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0호 박현준⁄ 2013.04.01 11:12:56
태조, 정종, 태종, 세종… 세상을 뜬 임금의 혼을 모시는 종묘의 신주(神主)에 쓰여 있는 묘호(廟號·사당 이름)다. 묘호는 돌아가신 임금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올리는 시호다. 임금의 사후 호칭이다. 따라서 임금은 생전에 한 번도 듣지 못한 이름이다. 종묘에는 34위의 군주와 1위의 황태자, 47위의 왕비 신주가 모셔져 있다. 의민황태자를 제외한 조선을 실제로 다스린 25국왕과 추존된 9임금의 묘호에는 조나 종이 붙어있다. ‘태(太)’·’세(世)’·’정(定)’ 등 앞의 글자는 시호이고, 뒤의 글자인 조나 종은 왕의 업적에 따라 정한 글자다. 태조의 증조인 익조의 신주를 모신 방인 황증조실의 책호문(시호를 올리는 취지와 뜻을 기리는 글)에는 ‘공(功)이 있으면 조(祖)요, 덕(德)이 있으면 종(宗)’으로 표현했다. 송나라의 고승이 편찬한 사물기원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조종의 묘호는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제후국의 군주는 왕으로 칭해야 했다. 명나라에 사대를 했던 조선은 원칙적으로 조종의 묘호를 쓸 수 없다. 가령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태조’가 아닌 ‘강헌왕’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은 자주 독립국으로서 자존심 차원에서 ‘태조’와 같은 황제가 쓰는 묘호를 사용했다. 조선은 개국과 함께 태조의 4대조를 추존할 때 목왕 익왕 도왕 환왕 등 왕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태종 11년 왕을 조로 고쳐 올림으로써 목조, 익조, 도조, 환조가 됐다. 조선의 국가 이익을 위해 사대를 했지만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에 요동정벌 계획을 논의하는 등 당당하게 맞서는 현실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태조, 정종, 태정, 세종…신주의 묘호에 얽힌 사연 세종도 이 문제를 분명히 했다. 고려사 편찬 때 ‘고려시대의 묘호제도를 그대로 살려 쓸 것’을 지시했다. “고려의 군주를 칭한 종을 고쳐서 왕으로 일컬은 것은 사실에 좇아 기록하라. 묘호와 시호도 그 사실을 인멸하지 말라”고 했다. 고려는 황제국이었다. 나라를 연 태조 왕건은 하늘의 아들인 천자로 불렸고, 광종부터는 황제의 칭호가 사용됐다. 개국 이후 모든 군주는 묘호에 조와 종을 사용했다. 그러나 세계 제국을 이룬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황제의 지위는 왕으로 격하됐다. 충렬왕 때부터는 조나 종이 아닌 왕으로 호칭됐다. 고려 후기의 신진 사대부들은 성리학적 사관을 갖고 있었다. 유학을 사회개혁의 원동력으로 삼았던 이들은 성리학 질서인 직분과 분수를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오륜을 바탕으로 천자와 제후, 임금과 신하 관계를 정의했다. 이들의 시각에서는 고려가 조와 종의 묘호를 쓴 것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른 것이었다. 이에 유학자인 이제현 이색 정도전 등은 주자학적 사관에 입각해 고려시대 ‘종’으로 일컬어지던 고려 임금에 대해 ‘왕’으로 고쳐 쓴 바 있다. 이 같은 문제를 세종이 지적한 것이다. 세종의 명을 받은 윤회는 고려사 서문에서 “원종 이전의 실록을 가지고 새 역사와 비교하여 종을 고쳐서 왕이라고 했다. 이제 다시 옛 문구를 찾아 적는다”고 했다. 또 범례에는 “무릇 종을 칭하고 폐하, 태후, 태자, 절일, 제, 조를 칭하는 따위는 지나친 것이지만 당시 호칭을 그대로 써 사실을 남긴다”고 했다.
