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역사를 한마디로 말하면 ‘전쟁사’라고 할 수 있다. 인류는 태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쟁을 통해 역사를 만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어느 전쟁에서든 승자와 패자로 나눠질 수밖에 없으며, 역사는 곧 승자의 기록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역사에서 승자로 기록됐다고 해서 모두가 관심의 대상은 아니다. 자신보다 훨씬 약한 적과 싸워 이긴 승자에게 어느 누가 무슨 관심을 기울이겠는가. 예를 들어 총칼로 무장한 미국의 기병대가 무기도 변변치 않았던 인디언들과의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게 대단한 일일까? 또 영국의 막강한 정예군단이 아프리카 원주민 부족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에 대해, 과연 창조적인 전략과 전술을 통한 빛나는 승리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임 소장은 “일반적으로 사관학교에서는 바로 앞선 전쟁사를 집중적으로 가르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6.25전쟁사를 다룬다. 그런데 60여 년 전 전쟁사를 통해 배운 것을 현대전에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전쟁이란 본디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군부지도자들은 이미 앞선 전투에서 나름대로 검증된 전략과 전술을 쓰려고 하지, 아직 검증되지도 않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고 하는 것은 무모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체로 99% 정도가 배운 것을 써먹으려고 노력하는 동안에도 1% 정도는 과거를 연구하면서 배운 지혜를 현대의 변화에 맞게 적용해서 창조적인 전략과 전술로 승화시킨다”면서 “이러한 전략과 전술로 전쟁사에 화려하게 족적을 남긴 이들로 알렉산더, 프리드리히와 롬멜 같은 리더를 꼽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지금으로부터 2300여 년 전, 그리스는 그야말로 문화의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했다. 그런데 역사를 되짚어보면 그리스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그 때 뿐이었던 것 같다. 지금의 그리스는 재정위기로 인해 나라가 파산 직전에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리스는 그 당시 왜 그렇게 융성했을까? 알렉산더의 도전-5만으로 100만 정복 기원전 499~450년에 당시 세계 제국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던 페르시아가 작은 도시국가들의 연합체인 그리스를 침공했다. 그리스는 마라톤 전투,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 등에서 페르시아와 힘겹게 전쟁을 치르고 방어하면서 나라의 명운이 걸린 사상 최대의 위기 상황을 겪게 됐다. 임 소장은 “대개의 사람들은 역경이 다가왔을 때 비로소 변화를 위한 ‘자기파괴’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국가의 생사가 걸린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직면하자,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크세노폰과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나타나 ‘진리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등 근본적인 가치관을 재정립하며 생존을 위한 변화를 모색한다”며 “그리스는 페르시아라는 제국을 만나면서 세계관이 변하게 되고, 전투에서의 전략과 전술, 삶의 습관과 문화까지도 바꾸어야 한다는 인식하에 자기파괴를 통한 총체적인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페르시아도 정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고 강조했다. 그리스 철학자 크세노폰은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 ‘적은 병력이 다수를 상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했다. 당시 페르시아는 병력의 우세를 바탕으로 막강한 궁수들과 창병들의 창던지기를 주요 전술로 활용하며, 상호간에 부담스러운 전투방식인 백병전을 매우 싫어했다. 이에 따라 무거운 갑옷을 입지 않고 경무장한 채 부대단위를 형성했다. 임 소장은 “페르시아가 자랑하던 투창 전술은 병력이 많은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검증된 방식이었다. 이에 그리스가 페르시아와 같은 방식으로 맞선다면 필패할 수밖에 없다. 