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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 37]남한산성 외성(外城) 길

377년 전 병자호란의 치욕, 굽어본 소나무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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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42호 박현준⁄ 2013.09.02 14:55:25

남한산성을 한 바퀴 도는 걷기 코스는 둘레길, 올레길 붐을 타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코스가 되었다. 1636년 병자년의 아픔을 모두 감싸고 소나무 숲 우거진 푸근하고 아름다운 코스로 서울 근교에서 이곳만한 곳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남한산성 성벽 따라 걷기 일주를 여러 번 한 이들도 남한산성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필자의 걷기 친구들 중 남한산성 가까이 사는 이들은 자주 이 곳 종주길을 걷는다. 그런 이들도 남한산성 외성(外城)에 대해서는 낯설어 한다. 남한산성은 원성(元城, 本城)과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진왜란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른 조선 조정(朝廷)은 남한산에 성을 쌓을 것을 논의하였으나 실행에는 옮기지 못하였는데 광해군 13년(1621년) 만주 벌판을 통일한 후금(後金, 뒤에 淸으로 국명 개칭)의 위협이 현실화 되자 침략에 대비해 옛 토성(土城)을 석성(石城)으로 개축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이괄의 난으로 공주까지 피난하였다 돌아온 인조는 위급한 상황에 피신할 수 있는 보장지지(保障之地; 종묘사직을 지킬 수 있는 피난처)를 구축하려 했다. 하나는 강도(江都; 강화도)였으며, 또 하나 새로 남한산성을 축성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인조2년(1624년)에서 4년(1626년)까지 산성을 수축하게 되었다. 그 때의 쌓은 산성이 본래의 남한산성인데 현재의 산성 모습은 대체로 그 때 쌓은 것이다. 단지 옹성(甕城)의 모습만이 현재와 차이가 있다. 아시다시피 인조는 병자호란으로 우리 역사에 가장 치욕적인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단 위에 앉은 청태종 아래에서 한 번 절하고 3번 머리 조아리는 예를 3회 행함)라는 항복 절차를 밟았다. 이 때 겪었던 남한산성 방어 구조의 취약점을 보강한 것이 옹성(甕城: 성의 한 부분을 길게 빼내어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옆에서 공격할 수 있게 한 돌출부)을 강화한 것이다. 본래 남한산성에는 북쪽 연주봉에 축성했던 옹성만 있었다. 호란(胡亂)의 수모를 겪은 조선은 인조 16년(1638년)으로 추정되는 해에 지대가 낮아 방어의 어려움을 겪은 남쪽 성벽에 3개의 옹성을 축성하였다. 지금도 남한산성 일주를 하다 보면 3개의 옹성이 남쪽에 몰려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옹성이 축성되었는데 바로 장경사 앞에 있는 장경사신지옹성(長慶寺新地甕城)이다. 삼배구고두 겪은 인조 보장지지 구축 이곳에는 포대를 설치해 한봉(漢峰)과 검단산(黔丹山: 하남 검단산이 아니라 남한산성 검단산)을 방어하는 기지로 삼았다. 이렇게 보면 남한산성의 원성(元城, 本城)은 본래의 둥근 성(城)과 돌출부인 옹성이 결합된 형태가 된다. 이것이 남한산성의 전부일까? 아니다. 남한산성은 원성 이외에 3개의 외성(外城)이 있다. 신남성(新南城), 한봉성(漢峰城), 봉암성(蜂岩城)이 그것이다. 신남성은 본성의 남쪽, 한봉성은 본성의 동남쪽, 봉암성은 본성의 동쪽에 있다. 오늘은 이 3개의 성을 이어서 걸어 보리라. 지하철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로 나온다.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출발점이다.

