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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 재벌사] 한진그룹 편 3화

70여 년간 운송업 ‘한우물’, 계열분리 후 ‘형제전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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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00호 박현준⁄ 2012.11.12 11:39:34

1972년부터 정부는 한우와 육우의 증식을 목표로 한 축산진흥정책의 일환으로 대기업들에게 축산업 참여를 권장했다. 농가소득도 제고하고 국민들의 먹거리도 선진화하려는 배려 차원이었다. 한진은 목축업과 광업, 생수업을 목적으로 1972년 3월에 제동흥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의 한라산 동쪽 중산간 유휴지 451만1000평을 확보하고 제동목장을 개설한 것이다. 이곳에 생산성이 높은 초지를 조성하고 사료 생산을 통해 육우의 증식과 개량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 광대한 면적에 최신장비와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한우 및 육우(앵거스, 샤로레) 300여두를 사육했다. 그러나 당시 세간에서는 한진이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외화로 부동산투기를 했다는 소문들이 회자되기도 했다. 목장 개설 때 부동산투기 의혹 휩싸여 제동흥산은 생수 생산도 병행했다. 국내 최고의 청정지역인 제주도 한라산자락에서 생산되는 생수는 미네랄 성분이 풍부할 뿐 아니라, 수질 또한 극히 우량해 국내시판은 물론 국제수질 인증조건에도 부합했던 것이다. 남제주 표선면에 생수 생산시설을 설치하고 프랑스 에비앙사와의 기술제휴해서 1984년 8월 30일에 제주도로부터 지하수 개발허가를 취득했다. 취수량은 하루 최대 200톤, 월 3000톤이었는데 제동흥산은 이를 대한항공을 비롯한 국내취항 외국 항공사와 국내 유명호텔 및 외국기관 등에 공급했을 뿐만 아니라 중동과 동남아로 수출하기까지 했다. 경북 동해안의 후포 지역과 강원도 내륙 증산지역의 양질의 석회석광구(매장량 1억톤 추정)를 확보하고 포항제철과 장기공급계약을 맺어 1976년까지 약 1100만톤의 석회석을 공급했다. 1987년 5월에는 광양제철소 제2기가 준공됨에 따라 석회석 증산을 목적으로 1987년 7월에 제2 분쇄공장을 준공, 연산 120만톤의 생산능력을 갖추는 등 지속적인 포항제철의 생산능력 확충에 부응했으며 1989년에는 연산 240만톤의 생산시설과 5000톤급 전용항만시설을 갖추었다.

4남 조정호, 금융계열사 분리 가장 먼저 독립 1990년 5월에 목장을 운영하는 제동흥산(주)과 제주생수, 평해광업개발 등 3사로 분리했다가 1995년에 제동흥산은 한국공항에 흡수되면서 폐쇄법인이 됐다. 한진은 1300만㎡에 이르는 막대한 제동목장 부지보유만으로도 엄청난 시세차익을 얻는 결과를 초래했다. 1973년 4월 국내자본 육성정책의 일환으로 메리츠종금증권은 자본금 5억 원의 한일증권이란 이름으로 설립됐다. 이후 1990년 사명을 한진투자증권으로 바꾸고 1992년 1월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당시 규모는 자본금 500억 원이고 임직원 530여명에 서울 강남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에 14개 지점을 거느린 중견 증권회사로 성장했다. 2000년 3월에 상호를 메리츠증권으로 변경하고 같은 해 4월에 한진그룹에서 계열분리되었다. 조중훈(1920~2002)의 4남인 조정호가 한진그룹의 금융계열사들을 분리해서 형제들 중 가장 먼저 독립한 것이다. 한편 2005년 10월에 메리츠화재로 상호변경된 동양화재는 그해 11월에 메리츠증권의 최대주주인 트레이더인베스트먼트의 지분 25.33%(878만7873주)를 인수했다. 트레이더인베스트먼트는 영국 프루덴셜 계열의 PAMA가 말레이시아 라부안에 세운 페이퍼컴퍼니로 2000년 한진투자증권과 제휴하면서 메리츠증권 지분 25.33%를 인수했던 것이다. 조정호는 메리츠화재의 지분 22.33%를 보유한 최대주주였다. 따라서 메리츠화재가 트레이더인베스트의 지분을 인수할 경우 최대주주 지분율의 변동 없이 조정호의 메리츠증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메리츠화재는 한불종합금융의 지분 73%도 인수했다. 2007년 1월에 한불종금의 대주주인 Societe Generale(지분 41.5%)과 대한항공(15.1%), 정석기업(6.1%), 한국공항(6.0%)의 지분 70.2%를 자회사인 메리츠증권과 함께 인수한 것이다. 2007년 1월에는 상호를 메리츠종합금융으로 변경했다. 