에서 샘이 솟은 것이 원효샘이라 한다. 물맛은 여전히 좋다. 고려조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도 이곳 샘물 맛을 보고 시를 읊었다. ‘茶샘에 옥 같이 찬물 고이기에 마셔 본 그 맛 젖 같구나(茶泉貯寒玉 酌飮味如乳).’ 나한전 앞 층계길로 오르면 소요산 산행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50m 뒤 등산길은 하백운대 방향과 선녀탕 방향으로 나뉜다. 우측 선녀탕 방향으로 길을 잡자. 거리표지 0.65km가 기록되어 있다. 계곡을 따라 650m 가면 기암절벽 아래 옴폭한 소(沼)가 선녀탕이다. 선녀가 목욕하기에는 지형이 약간 험악하다. 종단에서 발행한 ‘한국의 사지’에는 이곳 절벽에 매달리듯 현암사(懸岩寺)가 있었다는데 아무리 찾아도 기와편 한 조각 초석 한 장 찾을 수 없다. 아마도 위치 비정(比定)이 잘못된 것 같다. 이곳에서 계곡을 따라 300~400m 오르면 중백운으로 오르는 산길 시작점에 자그마한 절터가 있다. 축대도 모양이 완연하고 기와편도 많이 흩어져 있다. 소요산기에는 중봉 아래 바위도랑을 지나 현암(懸庵)의 동남으로 나와 의상대에 올랐다 하니 이 절터가 현암(懸庵)일 가능성이 있다. 절터에서 중백운까지 가파르게 40~50분 오른다. 중백운(510m)과 상백운(560m)은 약 600m 거리를 격해 있다. 다시 상백운으로 향한다. 상백운 못 가서 소요지맥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 있다. 소요산 ~ 국사봉 ~ 왕방산 ~ 해룡산 ~ 천보산 회암사로 이어지는 20여km의 길이다. 웅장한 산줄기가 바라만 보아도 가슴 설렌다. 태조 이성계는 소요산을 떠나 천보산 회암사로 갔다. 어느 날 이 산길을 걸어 태조 이성계의 흔적을 다시 찾아보아야겠다. 곧 상백운에 닿는다. 태조 이성계의 시 등백운대(登白雲臺)가 소개되어 있다. ‘引手攀蘿上碧峰(인수반라상벽봉) 손뻗어 넝굴 잡고 푸른 봉에 올랐네 一庵高臥白雲中(일암고와백운중) 암자 하나 흰구름에 자리했는데…’ 이곳부터 칼바위 능선 지나 나한대(571m)까지는 1.3km의 능선길이다. 중간에 선녀탕으로 하산할 수 있는 안부 갈림길이 있다. 나한대 지나 소요산 최고봉 의상대(587m)로 간다. 약 200m의 가까운 거리다. 주위의 모든 산이 조망되는 곳이다. 소요산기에는 의상대 북쪽에 사자암(義相臺 其北獅子庵)이 있다 하였으나 그 흔적은 끝내 찾지를 못한다. 의상대에서 약 550m 내려와 샘터갈림길에서 하산코스를 잡는다. 오늘은 앞 공주봉은 오르지 않는다. 샘터까지는 약 600m 하산길이다. 돌탑도 쌓아 놓은 기도터가 보인다. 잠시 내려가면 또 하나의 절터 ‘구절터’가 있다. 미수 허목이 왔던 1600년 당시에도 절터만 남아 있었다. 이 절터 경내 조금 떨어진 동북쪽에 또 하나의 암자터가 있다. 이름도 내력도 잊혀졌다. 골짜기에는 가을 계곡수 위로 붉은 단풍이 떨어진다. 역시나 소요산이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1호선 전철 이용해 소요산역 하차 걷기 코스 전철역 ~ 자재암 ~ 선녀탕 ~ 중백운 ~ 상백운 ~ 나한대 ~ 의상대 ~ 샘터갈림길 ~ 구절터 ~ 일주문 ~ 전철역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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