찻길 옆 숲길을 잘 다듬어 놓아 걸어 올라도 좋은데 오늘은 먼 길 걸을 요량으로 버스를 탄다. 9번, 52번 버스가 남한산성 행궁 앞 종로까지 운행한다. 오늘은 남문(至華門)을 지난 곳에서 내린다. 첫 번째 목표는 신남성이다. 신남성은 남쪽 제1옹성 옆으로 지나야 한다.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첫째 길은 남쪽 성벽을 타고 올라 제1옹성 거쳐 7번 암문으로 나가는 길이다. 두 번째 길은 남문을 나서 성의 바깥벽을 왼쪽 어깨에 끼고 남쪽으로 가는 길이다. 오늘은 지화문을 나서 바깥 성벽을 끼고 출발이다. 부드러운 흙길이 편안하게 밟힌다. 이 길은 검단산, 망덕산 넘고 이배재 갈마치 지나 영장산 불곡산으로 이어지는 이 지역 유명 종주코스의 출발점이다. 잠시 후 제1옹성을 만난다. 무너져 내렸던 유지를 복원했는데 위용이 당당하다. 700여m 지나오니 길은 나누어진다. 좌측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서자. 검단산으로 가는 길이다. 여기서 대략 1km 나아가면 검단산에 닿는다. 아쉬운 것은 검단산(黔丹山) 정상에는 송전탑이 설치되어 있어 오를 수가 없다는 점이다. 또 한 봉우리에도 통신대가 자리잡고 있다. 정상 3봉우리 중 동쪽 낮은 봉에 검단산 정상석이 서 있다. 송신탑이 서 있는 정상을 향해 시멘트길을 잠시 오른다. 철문 사이로 남아 있는 성벽(城壁)이 보인다. 이곳이 신남성 동돈대(東墩臺)이다. 이곳에서 200여m 떨어진 곳에 신남성 서돈대(西墩臺)가 있다. 이곳도 출입이 막혀 있다. 신남성은 도대체 언제 세워졌으며 무엇 하던 곳이었을까? 신남성뿐 아니라 한봉성, 봉암성 등 외성은 병자호란의 전투형태를 살펴보아야 이해할 수 있는 성이다.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던 인조 15년(1637년) 1월 24일 자 실록을 보자. ‘적이 대포(大砲)를 남격대(南格臺) 망월봉(望月峯) 아래에서 발사하였는데, 포탄이 행궁(行宮)으로 날아와 떨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피하였다. (賊放大砲於南格臺、望月峯下, 砲丸飛落行宮, 人皆?易)’는 것이다. 원성 외 3개의 성으로 이뤄진 남한산성 남격대는 검단산의 옛 지명이며 망월봉은 봉암(蜂岩, 벌봉)의 옛 지명이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이때의 상황이 더욱 생생히 그려져 있다. ‘청인이 대포를 망월봉과 남성(南城) 맞은편 봉우리에 설치하고 쏘기 시작하였다.… 적이 또 대포 10여대를 남격대 밖에 설치하였는데 포의 이름을 호준 또는 홍이포라 하였다. 탄환이 큰 것은 사발만하고 작은 것도 거위알만한데 수 십리나 날 수 있었다. 매양 행궁을 향해 쏘기를 종일 그치지 않았다. 사창(司倉)에 떨어진 것은 기와집을 세겹이나 뚫고 땅속으로 한 자 남짓이나 박혔다. (淸人設大砲於望月峰及南城對峰放之.... 敵又設大砲十餘於南隔臺外 砲名虎? 紅夷砲 丸大如沙碗小比鵝卵能飛數十里 每向行宮而放之終日不絶 落於司倉瓦家貫穿三重入地尺許連中)’ 청나라 군대가 자리잡고 대포를 쏜 장소가 지금 외성 3곳이 있는 검단산, 한봉, 벌봉(蜂岩)이었던 것이다. 남한산성 성안에서 가장 높은 곳이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으로 483m임에 반하여 검단산 520m, 한봉 418m, 벌봉 515m이니 성밖 고봉 3곳에 대포를 설치하고 임금이 계신 행궁을 내려다보며 대포를 쏘아대니 그 공포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조선군은 어떤 화기로 대적했던 것일까? 주력 무기는 화살, 칼, 창이었으며 포(砲)로는 천자총통(天字銃筒)으로 대항했는데 근래에 군사전문기관에서 복원하여 시험해 본 결과 500~600m 정도의 비거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검증되었다. 그러면 청나라 군대가 사용했던 홍이포(紅夷砲)란 어떤 대포였을까? 이름 그대로 홍이(紅夷)가 사용하던 포였다. 홍이란 서양 사람을 중국식으로 부르던 말이다. 글자대로 말하면 붉은 오랑캐인데 그 시절 해양강국 네덜란드 뱃사람은 흰 얼굴이 햇볕에 그을어 붉게 보였다. 지금도 백인의 탄 얼굴은 검지 않고 붉으니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리라. 홍이포는 이 사람들이 쓰는 서양식 화포였다. 천자총통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화력의 차이였던 것이다. 청나라도 명나라와 싸울 때 화력의 차이로 고전하였는데 어렵게 홍이포를 구해 무장했던 것이다. 조선이 청에 항복한 이후도 청나라는 조선이 홍이포로 무장하지 못하도록 감시하였다.