메리츠종합금융은 국내 경제의 지속성장을 위한 정부의 외자조달창구 다변화정책의 일환으로 한진그룹과 국내 주주들, 프랑스 Societe Generale은행과의 합자로 1977년 9월에 한불종합금융으로 설립되었다. 동사는 외자도입과 국제금융주선, 설비 및 운전자금의 투융자, 팩토링업무, 해외투자, 외환업무 등 다양한 영업활동을 전개한 결과 1986년에는 수익증권 설정고 1500억 계좌를 돌파하기도 했다. 메리츠종금증권은 설립 이래 약 40년 동안 업계 10위권 규모로 성장했다. 2010년 현재 CMA(종합자산관리계좌) 잔고는 1조2500억 원으로 10위이며 자본금은 3089억 원으로 12위다. 영업수익은 1354억 원이며 세전이익도 360억 원을 시현했다. 또한 2010년은 메리츠종금증권에 새로운 도약의 원년이었다. 2010년 메리츠증권과 메리츠종합금융이 통합해서 메리츠종금증권으로 출범했기 때문이다. 증권과 종금이 합쳐지면서 메리츠종금증권은 원금이 보호되는 종금형 CMA(종합자산관리계좌) 기반을 더욱 넓힐 수 있게 됐다. 이 합병은 2010년 4월 1일자로 마무리됐다. 메리츠종금증권은 산하에 메리츠화재, 메리츠자산운용, 메리츠금융정보서비스, 리츠파트너스, 메리츠비즈니스서비스 등 6개 자회사를 거느린 금융전문 그룹으로 전환했다. 1970년대 수출드라이브정책에 기인한 국내무역 확대로 수출입 물량이 급증하면서 국제해운 정기항로 개설과 해사운송 컨테이너화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당시 국내 해운업은 노후된 선박과 자본부족, 기술수준 낙후, 치열한 국제경쟁 등으로 고전 중이었다.

1974년 5월에 한진해운을 설립했다. 1978년에는 한국과 중동 간에 풀컨테이너선을 취항시켜 국내 컨테이너수송전문화시대를 열었을 뿐 아니라, 1979년에는 4척의 풀컨테이너선으로 극동-북미항로를 개설했다. 1983년에는 북미 태평양 서안항로 주간배선(週間配船) 서비스를 개시한 이후 성장을 지속해서 1986년에는 국내 최대의 풀컨테이너선인 2700TEU급 ‘한진뉴욕호’를 국적선박의 공백지대이던 북미 동안(東岸)항로에 취항시켰다. 한진해운, 세계 10대 컨테이너 선사로 우뚝 1987년 12월에는 국내 최고(最古)의 전통과 노하우의 대한상선을 합병했는데 동사의 모태는 1949년 12월에 설립된 대한해운공사이다. 정부가 광복 직후 불모지나 다름없던 해운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반관반민의 특수회사를 창립한 것이다. 1950년 1월 회사보유 5척과 정부대여선 20척 등 총 25척 4만3344 총톤으로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한 대한해운공사는 1950년 2월 한일항로 개설 등 원양 항로를 잇달아 개척하며 외항 화물 수송의 일익을 담당했다. 1968년 11월 민영화를 거쳐 1980년 2월 대한선주로 사명을 변경했으며 1987년에 한진해운에 인수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한진해운은 전 세계 5개 항로에 풀컨테이너선 24척, 벌크선 14척의 국내 최대 컨테이너선 수송전문 기업으로 부상했다. 1990년 당시 한진해운은 컨테이너 화물운송(북미 동서해안항로, 북미 서북해안항로, 북미 서남해안항로, 유럽항로, 한일항로)과 원양 벌크선 화물운송(중동정기항로, 부정기선 항로, 전용선 항로) 및 북미내륙 이단적(二段積) 열차서비스, 냉장 및 냉동서비스, 동남아 지선서비스 등을 영위하고 있었다. 1994년에는 조중훈의 3남인 조수호(1954~2006)가 사장에 취임, 1995년에는 거양해운을 흡수합병했다. 거양해운은 외항 화물운송, 해운 중개, 선박 관리 등을 목적으로 1990년 11월에 설립되어 1993년 10월에 영일해운을 흡수합병했으나 1995년에 한진그룹에 경영권이 이관되었던 것이다. 거양해운은 1999년 11월에 동해펄프와 제지용 원료 수송을 위한 화물 운송계약을 체결, 2002년 6월 안전보건경영시스템(OHSAS 18001) 인증을 취득했다. 그러나 2006년에 조수호가 지병으로 타계, 그의 처 최은영이 경영을 전담하면서 2009년 12월에는 한진해운홀딩스로 상호를 변경하고 지주회사로 전환하였으며, 해운사업 부문을 인적분할하여 (주)한진해운을 신설법인으로 설립하였다. 한진해운은 2010년 현재 세계 10대 컨테이너 선사로 자리매김했다. 한진중공업의 출발은 1989년 6월 대한조선공사 인수로부터 비롯되었다. 동사는 일제하인 1937년 7월 10일에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중공업(주)으로 설립되었다.