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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 종묘스토리 - 18 군군신신(君君臣臣)]배향 공신의 빛과 그림자

조선 관료 최고의 영광 뒤에는 히든 스토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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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35호 박현준⁄ 2013.07.15 13:53:38

조선 관료들에게 사후 최고의 영광은 종묘에 배향되는 것이었다. 종묘 배향공신은 임금에게 특히 큰 충성을 했거나 나라에 대한 공로가 커 종묘에 신주가 모셔진 신하다. 배향공신이 되면 후손에게 문음(門蔭), 형벌 면제 등 갖가지 특전이 주어졌고 가문에서는 큰 명예로 여겼다. 대개 국왕의 신주가 종묘에 봉안될 때 배향공신도 결정되지만, 국왕보다 늦게 세상을 뜬 신하는 훗날 묘정에 배향됐다. 또 후대에 특별히 추배(追配)되는 일도 있었고, 정치적 상황에 따라 배향됐던 공신이 추삭(追削)되는 일도 있었다. 종묘의 배향공신은 애초 아흔다섯 명이었으나 정치적 변고로 추가되고 삭제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아흔두 명이 됐다. 또 영녕전으로 조천될 때 매안(埋安)되기도 해 현재는 여든세 명이다. 국왕을 잘 보필해 왕도정치를 구현하게 한 공로로 책봉되는 종묘 배향공신은 관료들의 사후 로망이었다. 영예와 실속을 함께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논란이 있었다. 태조의 배향공신은 애초에 이화, 조준, 이지란, 조인옥 등 네 명이었다. 태종 10년에 의정부에서는 배향공신으로 조준, 남은, 조인옥이 거론됐다. 이에 태종이 “이지란과 이화는 개국에 공이 큰 만큼 마땅히 배향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신하들은 “남은은 나라에 공로가 크지만 서얼을 끼고 적자를 해치고자 했으니 묘정에 배향하는 건 불가하다”고 건의했다. 남은은 정도전과 함께 방석을 세자로 세운 뒤,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태종)에게 피살됐다. 임금의 의중을 살핀 신하들이 남은을 공신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태상왕이 된 태종은 세종 3년에 “고려 시조의 배향공신은 6인인데 우리의 태조는 3인에 불과하다. 개국 때 이제, 남재, 남은은 모두 공이 있었다. 남재와 남은이 그 뒤 죄를 지었지만 공은 마땅히 인정돼야 한다”고 말해 세 명이 승배됐다. 태조의 배향공신이 일곱 명이 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의 배향공신 여섯 명(배현경, 홍유, 복지겸, 신숭겸, 유금필, 최응)보다 많게 하기 위함이었다. 나라를 연 조선 태조의 배향공신이 일곱 명이라는 점은 상징성을 갖게 됐다. 후손의 도리로서 어느 임금도 태조보다 많은 공신을 배향할 수 없었다. 임금들의 묘정에 배향된 공신이 많아야 일곱 명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조 때 영의정 노수신은 광해군의 말 한마디로 명단에서 제외됐다. 광해군은 선조 묘에 배향할 공신을 신하들과 상의했다. 대신들은 이준경, 이황과 함께 노수신을 명단에 넣었다. 신하들은 선조가 노수신을 지극히 예우했음을 고려했다. 문과 장원 출신인 노수신은 사가독서를 한 엘리트였다. 그러나 명종 2년인 1545년 윤원형과 이기 등이 일으킨 을사사화 때 순천으로 유배되고,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진도로 이배, 19년 동안 귀양살이했다. 그러다가 1567년 선조 즉위로 조정에 돌아와 이조 판서, 대제학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1588년 기축옥사 때는 과거 정여립을 천거한 게 문제가 돼 파직되었다. 정여립이 사형을 당한 뒤 선조는 “노수신이 사람을 잘못 추천했다”며 파면시켰던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둔 광해군은 “그는 끝과 처음을 한결같이 못했다. 명단에서 빼라”고 지시했다. 이에 비해 최명길은 대신들의 반대로 효종 묘에 들어가지 못했다. 숙종은 기미년에 최명길을 효종 묘에 추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대간들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최명길이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한 데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신유년에는 승지 이동명이 상소했다. 좌의정 이시백과 판서 송준길을 효종 묘에 추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노련한 정치가인 숙종은 노론과 소론 등 한 정파의 일방독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당파의 균형을 통해 왕권강화를 추구한 숙종은 공신배향도 정국 운용의 카드로 활용한 것이다. 현종 묘에는 애초 영의정 정태화, 판서 김좌명, 판서 조경이 배향되기로 했었다. 그러나 배향에 앞서 대신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기해년에 예를 잘못 적용한 논의에 참여한 정태화를 배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대신들의 말에 따랐다.