서양식 화포, 홍이포로 무장한 청나라 병자호란 후 청(淸)은 조선이 성(城)을 중수하지 못하도록 감시하였는데 조선의 입장에서는 다시는 이런 치욕이 없도록 남한산성 방어체계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일이 산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세 봉우리에 외성을 쌓는 일이었다. 청나라의 간섭이 약화되자 숙종 12년(1686년) 봉암성을 쌓고 19년(1693년)에는 한봉성(漢峰城, 汗峰城)을 쌓았으며 45년(1719년)에는 신남성을 신축했고 이어서 영조29년(1753년)에는 신남성에 동돈대와 서돈대를 개축하였다. 신남성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남한산성은 산성의 특성상 고립될 수밖에 없는데 신남성(검단산) 산줄기는 삼남으로 이어지는 급소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을 청군(淸軍)에게 점령당하고 조정을 구하러 왔던 팔도의 근왕병(勤王兵)들이 패함으로써 인조는 고립무원의 위기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곳의 지리적 중요성은 변함이 없어 돈대가 있는 두 봉(峰)에는 오늘날에도 통신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신남성을 떠나 왔던 길을 잠시 되돌아가면 우측 아래로 내려가는 나무층계가 있는 이배재 갈림길에 닿는다. 안내판에 이배재 3km, 지화문 2.4km, 검단산 100m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분당 쪽 산줄기를 타려면 이배재 방향으로 내려 가면 된다. 시멘트 포장길 따라 가면 왔던 길 남문으로 되돌아가게 되므로 앞쪽 봉우리가 있는 산등성길로 들어선다. 길 안내판이 없으니 주의하여야 한다. 검복리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능선길인데 연전(年前)에는 비교적 많은 이들이 이용하던 등산로였다. 산정상에는 넓은 평탄지가 있다. 검복리로 향하는 능선길은 평탄지의 동쪽 끝에서 이어진다. 잠시 후 나타나는 길 안내판에는 검복리주차장 1,5km, 검단산 정상 0.5km라고 쓰여 있다. 낙엽 쌓인 능선길 1.5km 내려가면 검복리 주차장이다. 개울물이 앞길을 가로막는데 비닐간이식당이 큰 길로 나가는 진출로이다. 이제 좌향좌, 남한산성 동문 방향으로 5,6백m 오른다. 갑자기 돌로 만든 조각들이 길손을 맞는다. 큰골, 돌조각공원이라는 안내물이 보인다. 우측 큰골로 들어가자. 길은 포장길로 비스듬히 오르는 길이다. 이 길의 끝에 영원사지(靈源寺址)가 자리잡고 있고 그 위로 한봉성이 있다. 오르는 길에는 몇몇 음식점들과 굿당이 있는데 길가를 가득 메운 돌조각품들이 기이한 즐거움을 준다. 우수한 작품은 아닐지라도 종류도 다양하고 갯수도 기대 이상으로 많다. 도대체 누가 이런 돌조각으로 이 길을 장식한 것인지... 하도 궁금하여 언젠가 이곳 주민에게 물어 본 적이 있다. 남한산성 동문 밖은 거대한 조각공원 재일교포가 이곳에 조각공원을 개장하려고 준비했는데 허가가 나지를 않아 여러 해째 이렇게 놓아 둔 것이라 했다. 80 몇 억의 돈이 들어갔다나...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많은 돈이 들어갔을 것이다. 지금이야 입장료 없으니 근처 지날 일 있으시면 들려 보시기를.

10여분 조각공원길을 걸어 산길로 접어들 즈음, 길 한가운데가 막혔는데 개인사유지이니 들어오지 말라는 글귀를 읽으며 사유지 주인에게 양해를 구할 생각으로 들어간다. 처음부터 사유지일 리는 없고 언젠가 개인에게 불하했을 것이다. 그곳에는 옛 영원사의 유지가 있다. 이곳에 한봉성을 쌓은 후 한봉성 방어와 관련하여 승군(僧軍)들의 거주처로 세웠을 것이다. 숙종 연간에 세웠던가 아니면 적어도 영조 15년(1739년) 한봉성 개축 즈음에는 세웠을 남한산성 사찰 중 하나이다. 중정남한지에는 ‘동문밖에 있다(在東門外)’고 짧게 소개하고 있다. 무너진 축대에는 기와편이 무수히 흩어져 있다. 석물(石物)도 하나 남아 있는데 빙그레 웃고 있는 보살상이다. 어느 분의 상(像)인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혹시 나반존자의 상을 젊고 편안하게 새긴 것은 아닌지. 사지(寺址)에서 잠시 오르면 능선길 안부(鞍部)에 성(城)이 펼쳐져 있다. 우측으로 보이는 봉우리는 한봉(漢峰)이다. 이곳에서 시작하여 봉암성(蜂岩城) 남쪽 끝 암문까지 이어지는 성이 한봉성이다. 숙종 19년(1693년) 수어사 오시복의 책임 하에 쌓은 외성인데 영조때 조현명이 개축하였다. 성의 여장(女墻, 성가퀴)은 많이 무너져 내려 온전한 곳은 없다. 곰곰 살펴보니 벽돌을 주재료로 하여 흙을 채우고 강회(剛灰)로 마감하였다. 정조 3년(1779년)에 기존 기와장에서 벽돌로 고쳐 쌓은 것이리라.