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귀속재산화되어 (주)대한조선공사로 상호를 변경하고 1960년대 후반까지 국영기업으로서 국내 최초로 철강선 건조, 공작기계인 선반 및 철도차량 등을 제작하였다. 1968년 대한조선공사(주)로 민영화된 이후 ‘조선입국’의 기치 하에 설비를 확충하여 1970년대 초반 국내 최초의 대형 수출선인 3만톤급 석유제품 운반선 6척의 건조를 시작으로 국내외 각종 선박을 자체 설계, 건조해왔다. 또한 객차·화차 및 발전차, 지하철 전동차 제작뿐 아니라 코크스 플랜트 및 발전설비 등 국내외 각종 기계, 플랜트공사 수행을 통해 1970~1980년대 국가 중화학공업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세계 해운 및 조선경기의 침체로 인한 경영악화로 1989년 5월에 부산 내항의 8만여 평 부지의 영도조선소와 기계플랜트 및 철도차량을 제작하는 5만평 규모의 다대포제작소, 7만여 평 규모의 울산조선소를 포함한 4개 계열사와 함께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동년 6월에 (주)한진중공업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1999년에는 코리아타코마조선공업, 한진종합건설, 한진건설을 합병했다. 한진종합건설의 전신은 대한준설공사인데 동사는 1967년 8월에 국영으로 설립되어 전국의 항만과 항로 준설을 주로 했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인데다 수출입 물동량 증가에 따른 항만 확대, 군소항구의 증축 등에 따른 항만준설 수요가 점증한 것이다. 또한 산악지역이 많은 국내 특성상 내륙의 강과 하천은 호우 때 상류에서 흘러내린 많은 토사축적으로 강바닥이 드러나는 등 건천화되어 갈수기에는 물 부족과 수질악화, 홍수 때에는 수위상승으로 피해가 증가되었던 것이다. 1987년 4월 한진그룹은 한국상업은행(우리은행)으로부터 대한조선공사의 건설사업 부문을 인수해서 1990년에 한진종합건설로 명칭을 변경했던 것이다. 2남 조남호, 한진중공업그룹 계열분리 1991년 6월에 한진이 인수한 코리아타코마는 1978년 초부터 공기부양선을 개발하기 시작하여 1980년 여름에 수상전용 공기부양선을 완성했으며 1979년에는 수륙양용 공기부양선도 개발한 특수선 제작전문업체였다. 2000년 3월 여객운송사업, 정보통신 및 인터넷 관련 사업을 신설하였고, 2002년 6월 수상함 및 수중함 건조 부문에서 국방 품질시스템인증을 취득하였다. 한진건설은 1968년에 설립한 한일개발의 후신이다. 2005년 10월 한진그룹에서 계열분리된 뒤 2006년 4월 1일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에 지정되면서 한진중공업그룹으로 출범하였다. 조중훈의 2남인 조남호 몫으로 한진그룹으로부터 떨어져나간 것이다. 2005년 그룹 매출은 2조8000억 원으로 2006년에 처음으로 대규모 기업집단에 이름을 올렸는데 재계순위는 공기업 포함 42위이다. 같은 해 7월 한진도시가스(주)를 계열회사에 추가하였고, 8월에 지주회사로 전환하면서 기존의 조선 및 건설사업부문을 분할해서 (주)한진중공업을 신설법인으로 설립하였다. 계열사로는 주력인 (주)한진중공업을 비롯하여 (주)대륜E&S, (주)한국종합기술, (주)한일레저, (주)대륜에너지, (주)대륜발전, 별내에너지(주) 등의 국내 법인과 Hacor Inc, Arabian Hanil, Hanjin Phil Corp, HHIC-Hong Kong Ltd, HHIC-Tech Inc, HHIC-Mindanao Inc, HHIC-Denmark Aps, HHIC-Cyprus Ltd, HHIC-Phil Inc, Hacor Phil Corp, HHIC-Shipping Ltd 등의 해외법인이 있다. 한진은 1945년 창업 이래 70여년 가까운 세월동안 오로지 운송업에만 매진했다. 따라서 한진그룹의 사업내용은 유사한 역사를 지닌 국내의 여타 재벌들에 비해 사업내용이 비교적 단조롭다. 한진그룹은 창업자 조중훈의 장남 양호의 한진그룹(대한항공. 한진. 한국공항, 정석기업, 인하학원, 정석학원)과 둘째 남호의 한진중공업그룹(한진중공업 조선. 건설부문), 4남 정호의 메리츠금융그룹(메리츠화재. 증권, 종금) 등으로 분리됐다. 2006년 지병으로 사망한 셋째 조수호의 몫은 한진해운이다. 모체인 한진그룹으로부터 3개의 파생재벌이 새로 생겨난 것이다. 그 와중에서 형제들 간에 재산문제로 갈등이 표출되기도 했는데 특히 2002년 창업자 조중훈의 사후에 갈등이 심화되어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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