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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 종묘스토리 ⑫ 조선 개국 설화]손자의 조선 개국 꿈 꾼 도조대왕

태조실록에 바탕, 완산실록·동국세기 등에 도조의 용(龍) 일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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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28호 박현준⁄ 2013.05.27 11:40:54

태정태세문단세…. 조선 임금 순서의 첫 글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오지 않는 임금이 있다. 목조 익조 도조 환조 원종 익종 문조 등이다. 실제 임금을 못했으나 왕으로 추존된 군주들이다. 종묘에는 35군주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이중 25임금은 군왕의 지위에 있었으나 의민황태자와 9명의 신위는 군주에 자리에 앉지 못했다. 사후 추존된 분들이다. 그러나 종묘에는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은 모셔지지 않았다. 도조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할아버지다. 태조가 3년(1394년)에 4대조를 추존할 때 도왕(渡王)이라 했다가 2년 후 도조로 격상됐다. 종묘에 올려진 공식 묘호(廟號, 사당 이름)는 도조공의성도대왕(度祖恭毅聖度大王)이고, 첫째 비는 경순왕후 박씨다. 의주와 함흥에서 1천 호를 다스리던 도조. 그에게는 조선 개국을 암시하는 설화가 연계돼 있다. 필자는 2011년 종묘대제 때 도조실에서 대축관으로 참여했다. 축문을 읽으면서 그 설화를 상상했다. 도조의 설화는 태조실록이 바탕이 된다. 이 글을 시작으로 완산실록, 동국세기, 충효전 등에 도조의 용(龍) 일화가 기록돼 있다. 용은 임금의 다른 표현이다. 도조의 설화에 용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왕의 기운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북해로 가던 일본 사신도 도조를 용에 비유한다.

도조가 살던 곳은 여진인이 이웃한 곳이다. 따라서 도조의 꿈은 고려인은 물론이고 여진인 그리고 일본인 등 당시 동아시아인이 조선 건국을 천명으로 받아들인다는 복선이 깔려 있다. 다음의 두 일화를 보자. 도조대왕이 아버지 익조대왕의 벼슬인 천호를 이어받아 경흥의 망덕산 아래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남쪽 못에 사는 용인데, 나그네용이 연못으로 와서 내 집을 빼앗으려 하오. 나는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소. 내가 알기로 그대는 활 솜씨가 뛰어나오. 원컨대 한 대의 화살로써 나의 강적을 물리쳐주기 바라오. 이 일이 이루어지면 그 공덕을 잊지 않고 후손에게 갚을 것이오”라고 했다. 이에 도조는 승낙하고 이튿날 활통을 차고 경흥부 남쪽 산기슭으로 갔다. 그런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며 운무가 자욱한 가운데 동북쪽으로부터 흑룡이 달려와 백룡과 어우러져 싸웠다. 긴 몸을 꿈틀대며 서로 엉키어 물어뜯고 싸우므로 그 번들거리는 비늘이 번갯불같이 눈부셨다. 이때 도조가 활을 쏘려 하나 주객을 분간할 수가 없어 끝내 활을 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날 밤 꿈에 다시 그 노인이 나타났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느냐’고 책망하는 노인에게 도조는 “어느 편이 나그네용인지를 알 수가 없어 못 쏘았습니다”라고 했다. 노인이 말하기를 “백룡은 나이고 흑룡은 그놈이니 내일은 실수하지 마시오”라고 했다. 이튿날 아침 도조가 남산 기슭으로 올라가 보니 두 마리 용이 어우러져 한바탕 싸우고 있었다. 곧 활을 당겨 흑룡의 허리를 쏘았다. 흑룡은 피투성이가 돼 달아나고 연못은 핏물로 빨개졌다. 그래서 그 연못을 적지(赤池)라고 하고 또 사룡연(射龍淵)이라고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흑룡이 화살을 맞고 바다로 나갈 때 강가 절벽을 아흔아홉 번 쳐서 붉은 절벽이 아흔아홉 구비로 십 리나 된다 한다. 그 뒤 백룡이 꿈에 나타나 도조에게 감사드리면서 “그대의 경사가 바야흐로 자손에게 있을 것이오”라고 했다. 정조대왕은 이 적지에 기적비명(紀蹟碑銘)을 세웠다.

명궁 DNA 지닌 정조의 도조에 대한 비명 도조대왕이 젊은 날에 경산으로 길을 가던 중이었다. 도조는 마침 두만강의 녹둔도로 들어가던 일본 사신과 마주쳤다. 사신은 수레에서 내려 도조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다. 사신은 “용의 자손이 어찌 이런 곳을 다 오셨습니까? 나으리는 비록 그때를 보지 못하시지만 반드시 왕이 될 손자를 낳으실 것입니다. 앞으로 요사스러운 중과 요망한 여자가 궁중에서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했다. 도조는 “저처럼 어렵고 힘든 사람이 그런 끝없는 복을 어찌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겸손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일본 사신은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습니까”라고 한 뒤 자신의 활과 화살을 도조에게 올렸다. 도조대왕과 용의 이야기에 대해 정조는 인간적인 해석을 했다. 정조는 11년(1787년) 11월에 세운 ‘도조대왕 경흥부적지 기적비문’에 다음처럼 적었다.

전해오는 말대로 용에게 덕을 베풀어 그의 보답으로 자손이 경사를 얻은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오직 왕실의 선대가 어짊과 아름다운 덕을 실천하고도 자랑하지 않으셨기에 천명을 받아 누리고 모든 신령의 도움과 복된 도움과 만백성의 따르는 바가 됐다. 이야기는 선인들이 상서로운 것으로 삼았을 뿐이지 어떻게 용이 사람에게 경사를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옛날에는 상서로운 일은 반드시 기록했다. 찬란한 구름이나 새 같은 무심한 것도 벼슬의 명칭으로 적어놓았거늘 하물며 영물인 용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이에 적지의 물가에 비를 세워 그 사실을 기록하고 비명을 새긴다. 정조는 활솜씨가 무척 뛰어났다. 거의 백발백중이었다. 신하들은 임금에게 경하를 드리곤 했다. 이 때 임금은 “이는 우리 집안 내력이다”고 답했다. 태조, 태종, 세조의 신궁 유전자를 받았다는 뜻이다. 사실 조선 왕가의 활솜씨는 정조가 자랑할 만도 했다. 명궁의 DNA를 지닌 정조는 도조에 대한 옛이야기를 바탕으로 군주로서의 바람이 섞인 비명을 적었다. 「내가 들으니 용의 공덕은 성인이 있으면 나타나고 성인이 없으면 숨는데 푸른 기운 속에 놀고 하늘 밖 들에 꿈틀거린다. 그렇기에 용은 나타날 때에 나타났음이로다. 일찍이 조용히 은하수 속에 숨어 있던 것을 하늘이 성인에게 영감을 나타내게 함으로써 못을 빌려서 그 의지하는 데를 나타내게 한 것이던가. 지금에 와서 이 신령스러운 글을 편하게 함도 우리 선후의 어지심이다. 아직도 능히 구름과 비 이루어 빈 땅에 사는 우리 백성을 길이 힘입게 하련가.」 글쓴이 이상주 ‘세종의 공부’ 저자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왕자 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 이상주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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