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2호 이진우⁄ 2013.06.24 14:10:23
“회장님 또는 선생님 따위로 불리기보다 지금도 그냥 ‘선수’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이 더 좋다” 홍 선수와 인터뷰는 정말로 예상을 벗어났다. 과거 4전5기 기적의 승부를 연출한 이래 35년이 지난 6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자에게 “절대 다른 호칭으로 부르지 말고 선수라고 계속 불러주기 바란다”며 웃어보였다. 그래서 기자 역시 그를 인터뷰하는 내내 “(홍) 선수님!”이라고 부르면서, 여전히 링에서처럼 카리스마를 뽐내며 프로정신과 도전정신으로 똘똘 뭉쳐있는 그의 열정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홍 선수는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는 선물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과거나 미래에 연연해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한번만 더 뛰어 보겠다는 용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서 “이것은 리더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기도 하다. 과거의 영광이나 실패를 돌아보기는 하되 그것에 얽매여서는 결코 안 된다. 또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지나친 고민도 불필요한 것이다. 그저 현재 상황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지금도 선수 시절에 갖고 있던 바로 그 열정을 여전히 잃지 않고 살아간다. 과거 4전5기의 신화를 만들어 냈을 때 2회에서만 카라스키야의 무지막지한 주먹을 맞고 네 차례나 다운이 됐지만, 마지막으로 1회전만 더 뛰어보자는 심정으로 포기하지 않고 3회에 나가서 최선을 다한 결과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홍 선수의 원래 복싱스타일은 경쾌한 풋워크를 이용하는 아웃복싱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런데 홍 선수는 카라스키야와의 승부에서는 처음부터 도전적인 인파이팅 전략을 구사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당시 카라스키야는 11전 11KO로 전승가도를 달리고 있었으며, 그것도 상대에게 5회(당시 WBA는 15회전 경기였음) 이상을 허락한 적이 없던 강펀치였다. 따라서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홍 선수가 자신의 장점인 아웃복싱을 최대한 활용해야만 카라스키야와 겨우 대적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기존 방식 뒤엎어 상대를 당혹시키다 홍 선수는 이에 대해 “카라스키야나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내가 아웃복서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 내가 적극성을 보이면서 카라스키야에게 달려들어 코피까지 터뜨려 놓았으니 모두들 놀라워했다. 1회전부터 그 효과는 충분히 발휘되고 있었다. 그간의 방식을 바꾼 것만으로도 상대를 흔들어 놓을 수 있었고, 상대가 당혹해하는 가운데 나는 카운터를 노릴 수도 있었다”면서 “이를 경영환경에 접목시켜 보면 기존의 방식이 아무리 훌륭한 방식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사용해 오던 시스템을 뒤집어엎고 변화와 혁신을 이루어 내면 미처 알지 못했던 단점과 맹점까지도 찾아낼 수가 있다. 그 가운데에서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과 수단을 발굴할 수도 있는 것이다”고 언급했다. 홍 선수는 그 당시 파나마에 처음 방문했다. 파나마는 로베르토 두란을 비롯한 3명의 챔피언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카라스키야까지 무려 4명의 챔피언을 이미 보유한 듯한 분위기였다. 그곳의 모든 사람들은 경기장에서든, 기자회견장에서든 홍 선수를 무시하는 표정이 역력했다고 한다. 총기 소유가 자유로운 파나마 인들은 실내경기장 안에서 총을 마구 쏘아대며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홍 선수는 전혀 기죽지 않은 채 파나마 한국대사관에서 구해 온 양반 삿갓을 쓰고 링 위에 올랐다. 1회전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렸다. 