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3호 박현준⁄ 2013.04.22 10:54:04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면 문득 강이나 바다가 보이는 산길을 걷고 싶어진다. 서울 가까이 진달래 꽃망울이 나그네를 반기면서 바다가 보이는 산길로는 김포(金浦)와 강화(江華)가 제격이다. 김포에는 언제부턴가 내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지명이 있다. 통진(通津). 예전 어느 땐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다가 이제는 이름도 생소해진 그런 고장 이름을 대하면 마음속에서 바람이 인다. 강화를 다니면서 아마도 수십 번 넘게 지나다녔으면서도 한 번도 그 속살을 들여다보지 않은 곳, 어찌 보면 미안하기도 하다. 통진은 지금의 김포 월곶면 일대를 일컫던 지명으로 통진현으로 독립된 지역이었다. 한 때는 통진도호부(通津都護府)로 승격되기도 했으나 이제는 김포시의 한적한 면(面)으로 자리잡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통진현(通津縣) 불우(佛宇)조에 문수사(文殊寺)와 흥룡사(興龍寺)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문수사 흥룡사는 함께 비아산에 있다(俱在比兒山).” 비아산? 이제는 잊혀진 이름이다. 다행히 현존하는 문수사가 있는 산 이름이나,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 전등사와 그 말사를 기록한 책)에 있는 문수사지(文殊寺誌)에도 ‘통진 비아산 문수사’라는 기록으로 보아 비아산은 지금의 김포 월곶면 문수산 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비아산(文殊山)은 통진현 읍치 북쪽 6리에 있는 진산이었다(在縣北六里鎭山). 그 진산인 문수산에는 여지승람이 편찬된 중종 25년간(1530년)까지는 적어도 문수사와 흥룡사가 현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범우고(梵宇攷)가 발행된 정조 23년(1799년)에는 흥룡사가 이미 사라졌다. 그 후 흥룡사는 영영 중건되지 못하고 산죽(山竹)에 묻혔고 연구자(硏究者)가 아니면 이름도 절터도 모두 잊혀진 그런 곳이 됐다. 비아산은 바로 문수사와 흥룡사가 있었던 문수산 오늘은 문수산성, 문수사, 흥룡사 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봄바람에 발걸음은 가볍고 마음은 살짝 흥분된다. 언제나 잊혀진 절터를 찾아가는 길은 총각 때 미팅 파트너를 중년에 만나러 가는 듯 설렌다. 버스가 48번 국도의 뒷길(옛 강화대로)를 경유하여 성동검문소에 내려 준다. 이곳으로 오는 버스는 모두 강화행으로 인천터미날에서 70번, 일산 대화역에서 80번, 영등포, 당산역에서 88번, 부평역에서 90번, 일산 전지역에서 96번, 신촌에서 3000번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강화대교를 건너기 직전 정류장이 성동검문소인데 3000번 버스만 제외하면 모두 성동검문소에서 내릴 수 있다. 3000번 버스는 좌석으로 앞 정류장 내포에서 내려 1km를 걸어야 한다. 검문소 중앙차로에서 내려 길을 건너면 문수산 등산로 이정표 뒤로 산길이 나타나는데 이 코스로 하산하기로 하고 앞 쪽 효심원 간판을 단 업소 쪽으로 가자. 그러면 앞쪽 언덕 위로 반듯하게 자리잡은 성문이 보인다. 문수산성 남문이다. 이제는 사람출입은 없고 모양으로서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늘 걷는 길은 남문을 둘러보고 내려와 성동리 방향으로 나아가는 78번 지방도로다. 길 뒤로는 강화대교가 염하(鹽河: 김포와 강화 사이 강처럼 보이는 해협)를 건너 김포와 강화를 잇고 길 입구에는 평화누리길 알림판이 대명항 16.6km, 애기봉 8km임을 알리고 있다. 왼쪽으로는 염하를 끼고 오른쪽으로는 문수산을 낀 78번 도로는 비록 아스팔트길이지만 차량통행도 뜸한 시골길 도로이다. 이제는 흔적도 없으나 100년 전까지만 해도 문수산성 성벽이 바닷가로 이어지고 2개의 홍예문, 2개의 암문, 2개의 수문이 있었는데 길을 걸으며 그 남은 흔적을 살펴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 도로를 따라 북으로 1km 남짓 걸으면 순대국집 앞에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안내판이 서 있다. 경기도 기념물 108호라는 설명과 함께 갑곶나루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있다. 갑곶나루는 김포 성동리와 강화 갑곶리를 잇는 나루로서 세종때 박신(朴信)이란 분이 사재를 털어 나루에 석축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강화와 육지를 잇는 주요 나루였는데 1920년대에 새로운 나루(성동리~용정리)가 생기면서 기능을 잃었다 한다.