태조의 배향공신 7명, 다른 임금도 이 이상 안 돼 기해년의 예란 1659년의 서인과 남인의 예송논쟁을 가리킨다.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상복을 입는 기간이 쟁점이 된다.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은 1년 착용의 기년설을 주장하고, 허목이 앞장선 남인은 3년설을 강조했다. 서인은 효종은 소현세자에 이은 둘째 아들이기에 차남의 예를 따르는 게 도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남인은 효종이 차남이지만 왕통을 계승했기에 장남의 예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서인의 기년설이 받아들여지고 남인은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는다. 이때 회의를 주재한 좌장이 영의정 정태화였다. 그런데 효종 비인 인선대비가 현종 15년(1674년)에 죽자 다시 복상문제가 일어났다. 서인은 9개월 복상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1년 복상으로 맞받아쳤다. 이번에는 남인이 승리해 서인이 조정에서 물러나고 조 대비는 1년 복상했다. 숙종이 현종의 배향공신을 논의하던 무렵에는 남인의 세력이 굳건했다. 이런 배경 탓에 신료들은 정태화가 기해년에 예를 잘못 적용한 만큼 배향 자격이 없다고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숙종은 시간이 한참 지난 1680년 중신들에게 말한다. “선왕의 묘정에 정승이 한 명도 배향되지 못해 죄스러운 마음이다. 당나라와 송나라 그리고 태조 묘정에 남은이 추배된 옛 사료를 살펴 승배하도록 하라.” 정태화는 정승 몫으로 배향이 된 셈이다. 그러나 조경은 배척됐다. 이유는 임금의 얼굴을 모른다는 것이다. 신료들은 조경이 나이 들어 벼슬을 그만둔 뒤 현종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추존된 왕이나 복위된 왕에게는 배향공신이 없었다. 그런데 고종 대에 장조와 문조에게 배향공신을 올렸다.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은 종묘에 모셔지지 않았기에 배향공신도 없다. 배향공신 명단 태조 - 조준, 이화, 남재, 이제, 이지란, 남은, 조인옥 정종 - 익안대군 이방의 태종 - 하륜, 조영무, 정탁, 이천우, 이래 세종 -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 문종 - 하연 세조 - 권람, 한확, 한명회 예종 - 박원형 성종 - 신숙주, 정창손, 홍응 중종 -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정광필 인종 - 홍언필, 김안국 명종 - 심연원, 이언적 선조 - 이준경, 이황, 이이 인조 - 이원익, 신흠,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능원대군 이보 효종 - 김상헌, 김집, 송시열, 인평대군 이준, 민정중, 민유중 현종 - 정태화, 김좌명, 김수항, 김만기 숙종 -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최석정, 김석주, 김만중 경종 - 이수, 민진후 영조 - 김창집, 최규서, 민진원, 조문명, 김재로 장조 - 이종성, 민백상 정조 - 김종수, 유언호, 김조순 순조 - 이시수, 김재찬, 김이교, 조득영, 남연구, 이구, 조만영 문조 - 남공철, 김로, 조병구 헌종 - 이상황, 조인영 철종 - 이헌구, 익평군 이희, 김수근 고종 - 박규수,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 순종 - 송근수, 김병시, 이경직, 서정순 글쓴이 이상주 ‘세종의 공부’ 저자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왕자 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 이상주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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