동물들은 일반적으로 기 싸움으로 승패를 결정짓는다. 사람도 기 싸움으로 어느 정도 승패가 가늠될 때가 있다. 일단 카라스키야가 어느 정도인지 서로 주먹을 맞교환 했다. 100퍼센트의 KO율치곤 큰 느낌을 주는 펀치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홍 선수가 카라스키야의 선제타를 맞아주지 않고 있었으며, 오히려 투에서 원으로 이어지는 연타를 적중시키며 상대를 당혹시키고 있었다. 2회전에서 어느 한 순간 카라스키야의 레프트가 나오는 것이 보이자, 홍 선수는 라이트훅으로 크로스 카운터를 날렸지만 빗나가고 말았다. 곧이어 카라스키야의 전광석화와 같은 라이트어퍼컷과 레프트훅을 호되게 얻어맞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링 바닥이었다. 정신을 추스르고 일어나서 다시 복스가 됐다. 더욱 강하게 나오는 카라스키야의 레프트어퍼컷과 더블 훅을 맞고 두 번째 다운을 당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지만 이내 강한 라이트어퍼컷과 훅으로 세 번째 다운이 됐다. 몽롱한 상태에서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카라스키야의 펀치만큼은 인정해 줘야 했다. 이때 홍 선수가 코너 쪽을 바라보니 조순현 트레이너가 아무 말도 않고 있었지만, ‘수환아, 제발 일어나지 마라. 그까짓 권투 안 하면 그만이지’라고 얘기하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자존심이 상함을 느꼈다. 뭔지 모를 오기가 발동해 다시 일어섰다. 예전 같았으면 포기하고 말았을 일이었다. 홍 선수가 카라스키야를 코너로 밀면서 시간을 벌려고 했지만, 그만 다리가 풀리며 힘이 빠지더니 주저앉고 말았다. 벌써 네 번째 다운이었다. 홍 선수는 당시를 회고하며 “네 차례나 다운 당했을 때 난 제정신이 아니었다. 알폰소 자모라에게 두 번이나 KO로 패한 뒤 한물간 선수라고 치부되던 터에 3년간 절치부심 연습해온 게 억울해서라도 이대로 정신줄 놓고 쓰러질 수 없다는 것만 생각했다”며 “절대 제정신으로는 못 일어나는 그런 차원이었다. 일반적으로 복싱선수가 KO로 질 때는 대략 이런 경우다. 기절해서 의식이 아예 없거나 의식은 있더라도 더 이상 싸울 의욕이 없어 일부러 안 일어서는 거다”라고 말했다.
4전5기의 도전정신이 곧 프로정신 3회전 공이 울리자 파나마 관중들은 이미 승리는 따 논 당상이라는 듯 모두 서서 총을 쏘며 카라스키야를 일방적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조 트레이너가 홍 선수에게 “수환아. 1회전만 더 뛰고 그만두자”고 말했다. 그는 한마디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경기장면을 보니 홍 선수가 카라스키야보다 먼저 뛰어나갔다고 한다. 그는 “말 그대로 장렬하게 전사하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정신이 멀쩡했다. 꼭 이기겠다는 심정은 아니었지만 정신이 깨어 있는 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게 결국 승리의 원동력이었다”고 회상했다. 홍 선수는 레프트훅으로 보디를 공격하며 계속해서 적극적인 공격을 시도했다. 곧바로 카라스키야의 보복공격이 나오자 홍 선수는 왼쪽으로 돌면서 레프트잽을 날렸다. 카라스키야가 레프트를 날리며 다가왔을 때 홍 선수가 날린 라이트 크로스는 빗나갔지만, 노리고 있던 레프트훅이 카라스키야의 관자놀이에 정확하게 적중했다. 홍 선수는 “찬스를 잡았다는 생각에 원 투 스트레이트를 날리며 들어갔다. 계속해서 짧은 라이트어퍼컷으로 턱을 들어 올린 순간, 동공이 풀린 카라스키야의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12년의 링 캐리어와 50여전의 시합 중에서 내 주먹을 맞고 그렇게 눈동자가 풀린 상대를 본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면서 “그러자 카라스키야의 상체가 앞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 복부를 향해 펀치를 날렸고, 이 한방에 그는 회복불능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승자가 됐다”고 말했다. 홍 선수는 이후 21년 만에 카라스키야와 재회를 했다고 한다. 카라스키야는 “KO직전까지 갔던 형이 내 펀치력을 의식해서 3회에는 뒤로 물러설 줄 알았다. 그런데 계속 공격을 해 와서 적잖게 당황했다. 순간적으로 내 주먹이 의심스럽기까지 했다”면서 “나는 모든 경기에서 상대를 초반에 KO로 이겼는데 형이 계속해서 버티니 작전에 혼선이 왔던 것이다. 그게 결정적인 패인이었다”고 전했다. 홍 선수가 복싱에 입문한 것은 19세 때였다. 중학생이었을 때 아버지와 함께 복싱경기를 관람했는데, 한 선수가 얼굴을 얻어맞고 코피를 흘렸다. 