조선시대 갑곶나루에 얽힌 희로애락 이 나루는 조선시대 모든 이들이 건너다니던 강화대로 상의 나루였다. 정묘호란에 인조가 건넜고, 병자호란에 봉림대군과 왕실의 비빈들이 건넜으며 강화도령 철종도 이 나루를 건너 조선 25대 왕으로 등극했다. 1866년 병인양요에는 이 나루를 통해 프랑스군이 문수산성을 공격했다. 1866년 초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천주교도들을 처형했는데 이때 프랑스선교사도 12명 중 9명이 처형됐다. 남은 3명 중, 리델(Ridel)이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Roze, P.G, 魯勢)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고 원정을 촉구했다. 이에 로즈가 대함대를 이끌고 강화도와 문수산성을 침탈한 사건이 병인양요이다. 이 날의 일을 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고종3년 1866년 9/19일) “작은 서양 배 4척이 조수를 타고 곧장 산성 남문으로 향하였다 하기에 급히 군사 1초(哨)를 보내어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습니다. 군사가 중도에 채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지홍관과 한성근이 헝크러진 머리에 짧은 옷을 입고 앞뒤로 도착하였는데, 이양선(異樣船) 2척이 앞에서 정박하려고 할 때 한성근이 홀로 앞장서서 크게 고함을 치면서 먼저 총을 쏘아 한 번에 몇 발을 쏘니 그 소리가 나자마자 적들 중에 배에 쓰러진 자가 몇 명 되었습니다. 50명의 총수(銃手)가 그 뒤를 이어 곧바로 일제히 총을 쏘자 2척의 배에 있던 적들이 태반이나 쓰러졌는데 그 수가 대략 5, 60명 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덧 뒤따라오던 2척의 배에 타고 있던 적들이 한꺼번에 육지에 올랐는데, 그 수가 무려 100명이나 되었습니다. 미처 탄약을 장전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저놈들의 탄알에 맞아 죽은 사람이 3인(人)이고, 어깨나 팔에 부상당한 사람이 또한 2인이었습니다. 워낙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몸을 돌려 달아나 돌아왔는데, 오면서 돌아보니 적들이 산성의 남문에 불을 지르고 곧장 도로 건너갔습니다.”
강화도 침략한 프랑스 외규장각의궤 약탈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침탈했다. 2년 전 145년 만에 돌아온 외규장각의궤도 이 때 강화에서 프랑스군에 약탈당했던 것이다. 남북이 갈린 이후 민간인은 이 나루 석축로에 다가갈 수 없다. 순대국집 뒤로 돌아가면 철펜스 너머로 석축로가 보인다. 군사지역이라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이미 지자체나 문화재 관련기관에서 촬영한 석축로 사진이 공개되어 있으니 참고하시라. 안내판에는 ‘갑곶’이란 지명에 대한 설명을 이야기조로 풀어 놓고 있다. 고려 고종이 몽고침략을 피해 강화로 올 때 거리가 좁고 수심이 낮아 군사들이 갑옷을 쌓아 놓고 건널 수 있어서 ‘갑곶’이 되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일까? 일찍이 삼국사기지리지(三國史記地理志)를 연구한 분들은 강화의 옛 이름인 혈구(穴口)와 갑비고차(甲比古次)에 대한 연구결과를 내 놓았다. 옛 강화의 순수한 이름은 ‘굼곳’이라 한다. ‘굼’은 구멍이며 ‘곳’은 산악이 물이나 평원에 돌출한 장소인데 ‘굼곳’을 뜻을 살려 한자로 기록하면 ‘穴口’가 되며 소리를 빌려 기록하면 ‘굼’은 甲比, ‘곳’은 古次(古自)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갑곶나루는 岬串나루이며 옛 표현으로 하면, 갑비고차나루‘가 된다. 즉 ‘강화나루’라는 말이다. 다시 78번 도로를 따라 500여m 나아가면 우측으로 문수사대자원과 문수산산림욕장 표지판이 나온다. 그 안쪽은 주차장이 있고 문수사가 산 중턱에 위치한 관계로 문수사대자원이라 부르는 아랫절이 있으며 아울러 소풍객에게 편안한 장소를 제공하는 삼림욕장이 있다. 이 곳에서 문수산 정상을 오르는 코스는 문수산 전망대를 거쳐 채 1km가 되지 않는다. 짧게 정상에 오르려는 이들은 이 길을 이용하는 게 좋다. 계속 나아가면 성동저수지표지를 지나고 문수골을 알리는 돌 안내판을 지나 문수산성 북문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문수산성 성벽 일주를 하는 이들이 오르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오르는 길은 조선 고유의 소나무가 많아 솔 내음도 좋고 시야도 트여 추천할 만한 길이다. 그러나 오늘은 1~ 2km 더 진행해 동막골(성동2리)에서 출발하려 한다. 노인회관과 보건진료소가 있는 동막골 마을을 지나 계곡길을 오른다. 등산로는 잘 나 있는데 오르는 이가 없어 한가하다.