정조는 1779년에 효종 승하 120주년에 임하여 여주의 영릉(寧陵:효종릉) 참배길에 남한산성에 들려 방어태세를 점검하고 성벽을 보수하게 하였다. 이 때 여장도 기종 기와장에서 벽돌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때의 일을 유수 김종수는 동문 밖 개울가 바위에 己亥駐驆(기해주필: 기해년에 임금께서 다녀가심)이라고 새겨 놓았다. 지금도 동문 밖 철 펜스 안 개울가에는 주필암이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팔라지는 성벽길에 좌로는 장경사가 보이고 본성의 성벽이 구불구불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언덕 위 길이 평탄해지기 시작하는 곳에서 3개의 암문이 길손을 맞는다. 포곡식(包谷式) 산성 한봉성이 끝나고 봉암성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본성의 동장대지와 달리 외동장대지가 평평히 펼쳐져 있다. 산객들이 그곳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지나가는 내게 커피향이 전해온다. 옛 성터에 커피향, 그것도 기묘하게 어울리는 짝이구나. 봉암성 북쪽 끝에는 벌봉(蜂岩)이 있다. 1636 병자년에 이곳에서 쏟아지는 청군의 대포에 질린 조정은 가장 먼저 이곳에 외성을 축성했다(숙종 12년 1686년). 이때의 일을 기록한 봉암신성신축비(蜂岩新城新築碑)가 자연석에 각자되어 있다. 마모되어 글씨 판독은 어려운데 윤 4월 1일에서 5월 9일까지 공사한 날자와 수어사 윤지선의 이름은 판독이 가능하다. 그리고는 몇 년 후 포루(砲壘) 2개소를 증축하여 방어태세를 더욱 다졌다. 전쟁 통에 승군들이 머문 절, 동림사 이곳에도 예외 없이 승군들이 머물 절을 지었다. 동림사(東林寺). 중정남한지에는 ‘봉암 아래에 있다(在蜂岩下)’고 위치만 간략하게 적었다. 절터는 봉암의 서쪽 아래 평탄지에 있는데 절부지가 상당히 넓다. 지금도 동림사의 샘물은 마르지 않아 지나는 이들의 마른 목을 적셔 주고 있다. 깨진 기와편은 사방에 흩어져 있어 지나는 길손의 마음을 스산하게 한다.

이제 봉암성 북쪽 암문을 나간다. 여기서부터는 하남둘레길로 10km여의 능선길을 걸을 수 있다. 법화사지 지나 객산을 넘어 선법사로 가든지 내친 김에 중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까지 갈 수도 있다. 힘든 이들은 봉암성 길을 끼고 본성으로 돌아가도 된다. 오늘 길은 법화사지까지만 가리라. 암문을 나서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능선길이다. 남한산성 본성에 아무리 많은 이들이 몰려도 이 길은 언제나 한적한 길이다. 능선길 걷기 잠시 후 좌측으로 법화골(法華골) 내려 가는 갈림길을 만난다. 이 길로 내려가기를 5분여, 조용한 옛 절터가 길손을 기다리고 있다. 절터의 초석도 그대로 남아 있고, 샘물은 여전히 시원하고 기도드리던 바위틈에는 누군가 금색 여래도 모셔 놓았는데 대웅전터 아래쪽으로는 종(鐘)모양의 3개의 부도가 서 있다. 가운데 부도에는 平源堂善伯大師(평원당선백대사)라는 당호가 적혀 있다. 조선시대 어느 때인가 이 절에서 수도하다가 열반한 분이리라. 절터의 안내판에는 청태종의 매부 법화장군 양고리(楊古利)가 원두표 장군의 꾀임에 넘어가 이곳에서 전사했기에 이곳에 법화사를 세웠다는 말이 전해진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전적(典籍)에 의하면 양고리는 광교산에서 김준용 장군의 휘하장수 박의(朴義)의 포에 맞아 전사했으니 맞지 않는 말이다. 이제 하산길로 접어든다. 목표는 고골이다. 물도 많고 청정해 반딧불이가 살고 있는 지역이다. 교통편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 ~ 버스 환승 9번, 52번~ 남한산성 하차 걷기코스 지화문(남문) ~ 남쪽 1옹성 ~ 검단산(신남성) ~ 앞봉(524봉) ~ 검복리 주차장 ~ 조각공원(큰골) ~ 영원사지 ~ 한봉성 ~ 봉암성 ~ 동림사지 ~ 암문 나서서 ~ 하남나들길 능선 ~ 법화사지 ~ 고골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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