크세노폰은 비록 검증이 되지는 않았지만 백병전으로 맞선다면 중무장한 보병이 경무장한 보병보다 우세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리스 도시국가 중 하나인 마케도니아의 필립 왕은 페르시아와 싸우기 위해 그간 오랫동안 연구해 왔던 전략과 전술 및 무기체계 등을 다른 국가들이 검증이 되지 않았다고 거들떠보지도 않자, 이를 전격적으로 도입해 마케도니아에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이후 필립이 암살을 당한 뒤에는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왕위에 올라 5.2m 장창부대를 육성하고 갑옷과 방패를 개량했으며, 보병위주의 병력을 기병화 시키는데도 전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장창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대형변경 능력과 선회능력을 가진 최고의 군대를 보유하게 됐으며, 이는 고도의 체력과 고난도의 기술이 뒤따른 결과였다.
현상 속에 숨어 있는 전제를 찾아라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32년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수십 만 대군을 보유한 이집트를 정복했으며, 이듬해에는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5만으로 페르시아의 100만 대군을 격파했다. 또 기원전 327년에는 15만 대군을 이끌고 인도를 침공하기도 했다. 알렉산더의 전술은 단순했다. 수십 배의 페르시아 대군을 맞아 싸울 때 전군의 이동속도를 높이자, 오히려 수적으로 열세가 된 페르시아의 군단 하나하나를 각개 격파하는 방식으로 대군을 순식간에 물리친 것이다. 임 소장은 “사실상 어려서부터 무술을 연마해 온 고단자가 아닌 이상, 보통사람들이 백병전으로 싸우게 되면 2:1로만 싸워도 한 사람이 두 명을 제압하긴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결국 전투는 숫자놀음이다. 알렉산더의 군대는 3만의 잘 훈련된 단일군단이 속도전을 통해 1만 정도의 각개 군단의 적과 싸워 차례로 격파해 나갔던 것”이라고 말하면서 창조적인 전략과 전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프로이센 제국의 대표적 전술가인 프리드리히 대왕은 로이텐 전투에서 3만 명을 이끌고 8만의 오스트리아 군대를 물리쳤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이 종대로 진격해오는 변형 공격을 두 눈을 뜬 채로 방관하다가 측면을 공격당하면서 궤멸됐다. 당시 오스트리아군은 수적으로도 우세했지만 지형적으로도 구릉의 산지를 선점해 전술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대치하던 중간에는 좌측엔 늪지가, 중앙에는 시가지가 있었고, 우측에는 고지가 위치하고 있었다. 이에 오스트리아군 수뇌부는 전술적인 측면에서 별로 불리하지 않은 늪지로 프로이센군이 올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프로이센은 누구나 불가능할 것으로 여긴 고지로 진격해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상대의 허를 찌른 이 공격이 승리의 요인은 아니었다. 프로이센군은 고지를 택해 진격하던 와중에 샛길을 통해 일렬로 종대형 공격으로 대형을 변경한 것이다. 오스트리아군은 어이없다는 듯 멍하니 쳐다보다가 아차! 하는 순간 측면을 내주게 됐는데, 이를 측면에서 바라보니 프로이센군이 마치 횡대로 들어오면서 오스트리아군을 에워싸는 형태가 된 것이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은 적에게 절대 내주면 안 되는 측면으로부터 각개 격파를 당해 수적우세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롬멜의 비결-끊임없는 관찰과 자기혁신 임 소장은 “여러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가 승리한 이유는 다름 아닌, 지난 4000년 이상 전쟁터에서 지켜오던 두 가지 불문율을 파괴한 데 있다. 전투 시에 접전 지역에서는 절대로 대형 변경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하나이고, 둘째는 보병전투에서 종대형 공격이란 있을 수 없는 위험한 방식이라는 것”이라면서 “오스트리아에도 뛰어난 장군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과거로부터 배운 것에 매몰돼 있었기 때문에 프로이센군의 창의적인 전략과 전술에 따라 변형된 공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또 유리한 지리적 위치와 수적우세 역시 오스트리아군이 방심하도록 한 몫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임 소장은 또 “숨어 있는 전제를 찾는다는 것은 통찰을 의미하는 말이다. 전술과 교리가 탄생한 이유와 조건을 파악하고, 변화된 요소를 알아낸 뒤에는 변화된 전술을 사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당시 전쟁에서의 가장 큰 변화 요소는 총검의 등장이었다. 이는 기존에 총병과는 따로 적이 접근했을 때 백병전을 위한 창병이 함께 움직였으나, 총검이 등장한 뒤에는 굳이 무거운 갑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고 전 병사들이 총검을 들게 됐다. 