1km 오르면 주능선에 닿는다. 이 능선이 한남정맥 마지막 구간길이다. 문수산 주능선 오르는 길 중 가장 짧고 편한 길이다. 능선에는 이정표(119표지 1.3)가 있는데 북쪽으로는 학생야영장 2km, 남쪽으로는 (문수산)정상 2.2km를 알리고 있다. 동쪽으로는 용강리 배니골인데 철조망으로 길을 막아 놓았다. 군사보호지역이기 때문이리라. 남쪽으로 향하는 주능선길은 쾌적하다. 300m쯤 남으로 내려오면 작은 봉우리 쉼터가 있다. 이정표(119표지 1.4)가 서 있다. 북으로 한강과 임진강 그리고 이 두 강이 만나 강화로 돌아드는 바다처럼 넓은 조강(祖江)이 내려다보인다. 온조와 비류가 건넜을 것이며 고구려군도 넘었을 조강, 6.25 때는 야음을 틈타 인민군이 넘었고 고려 이규보(李奎報)는 800년전 좌천을 당했을 때 개성을 떠나 계양(桂楊, 지금의 인천시 계양구 부평구)부사로 취임하면서 이 강을 건넜다.
그 때 이규보는 조강부(祖江賦)를 썼다. 活活江流(활활강류) 넓디넓은 강물이 濁如涇水(탁여경수) 경수처럼 흐린데 漆色而泓(칠색이홍) 시커먼 빛 굼실굼실 쌍難俯視(쌍난부시) 굽어보기 무서워라 .................................................... 予旣被謫(여기피적) 이 몸은 지금 귀양 가는 길 遭此嶮流(조차험류) 이 험한 강물을 만났구나 .................................................... 業已離於上都兮(업이리어상도혜) 이미 상도(개성)를 떠나온 몸 欣桂陽之伊邇(흔계양지이이) 계양이 가까우니 반가와라 于以泊舟(우이박주) 어기여차 배 저어라. (양주동 역) 역경을 희망으로 마무리하는 이규보의 속마음이 느껴진다. 우리 세대에 저 강이 희망으로 마무리됐으면 좋겠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용못 능선 길을 타고 계속 남쪽으로 이동한다. 1km 조금 지나면 북문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이정표(119표지 1.5)는 정상이 0.8km 남았음을 알리고 있다. 이제부터는 성벽길이다. 문수산성은 숙종 8년(1882년) 8월 강화유수 조사석(趙師錫)이 강화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기지로서 축성을 주청한 이래 12년을 갑론을박 하다가 드디어 숙종 20년(1694년) 축성을 마쳤다. 그 후 120년 가까이 지나자 퇴락한 곳이 곳곳 발생하니 순조 12년(1812년) 대대적인 중수를 거쳤다. 이렇게 해서 병인양요 때에는 산성으로서 가치를 발휘했던 것이다.
잠시 후 퇴락한 암문이 나타난다. 이어지는 성벽은 무너져 성돌들이 나뒹굴고 있다. 암문 너머로는 가파른 골짜기가 내려다보인다. 이제는 다니는 이 없는 등산로의 흔적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 계곡으로 내려가 본다. 200여m 내려갔을까 암문에서 쓸려 내려간 반듯한 초석 하나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다. 그 아래 좌측 언덕에 산죽이 우거진 평탄지가 펼쳐지는데 눈여겨보면 기와편과 도자기편들이 보인다. 절터다. 다시 계곡을 타고 300여m 내려간다. 무너져 내린 사면에 기와편이 뒹굴고 산죽이 우거졌다. 그 아래로는 완연한 평탄지에 또 하나의 절터가 펼쳐진다. 이 골자기를 배니골이라 부른다. 이 세 개의 절터는 여지승람에 기록된 흥룡사(興龍寺) 옛터이리라. 사역은 거리를 두고 본절과 관련된 암자가 아니었을까. 계곡은 다니는 인적이 없어 발자취도 희미한데 걷는 일에 자신이 있는 이는 10여 분 더 내려가 용강리 마을까지 다녀 올 수도 있다.
