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늘의 뜻과 백성의 마음이다. 민심은 신경 쓰고 살피면, 대책을 세울 수 있다. 그래서 하늘의 뜻이 더 무서웠다. 임금은 하늘의 뜻을 잘 읽어야 했다. 제왕학에서 중요한 것은 천문, 즉 하늘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옛사람들은 성난 하늘의 뜻이 천재지변과 자연재해로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니 별의 움직임, 가뭄 등 자연현상에 임금은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농업국가인 조선에서는 천심이 곧 민심이었다. 농업에 관련된 천문·기상·역법이 발달하고, 천체·시간·기상·토지의 정확한 측정을 위한 각종 기구가 제작된 이유다. 그런데 중종 때의 어느 날, 궁궐에 벼락이 쳤다. 더욱이 옛 임금들의 영혼을 모신 종묘에 벼락이 친 것이다. 군주로서는 위기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중종은 벼락에 혼비백산한다. 계속된 신하들의 건의를 묵삭한 것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중종 8년(1513년) 2월 28일이다. 서울에 뇌성 번개가 일더니 태묘의 소나무 두 그루에 벼락이 떨어졌다. 크게 놀란 임금은 두려움에 백관들을 소집했다. 많은 신료가 소릉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하늘의 징계로 여긴 중종은 3월에 소릉을 복위시켰다. 소릉은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의 능이다. 현덕빈은 문종이 세자 시절에 원손인 단종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사흘 만에 숨졌다. 문종이 등극하자 현덕빈은 현덕왕후로 추숭되고 능은 소릉으로 호칭됐다. 단종은 즉위 2년에 어머니의 산소에 직접 찾아가 제향하기도 한다. 그런데 아들 단종이 시동생인 세조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난 뒤 죽음에 이른다. 또 현덕왕후의 친정 가족들도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해 극형을 당한다. 현덕왕후의 원한은 지하에서도 사무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당시 흉흉했던 소문과 더불어 야사에서 확대, 재생산됐다. 대표적인 것이 세조의 꿈 이야기다.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고 저주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야사와는 달리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1457년 10월 21일 흉거했고, 세조의 아들인 의경세자는 두 달 가까이 앞선 1457년 9월 2일 숨졌다.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글을 좋아했던 의경세자는 병약했다. 세상을 뜨던 해에는 병이 더욱 깊어졌고, 승려들과 대신들이 경회루에서 쾌유를 빌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월산대군과 자을산군(훗날 성종)의 두 아들을 둔 채 스무 살에 숨을 거뒀다. 민간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승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조카가 죽은 뒤 불면의 밤을 보내던 세조는 어느 날 악몽을 꾼다. 현덕왕후 혼령이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네 자식도 죽이겠다”고 절규한 것이다. 잠에서 깬 세조는 스무 살의 아들인 세자의 운명 소식을 듣는다. 분노한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인 소릉을 파헤치게 했다. 능은 폐허가 됐다. 이때 한 승려가 바닷가에서 왕후의 관곽을 발견하고 풀숲에 묻어두었다. 현덕왕후의 원통함은 이자가 지은 음애일기(陰崖日記)에서 엿볼 수 있다. 사신이 석실(石室)을 부수고 관을 끌어내려 하였으나, 무거워서 들어낼 도리가 없었다. 군민(軍民)이 놀라고 괴이쩍어하더니, 글을 지어 제를 지내고서야 관이 나왔다. 사나흘을 노천(露天)에 방치해두었다가 곧 명을 따라 평민의 예로 장사지내고서 물가에 옮겨 묻었다. 능을 파헤치기 며칠 전 밤중에, 부인의 울음소리가 능 안에서 흘러나왔다. “내 집을 부수려 하니, 나는 장차 어디 가서 의탁할꼬.” 그 소리가 마을 백성의 마음을 아프게 흔들었다. 그 후 충과 효, 인륜을 받드는 성리학 사고의 유생들은 현덕왕후의 위호 복위를 거듭 추진했지만 현 임금의 정통성에 관련된 민감한 문제라 실현되지 않고 있었다. 성종, 연산군 때부터 줄기차게 건의된 왕후의 추복(追復)은 중종 때에는 거센 물결이 되었다. 그러나 임금의 입장을 고려한 영의정 유순정 등의 반대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 그런데 종묘에 벼락이 치는 등 불길한 조짐이 보이자 중종은 마침내 60여 년 만에 현덕왕후의 원통함을 달래기에 이른다. 소릉 복위를 결정한 임금은 송일, 김응기를 제조로 삼아 일을 진행하도록 했다. 하지만 능이 이미 흔적도 없어진데다 주민들의 기억도 뚜렷하지 않아 원래의 묏자리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이 과정은 김안로가 지은 용천담적기에 소개돼 있다. 짐작되는 후보지를 깊이 파보았지만 관(棺))이 보이지 않았다. 제조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몰랐다. 이날 밤 감독관이 선잠을 자는데, 꿈에 휘장을 치고 안석에 기댄 왕후가 나타났다. 두 시비의 수행을 받은 왕후는 감독관을 불러 “너희가 수고한다”고 위로했다. 잠에서 깬 감독관은 다음 날 아침 그 장소에서 두어 자 남짓 더 깊이 파니, 홀연 손바닥만 한 옻칠 조각이 삽날에 붙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것은 관의 두꺼운 칠이 떨어져서 올라온 것이다. 그리하여 이장하는 일을 잘 마치게 되었다. 벼락 덕분에 다시 소릉의 주인이 된 현덕왕후. 그 과정에는 또 하나의 괴이함이 있었다. 중종이 소집한 백관 회의에 영의정 유순정이 병으로 참석하지 못한 것이다. 유순정이 없는 회의에서 소릉 복원을 결사적으로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여기에 관한 일화도 민간에서 확대됐다. 용천담적기, 대동야승, 해동야언 등의 야사에 그 내용이 전한다. 기정 권숙달이 승정원에서 숙직하면서 꿈을 꿨다. 현덕왕후의 외손인 해평군 정미수와 영의정 유순정이 서로 다투었다. 영의정이 논리에서 매우 궁색해하였다. 기정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며칠 후 능을 복원하자는 논의가 나왔다. 영의정이 맨 먼저 어렵다고 하였다. 논의를 마치자 갑자기 병이 들었다. 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으나 병이 점점 더하여 드디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병이 깊은 유순정은 아들에게 조정 상황을 물었다. 아들은 소릉의 일로 크게 다툰다고 대답했다. 유순정은 “그 일은 끝내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중종의 대통에 손상을 가하는 일은 막아야 했다. 그가 병이 나지 않고 논의에 참여했으면 끝내 의지를 굽히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영혼이 있으면 어찌 이 일에 통분한 감이 없으리오. 신의 어두운 보응은 이치에 없다고 하지 못할 것이니, 기정의 꿈이 영험하다” 하였다. 이는 진실로 황매하여 반드시 믿는다고 이르지 못할 것이다. 다만 우연한 기회에 서로 감응하는 바가 있는 듯하니, 이 역시 괴이하도다. 글쓴이 이상주 ‘세종의 공부’ 저자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왕자 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 이상주 역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