이에 프리드리히는 병사들의 몸이 가벼워짐에 따라 이동이 둔한 대형 변경 불가의 원칙에서 탈피할 수 있었으며, 구보 등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종대형 공격을 감행해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이어서 횡대 공격으로 적을 포위해 각개 격파한 것이다. 1917년 1차 세계대전에 나선 롬멜은 300~500명의 독일군을 이끌고 5개 연대가 지키는 해발 1500~2000m 높이에 위치한 5개의 요새화된 알프스 고지를 단 3일 만에 점령하고 90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때 독일군 전사자 수는 고작 6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또 1940년 2차 세계대전에서는 1개 사단으로 1일 평균 350km를 진격해 15일 만에 프랑스를 종단했다. 이때 프랑스군 포로는 10만에 달했으며, 독일군은 전사자 600명, 실종자 200명에 그쳤다. 도대체 롬멜은 어떤 마술을 부렸기에 ‘전격전(강력한 기동전을 의미)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는가? (아프리카 군단을 이끌고 사하라사막 전투에서 얻었던 별명은 ‘사막의 여우’였음) 임 소장은 “롬멜은 원리를 파악하고 변화에 능한 리더였다. 원리를 파악하기 위해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한다. 예를 들면 참호의 깊이에 따라 적의 포탄으로부터의 아군의 피해를 계산했으며, 적이 위치한 지형지물에 대한 철저한 숙지는 기본이었다”면서 “이러한 데이터에 안주하지 않고 이를 참고해서 새로운 변화를 위한 창의적인 전략과 전술을 찾아내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고 설명했다. 롬멜, 전쟁의 원리 파악하고 변화에 능해 롬멜은 존재 자체가 사실상 그의 상사들에게는 아주 골치 덩어리였다. 상사가 내린 명령을 잘 따르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을 고집하는 부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롬멜은 인류사 최대의 살육전이었던 1차 세계대전에서 단 한 번의 공격실패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에서도 특유의 전격전으로 전장을 리드해 나갔다. 롬멜이 2차 세계대전에서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출전했을 당시 그의 상사들은 평소에 롬멜의 작전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장교들만 뽑아서 그의 참모진으로 급파했다. 이미 독일군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던 그의 작전에 감히 반기를 드는 장교들이라면 그들 역시도 군의 엘리트중의 엘리트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롬멜과 함께 아프리카의 사막에서 전투를 하는 동안 롬멜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게 됐고, 곧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됐다. 이후 그들이 다른 전장으로 파견됐을 때, 그들 중 일부는 롬멜에게 배운 방식에다가 자신만의 창조적인 전략과 전술을 가미해 전투를 지휘하는 경지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임 소장은 이와 관련 “롬멜은 평소 부하들과 소통을 자주 하지는 않았다. 다만 부하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해답을 찾게 한다. 또한 그는 적의 포탄과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 속에서도 부지런히 휘하 부대를 찾아다니며 끊임없이 독려하고, 질문하고, 현재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고 말했다. 어느 날 롬멜이 부하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1소대가 적에게 포위돼 빨리 지원하지 않으면 1시간 내에 전멸할 것이다. 2소대가 지원 여부를 결정한다. 그런데 그 중간에 위치한 통나무집에 영국군이 기관총을 설치하고 매복해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부하들의 의견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2소대까지 위험해지니까 안 간다. ▶2소대가 위험하더라도 무조건 가야 한다. ▶2소대가 목숨을 걸고 차라리 영국군을 공격한다. 하지만 롬멜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모두가 살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기본 원칙이다. 너희들의 세 가지 방법은 모두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결론은 영국군의 매복 위협요소만 제거하면 된다. 나 같으면 즉시 통나무집에 소이탄(화염을 일으키는 폭탄의 일종)을 던져 불태울 것이다. 그러면 적은 위협을 느껴 통나무집에서 철수할 것이다. 그리고 1소대를 지원하기 위해 신속하게 이동한다” - 이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