조선은 명나라의 눈치를 보기에 앞서 당당하게 자주국으로 행동하고, 내심 황제국의 정신을 이어간 것이다. 이에 대해 명나라는 애써 모른 체 했다. 조선이 밝히지 않았지만 수차례 사신이 오가면서 내용을 알고 있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 온 명나라 관료 정응태의 농간으로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한 적이 있다. 그러나 명나라는 문제를 삼지 않았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형식적인 사대 외에는 완전한 자주국임을 명나라가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태종과 세종 때는 명나라가 조선을 만만하게 보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워하는 모습도 보인다. 태종은 3년인 1403년 4월10일 태평관에서 명나라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어주다 환관 황엄 등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자, 잔치를 재촉해 파해버린다. 다음 날 사신 일행이 임금에게 고한다. “전에 사신으로 왔던 온전이 (명나라)황제에게 호소하기를, ‘조선 국왕은 뜻이 높아 굽신거리지 않고, 신을 거만스레 대접했습니다. 이는 폐하를 향하는 정성이 박하기 때문입니다.” 하니, 황제는 도리어 온전을 나무랐습니다. “네가 내신(內臣)으로서 마땅히 어사(御史)의 위에 앉아야 할 것인데, 도리어 그 아래에 앉아서 마침내 그와 같이 만들었으니, 국왕의 허물 뿐 아니라, 네가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사대관계에서 명나라 사신은 명나라 황제를 대신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제후국에서는 황제를 대하 듯 정성을 다한다. 그러나 태종은 명나라 사신을 홀대했고, 사신은 명나라에 돌아가 ‘이는 조선 국왕이 자신이 아닌 명나라 황제를 무시한 것’이라는 논리를 편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 황제는 문제를 축소, 조용히 덮기 위해 사신을 나무란 것이다. 이는 조선과 명나라가 사실상 대등한 나라임을 설명해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 영락제 13명 비 가운데 조선 출신 여비 있어 세종 때는 명나라가 조선을 두려워하는 모습도 보인다. 세종 5년인 1424년 명나라 영락제는 몽골 원정길에 사망한다. 그가 죽자 비 13명이 순장된다. 여기에는 한확의 누이로 조선 출신인 여비(麗妃)도 있었다. 영락제를 이은 인종은 여비에게 마지막 소원을 물었고, 여비는 유모인 김흑을 조선으로 보내라고 말했다. 인종은 황제로서 약속을 했다. 그 장면을 세종실록에서 보자. ‘영락제가 죽자 궁인(宮人)으로 순장(殉葬)된 자가 30여 인이었다.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였다. 식사가 끝난 다음 함께 마루에 끌어 올리니, 곡성이 전각을 진동시켰다. 마루 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했다.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를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 버리니, 모두 목이 메어져 죽게 되었다.’ 한 씨는 죽을 때 유모인 김흑(金黑)에게 말했다. “낭(娘)아, 나는 간다. 낭아, 나는 간다.”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환관이 걸상을 빼 나머지 말은 하지 못했다. 궁녀들이 죽음을 맞으러 마루에 올라가기 직전에 황제인 인종(仁宗)이 들어와 고별을 고하였다. 이에 한씨가 울면서 인종에게 마지막 부탁을 했다. “제 어머니가 노령이니 김흑을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시옵서.” 이에 인종은 분명히 허락을 하고 지시를 했다. 하지만 주위에서 반대를 했다. “영락제 후궁들의 사건은 옛날에도 없던 큰일입니다. 조선국은 임금이 어질어서 중국 다음갈 만합니다. 또 요하의 동쪽이 옛날에 조선에 속했습니다. 조선이 만일 요동을 얻는다면 명나라도 항거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난을 그들에게 알릴 수 없는 것입니다.” 어진 임금은 현 왕인 세종과 전 왕인 태종을 일컫는다. 명나라는 조선의 임금인 태종과 세종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만주지역이 조선의 옛 땅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이 명나라의 문제점을 알면 요동을 차지하려고 할 것임을 경계한 것이다 명나라는 조선의 실체를 인정하기에 묘호 등 첨예한 문제는 거론하지 않고 형식적인 사대로 만족했던 셈이다. 글쓴이 이상주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대왕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http://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세종의 공부’,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 이상주 역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