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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의 종묘스토리 (23) 영조의 사모곡 ]“어머니, 누비옷 입지 않겠습니다”

종묘에 모시지 못하는 어머니에 대한 절절함 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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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43호 박현준⁄ 2013.09.09 14:15:44

“지금은 사계절에 드리는 제사조차 몸소 행하지 못하옵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의 영혼을 생각하며 눈물을 삼키곤 합니다. 아, 이 술잔에 6년 동안 움츠려있던 마음을 폅니다.” 영조가 즉위 2년 후인 1726년 1월6일 모친 숙빈 최씨(淑嬪崔氏 1670-1718)의 사당에 올린 제문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애절함이 절절히 표현된 제문. 왕의 생모였지만 후궁이었기에 종묘에 모셔지지 않은 숙빈 최씨. 어머니를 생각하는 영조의 제문에는 한이 함축돼 있다. 임금은 친어머니가 후궁이면 제사를 직접 지낼 수 없다. 임금은 명분상 정비인 왕후의 소생이 되기 때문이다. 영조의 어머니는 후궁인 숙빈 최씨다. 어머니는 궁녀에 가장 하대를 받는 침방나인이었다. 내세울 게 없는 어머니 집안. 바느질 등 허드렛일의 업무. 어머니를 생각하는 영조의 가슴에는 지극한 아픔이 있었다. 더욱이 자신도 생사가 불투명한 나날을 보냈다. 제문에서 '6년 동안 움츠려들었던 마음'은 생사의 갈림길에 선 격동과 인고의 세월을 의미한다. 영조는 숙종의 둘째아들로 후궁 소생이다. 큰아들은 희빈 장씨 소생인 경종이다. 숙종은 장희빈을 사사한 뒤 세자를 눈에 띄게 멀리했다. 행동마다 탐탁지 않게 여겼다. 노련한 정치가 숙종은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의 세력균형을 절묘하게 꾀하며 왕권을 강화해 왔다. 그런데 숙종 말년에는 소론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소론은 세자의 후원세력이고, 노론은 연잉군(영조)과 정치운명을 같이했다. 이에 숙종은 사후 소론의 힘이 더 세지면 왕권이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 왕권약화는 연잉군의 죽음을 의미했다. 숙종은 1717년 노론의 영수인 이이명을 불렀다. 사관을 배제한 독대였다. 왕조시대에 임금과 신하가 단 둘이 이야기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숙종은 비밀스럽게 할 말이 있었다. 독대 내용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노론계 인사들에게 흘러나온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임금은 이이명에게 세자 교체 의사를 내치쳤고, 이이명은 불가를 아뢰었다. 이에 임금은 이이명에게 훗날 연잉군 보호를 부탁했다.’ 임금이 특별 부탁할 정도로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의 목숨은 항상 위험한 상황이었다. 1721년 숙종이 승하하고 세자가 경종으로 즉위한다. 경종의 등극과 함께 위기를 느낀 노론은 강한 공세를 편다. 경종이 건강이 좋지 않고, 아들이 없음을 이유로 들어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성사시킨다. 노론은 내친 김에 세제가 된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한다. 그러나 소론의 반격으로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이 귀양을 가게 된다.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소론은 아예 노론의 싹을 자르기 위해 아예 남인 목호룡을 사주해 고변사건을 일으킨다. 노론 인사들이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노론은 4대신을 비롯한 60여 명이 처형되는 등 173명이 처벌된다. 그런데 조작된 이 사건에는 왕세제도 혐의가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왕세제는 살기위해 숙종의 계비인 원원왕후 김대비에게 왕세제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히기까지 했다. 다행히 경종의 적극적인 보호로 무사했지만 소론의 공세가 계속돼 살얼음판을 걷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1724년 경종의 승하로 영조로 등극하고서야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노론-소론 정쟁 속 즉위한 영조의 과제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정쟁 속에 즉위한 영조는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해소하는 것을 왕정의 큰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즉위와 동시에 당쟁의 폐해를 없애고자 신임옥사를 일으킨 소론 과격파를 축출, 노론을 불러들이는 조치를 내렸다. 영조는 연잉군에서 왕세제가 되고, 이어 경종 살해음모의 배후로 의심받고, 다시 임금으로 등극하는 풍파의 세월을 겪은 것이다. 임금이 된 2년 동안은 분당이 된 신하들을 하나로 묶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보니 훌쩍 6년이 지나갔다. 영조는 이를 6년 동안 움츠려들었던 마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숨 막힐 듯한, 생사가 불분명한 시간을 건너온 영조는 그동안 어머니에게 올리지 못한 제사가 다시 한스럽게 다가왔으리라. 일곱 살에 입궐한 숙빈 최씨는 숙종의 비인 인현왕후 처소의 침방나인이었다. 1689년 인현왕후 폐비 후 왕비의 생일상을 차려놓고 혼자 눈물짓다 승은을 입었다. 1693년 숙원에 봉해졌고, 숙의, 귀인을 거쳐 1699년에 숙빈에 올랐다. 영조는 1694년에 낳았다. 숙빈에 대한 이야기를 고종이 후궁들에게 한 적이 있다. 고종은 영조의 5대손이다. 고종은 대대로 전해 온 내용을 말하면서 '최숙빈은 침방나인 출신'이라고 했다. 이 때 영조는 임금이 되기전인 연잉군 시절이었다. 연잉군 : 침방에 계실 때 무슨 일이 가장 하시기 어려웠습니까? 숙빈최씨 : 중누비,오목누비,납작누비 다 어렵지만, 세누비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어머니의 회고를 들은 영조는 그 자리에서 누비옷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옷을 입지 않았다. 고종의 이야기로 볼 때 숙빈 최씨는 침방나인이 확실해 보인다. 고달픈 나날을 보내는 하급 궁녀였던 것이다. 침방나인은 궁녀 에 가장 아래단계다. 그래서 일도 힘들다. 누비에는 솜이 들어있다. 겉 겹 사이에 솜을 넣고 바느질한 옷이다. 솜은 뭉치고 아래로 처진다. 그래서 솜이 옷 아래쪽으로 쏠리지 않게 중간 중간에 바느질을 해야 한다. 중누비는 줄의 간격이 다소 여유가 있고, 목누비는 줄을 굵게 잡아 골이 깊다. 세누비는 바느질을 촘촘히 한 옷이다. 세누비는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었다. 구중 궁궐에서 아무 희망도 없는 소녀의 바느질. 손가락이 성할 날이 없었을 어머니를 생각한 영조는 평생 누비를 걸치지 않았다. <세계문화유산, 종묘스토리는 이번 호를 끝으로 마칩니다. 그 동안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원고를 보내주신 이상주 작가께 감사드립니다.> -글쓴이 이상주 ‘세종의 공부’ 저자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왕자 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 이상주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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