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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 종묘스토리 ③] 하마비(下馬碑) 앞 임금의 효도

만인지상 임금이 효를 생각하는 ‘인성의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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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19호 박현준⁄ 2013.03.25 13:54:06

종묘 입구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임금의 우물인 어정 앞에 있다. 태종 12년(1412년) 예조에서는 ‘대소신민으로 종묘와 궐문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리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어기는 자는 헌사로 하여금 규찰해 다스리게 하소서’라고 건의했다. 태종은 13년(1413년) 2월에 예조에 나무로 만든 표목(標木)을 세우게 했다. 표목 전면에는 ‘이곳을 지나가는 대소 관리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大小官吏過此者皆下馬)’고 쓰여 있다. 2백여년이 지난 현종 4년인 1663년 10월에 돌에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는 글을 새겨 세웠다. 누구나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는 의미이다. 종묘의 하마비는 경운궁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형식이다. 하마비는 높이 132cm, 너비 58cm, 두께 20cm이다. 태종실록에는 말에서 내리는 거리가 나와 있다. 1품 이하는 10보(步) 거리에서, 3품 이하는 20보 거리에서, 7품 이하는 30보 거리에서 말을 내려야 한다. 1품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도제조 좌찬성 우찬성 판사, 제조 등이다. 고위관료는 5~7m, 중간관리는 10~15m, 하급관리는 20m 앞에서 예의를 차려야 했다. 그런데 하마비 앞에서 모든 이가 내리는 것은 아니다. 종묘, 궁가, 문묘에는 말을 타고 입장할 수 없다. 그러나 동헌의 경우에는 달랐다. 고을 수령보다 높은 벼슬아치는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임금은 종묘에서 어떻게 했을까. 궁에서 연(뚜껑 있는 가마)을 타고 온 임금은 하마비 앞에서 잠시 멈추고 마음을 경건히 한다. 이 때 신하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임금 주위에 도열 한다. 임금이 다시 출발할 때 신하들은 존경하는 뜻으로 몸을 굽힌다. 임금은 숙소인 재궁 밖의 대문에 이르면 여(뚜껑 없는 가마)로 옮겨 탄다. 성종 때 완성된 국조오례의 ‘종묘도설(宗廟圖說)’에는 정전의 담은 있으나 종묘 외곽의 담은 없다. 그런데 숙종 때 제작된 종묘의궤의 ‘종묘도설’에는 외곽의 담이 그려져 있다. 이로 볼 때 외곽 담장이 없던 초창기에는 임금이 재궁 대문에서 여로 갈아탔고, 외곽 담이 쳐진 이후에는 외대문 밖에서 여로 옮겨타고 재궁에 이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임금은 체력 단련을 위해 사냥을 자주했다. 이 때 말을 타고 사냥터로 간다. 궁을 떠날 때나 입궁을 할 때나 하마비를 의식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어가인 연이나 말을 타고 대궐에 들어온다. 그러나 종묘에서는 하마비에서 내리지는 않지만 잠시 경건한 예를 취한다. 또 재궁 밖이나 외대문에서 뚜껑이 있는 여로 갈아탄다. 이는 효도를 다하기 위함이다. 만인지상의 임금이지만 종묘에서는 선조들의 후손에 지나지 않는다. 제사를 경건히 모시는 것은 후손된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종묘는 효의 상징이다. 임금은 종묘의 제사를 통해 조상에게 예를 다하고, 백성에게 사람 도리에 대한 모범을 보인다. 종묘의 하마비와 외대문은 효와 바른 인성을 생각하게 하는 의미 깊은 곳인 셈이다. 정조대왕, 하마비에서 탕평을 말하다 하마비에서 유래된 게 하마평(下馬評)이다. 취임, 이동, 임명 등 인사에 대한 세간의 소문이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사는 대궐, 임금의 조상을 모신 종묘, 성현을 기리는 문묘 등에는 하마비가 세워졌다. 옛날에 말을 탈 정도면 상당한 신분이다. 지위가 있는 사람은 대개 말고삐를 잡은 마부와 동행한다. 말에서 내린 사람이 용무를 볼 때 마부끼리 모인다. 이들은 서로 안부를 물으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눈다. 이 때 자신들이 모시는 사람의 인사 이동이나 진급 등에 대한 말도 나오게 된다. 이 같은 인사에 관한 정보나 풍문이 하마평이다. 조선은 태종 13년(1413년)에 하마비가 처음 궁궐과 종묘에 세워졌고, 중국은 명나라 헌종(1465~1487년) 때에 실시됐다. 조선이나 명나라나 하마비 주변은 간이역과 같은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정조대왕, 하마비에서 탕평을 말하다 하마평에 당사자는 물론 주위에서도 민감한 게 인지상정이다. 당쟁이 심하던 조선후기에는 더 그랬다. 인사 이야기는 발 없는 말이 되어 금세 동네방네 다 퍼졌다. 때로는 인사권자도 모르는 말이 궐내에 퍼지기도 했다. 당연히 인사권자인 임금도 하마평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정조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자 이를 역이용하려는 생각을 한다. 정조가 대신인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어찰첩(御札帖)이 있다. 그중 1797년 4월 11일 편지의 구절을 보자. 근거 없는 하마평에 대한 정조의 생각이 담겨 있다. “요사이 벽파(僻派)가 (인사에서) 탈락한다는 소문이 자못 성행한다고 하오. 그렇다면 그 이해득실은 어떠하겠소? 지금처럼 벽파의 무리가 ‘뒤죽박죽’이 되었을 때에는 종종 이처럼 근거 없는 소문이 있다 해도 무방할 것이오. 이해할 수 있겠소?” 심환지는 벽파의 영수다. 정조는 벽파의 리더인 심환지와 함께 시파의 상징인 채제공에게도 편지를 쓴다. 벽파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동조를 한 세력이고, 시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동정을 한 세력이다.

정조는 인간적으로 시파를 가까이 하고 벽파를 멀리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벽파의 거두인 김종수 심환지 등을 재상의 반열에 올리는 등 양 세력을 활용하는 정치를 한다. 이는 인사정책을 통해 탕평정치, 양 세력의 대립을 통한 왕권강화, 결단력 부족 등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정조의 어록을 기록한 일득록을 볼 때 탕평책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일득록은 정조가 대신, 유생 등과 나눈 대화와 전교(傳敎)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정사(政事)편에 ‘인사가 만사’라는 표현이 나온다. 나라를 위해 인재를 양성하는 것보다 앞서는 게 없다고 생각한 정조는 인사를 만사로 여긴 것이다. 난무하는 하마평과 심화되는 정쟁에서 정조는 신하들에게 인사의 공평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사회 각계에서 습관적으로 쓰는 말, ‘인사가 만사다’는 정조의 고뇌에 찬 표현이었다. 정조는 종묘대제를 봉행하기 위해 하마비를 여러 차례 지났다. 그 때마다 경건한 마음으로 ‘인사가 만사다’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글쓴이 이상주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대왕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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