배니골 계곡 끝에는 사방땜이 있고 그 아래로는 수 천 평에 달하는 평탄지를 조성해 놓았다. 그 평탄지를 눈여겨보면 곳곳에 기와편과 자기, 도기편이 눈에 띈다. 아마 이 곳도 절터일 것이다. 입으로 전해지기에 용호사(龍虎寺)란 절이 있었다 하니 그 절터가 이곳인지 모르겠다. 용강리마을은 비무장지대에 속하는데 매화마름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사철 마르지 않는 못 용못(龍淵)도 있어 최근에는 환경체험마을로 이름이 알려지고 있다. 매화마름과 미르(龍의 우리말)을 살려 ‘매화미르마을’이라 부른다. 그 옛날 용강리 북쪽 조강가에 있던 포구가 강녕포(康寧浦, 江寧浦)였다. 삼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배들과 북녘에서 김포로 오는 배들이 정박하던 큰 포구였으니 얼마나 경기가 좋았겠는가? 이제는 적막 속에 묻힌 마을이 됐다. 이제 캠프장과 환경체험 사업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다. 다시 암문으로 돌아온다. 전망대를 지나 문수산 정상으로 간다. 산성의 장대(將臺)가 있어 유사시에 지휘소였는데 그 동안 출입이 불가하다가 개방을 위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원래는 2013년부터 개방한다 했는데 늦어지는가 보다. 이제 중봉 쉼터 지나 400m 아래 홍예문 4거리에 닿는다. 이정표가 문수사 0.5km를 알리고 있다.
문수사(文殊寺). 짐작컨대 비아산이란 이름이 문수산이 된 것은 문수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등본말사지 문수사지에는 대웅전에 목제(木製) 아미타불, 석제(石製) 약사여래, 토제(土製) 나반존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전통불상은 남아 있지 않고 비로전(毘盧殿)에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다. 절 마당에는 아주 고졸한 3층 석탑이 하나 서 있어 그나마 고찰임을 짐작케 한다. 절 경내보다는 뒤편 능선으로 이 절을 기억나게 하는 두 분의 발자취를 찾아가 보련다. 한 분은 조선 중기의 우둑한 선맥(禪脈) 풍담대사(楓潭大師) 의심(義諶)이며, 또 한분은 우리 시대를 사신 벽응당(碧應堂) 장벽응 대종사이다. 문수사와 풍담대사 의심, 장벽응 대종사 풍담대사는 이곳 통진 출신으로 서산대사 휴정의 법통을 이어 받은 편양 언기(鞭羊 彦機)의 수제자로 다시 그 법통을 이어받은 선맥이었다. 서산대사에게는 4명의 수제자가 있었는데 법통은 사명대사 유정이 이어 받은 게 아니라 편양 언기대사가 이었다 한다. 그 법통을 다시 아어 받은 풍담대사는 대흥사 1대 대종사로 대흥사 13대종사의 문을 연 분이다. 이 분이 한 때 문수사에서 제자를 기른 인연으로 이 분의 승탑(僧塔,浮屠)과 비가 문수사 뒤 산줄기에 모셔져 있다. 재질은 문수산 퇴적암이 아니라 화강암이니 다른 곳의 돌을 떠다 세운 것이다. 또 한 분 장벽응 스님은 박송암 스님과 함께 사라져가는 영산재 인간문화재 50호로 불교음악 범패(梵唄)를 지키고 전승시킨 분이다. 이 분도 문수사에서 주석하였기에 풍담대사 부도 곁에 부도를 모셨다.
봄볕 속에 두 부도가 단아하다. 다시 성벽 길로 돌아와 하산 길로 접어든다. 성벽에는 축성 당시 책임구간을 표시한 글자들이 남아 있다. 二牌, 三牌... 공사 실명제는 조선시대가 우리 시대보다 한 길 위인 것 같다. 성벽 따라 내려오다가 갈라지는 능선 길을 잡으니 잠시 후 출발지점으로 돌아온다. 약 4시간이 소요된 산행길이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70번 버스(인천)/ 80번 버스(일산 대화) / 88번 버스(영등포 당산동) 90번 버스(부평역) / 96번 버스(일산) / 3000번 버스 (신촌) 걷기 코스 남문 ~ 갑곶나루 ~ 동막골(성동2리) ~ 주능선(한남정맥길) ~ 암문 ~ 흥룡사터 ~ 회귀 ~ 문수산 정상 ~ 홍예문 ~ 문수사/풍담대사부도 ~ 회귀 ~ 성길 따라 ~ 성동검문소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