이에 홍 선수가 “어! 저 선수 좀 봐. 코피가 터졌는데도 안 우네”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권투선수는 원래 안 우는거야”라고 답했다. 이로 인해 홍 선수는 ‘권투선수가 참 멋있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이때부터 복싱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한다. 홍 선수는 비록 남보다 늦게 복싱을 시작했지만 5년 만인 1974년에 WBA 밴텀급 챔피언인 아놀드 테일러를 상대로 적지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판정승으로 물리치고 첫 번째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후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 청와대에 초청을 받아 금일봉을 하사받았고, 이후 시합에서는 막대한 대전료를 챙기면서 부와 명예를 모두 얻었다. 홍 선수는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또 살다 보면 굴곡이 있게 마련이다. 이후에 알폰소 자모라(당시 18전 18승 18KO)라는 강적을 만나 처음에는 4회에, 두 번째는 12회에 KO로 패했다”면서 “만약 그때 좌절해서 복싱을 포기했었다면 4전5기의 신화는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가장 비참하게 되었을 때 씨앗을 뿌려야 한다. 그리고 열심히 물도 주고 돌봐주면 시간이 지나서 풍성한 열매로 보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비참했던 나라는 바로 독일과 일본이었다. 전쟁에서 패한 후 이 두 나라는 온갖 제재를 당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최악의 빈곤상태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자 경제대국으로 자리 잡았지 않은가. 홍 선수는 이제는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말한다. “진정한 프로정신은 포기하지 않는 거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한번만 더 뛰어보자. 그러면 하늘도 감동해서 당신이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목표 위해 최선의 노력하면 하늘도 감동 홍 선수가 자모라에게 연패한 후에는 한물간 선수로 취급받으면서, 주변에서 이제 그만 은퇴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체급을 올려 다시 세계챔피언에 도전했다. 그리고 그가 재기를 위해 혹독하게 연습을 하던 와중에 WBA의 규정도 바뀌었다. 이전에는 한 라운드에서 세 차례 다운을 당할 경우 자동 KO패로 인정됐다. 하지만 바뀐 규정에 의하면 무제한 다운이 허용된 것이다. 만약 규정이 바뀌지 않았다면 4전5기의 신화는 없었을 것이다. 경기가 2회에 끝났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홍 선수는 에피소드 하나를 보탰다. 처음 세계챔피언이 되었을 때는 청와대에서 고급차를 보내 어머니와 카퍼레이드도 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금일봉을 하사받았었다. 하지만 두 번째 챔피언이 되었을 때는 청와대 초청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정권에 미운털이 박혔기 때문이었다. 홍 선수는 “그 이유는 카라스키야와의 경기가 끝나고 가진 인터뷰에서 첫 마디에 ‘이 모든 영광을 박정희 대통령께...’라고 하는 대신에 후원회장과 팬들에게 그 공을 돌렸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터뷰 내내 박 전 대통령을 언급하지 않았다”면서 “결국 내가 인터뷰에서 가장 고마워했던 후원회장인 장재식 국세청 차장이 내가 귀국하기도 전에 해임됐다고 들었다. 물론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지는 않았을 테고 그 측근들이 알아서 처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장 차장의 아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교수인 장하준씨다. 그래서 복싱선수를 후원하면 복이 온다는 것이다. Boxing, 즉 복이 ing된다는 뜻 아니겠는가”라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 이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