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임금 시절 여암 신경준(旅菴 申景濬) 선생은 우리나라 산줄기를 정리하여 산족보(山族譜)를 만들었는데 그 책의 이름이 산경표(山經表)입니다. 이른바, 백두대간(白頭大幹), 낙동정맥(洛東正脈), 호남정맥(湖南正脈), 한북정맥(漢北正脈), 한남정맥(漢南正脈)… 이런 산줄기들입니다. 백두대간의 함양과 무주를 경계로 하는 영취산에서 갈려나가는 산줄기가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입니다. 이 산줄기가 진안, 완주의 조악봉(주화산)에서 금산, 논산, 계룡, 공주, 부여시내를 거쳐 마침내 부소산에서 고개를 내리는 것이 금남정맥입니다. 부소산은 백제 마지막 수도 사비성(泗沘城)터의 뒷동산이며 그 유명한 낙화암(落花岩)과 고란사가 있는 곳입니다. 지난 달 금남정맥 길을 걸어 낙화암 난간에서 백마강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젊은 아빠가 딸에게 하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여기가 술과 궁녀들에게 빠져 나라를 망하게 한 의자왕의 3000궁녀가 떨어져 죽은 곳이다’. 이 귓가에 들려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답답해져 옵니다. 이것은 그래도 약과입니다. 3년 전 이 지역에서는 백제의 사비궁을 대대적으로 재현해 놓고 ‘1400년 전 화려했던 대백제의 영광…’이라 하면서 ‘2010년 세계백제 대전’이라는 대대적인 행사를 연 적이 있었습니다. 그 행사 안내판에 쓰여 있는 헤드라인 안내문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1400년 전, 사비궁 그늘 뒤에서 삼천 꽃송이로 흩어졌던 꿈이 있었습니다’. ‘세계 백제 대전’에서 3000궁녀가 꽃으로 흩어졌다고 선전을 해대다니… 이것이 어떻게 백제의 영광을 말하는 행사의 안내문구란 말입니까? 이 날 ‘의자왕을 위한 변명’의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른 새벽잠을 깨어 서울 남부터미널로 나간다. 부여행 버스는 6시30분부터 30~40분 간격으로 출발하여 2시간 내에 부여시외버스터미날에 도착한다. 터미널에 여행안내소는 없기에 매표창구에 부탁하여 지도 한 장 구한다.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부여에도 주요관광지를 연결한 ‘사비길’이라는 걷기 코스가 개발되어 있다. 그러나 시내구간을 걷는 길이 많고, 오늘은 관광목적이 아니라서 버스를 이용해 백제왕릉원(능산리(陵山里) 고분군)으로 향한다. 시내버스정류장은 터미널 좌측 즉 성왕동상(聖王銅像) 방향 50m 지점에 있는데 논산행 버스를 타면 왕릉원 정문 앞에 내려 준다. 택시도 기본요금 정도 거리이니 택시를 이용하는 것도 괜찮다. 부여시대의 백제를 생각하면 흔히들 낙화암을 떠올리지만 사실 부여시대 백제의 역사가 응결된 곳은 이곳 왕릉원이다. 사비(부여)백제의 시작은 25대 성왕(聖王)이 538년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성왕은 수도뿐만 아니라 국호도 남부여(南夫餘)로 바꾸었다. 사실 이때부터 백제는 없고 남부여가 있을 뿐이다. 왜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었을까?
고대국가 부여(夫餘)는 만주 벌판을 대표하는 강대국이었다. 고구려의 주몽은 이 나라 출신으로 압록강가에 나라를 세우면서 부여란 나라를 등에 업으려고 국호를 졸본부여라 했다. 고구려로 바꾼 것은 그 뒤에 일이다. 그러면서 그 후손들은 주몽(추모왕)을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불러 부여의 시조 이름을 도용했고 건국설화도 부여국의 것을 차용하였다. 그만큼 부여는 고구려에게 부러운 나라였던 것이다. 백제는 어땠을까? 백제는 고구려에서 갈라진 나라이다. 그러니 고구려가 닮고 싶어 했던 부여가 백제에게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한강가에서부터 밀려 백마강까지 온 백제의 왕 성왕으로서는 자랑스럽던 대륙국가 부여를 이 남쪽 땅에 재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라 이름은 남부여, 수도의 이름은 부여로 개칭하여 면모를 일신하고자 했다. 안타까운 안내문 ‘삼천궁녀, 백제영광… 이것이 백제가 사비(부여)땅에서 이루고자 했던 꿈인데 그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임금들 - 26대 성왕을 비롯하여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익산으로 천도?), 의자왕- 대부분의 능(陵)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으니 사비백제의 정수(精髓)는 이곳에 있다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무덤은 모두 16기가 분포되어 있는데 중앙에 왕능역으로 추정되는 큰 묘가 7기 있다. 공주 구읍지에 보면 ‘부여 관아 동쪽 10리쯤에 왕릉이 있다(官衙東十里有王陵)’고 했다 하니 왕릉이 맞을 것이다. 3기씩 2열에 위쪽으로 1기가 있다. 앞줄 가운데 묘는 공주(公州)에서 발굴된 25대 무령왕릉과 내부구조가 비슷하여 그 아들 26대 성왕의 능으로 추정하는 이들이 있으며 그 우측으로 벽화 있는 무덤은 27대 위덕왕일 가능성이 크다. 설화에서 선화공주의 남편이며 맛둥(薯童) 출신인 30대 무왕은 금마면(金馬面: 익산 팔봉면 신왕리 쌍릉)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크고 의자왕은 당나라 낙양(洛陽)에서 서거하여 능조차 잊혀졌으니 이곳에는 능이 없다. 다만 2000년 그 혼을 모셔다 이곳에 가묘를 만든 의자왕과 그 아들 융의 단(壇:가묘)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네 분의 왕릉과 왕의 가족으로 추정되는 3기의 능이 있는 셈이다. 단순히 능만 있는 곳으로 여기던 이곳에 20년 전인 1993년 12월 12일 온 나라를 깜짝 놀라게 할 대발견이 이루어졌다. 백제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 : 百濟金銅龍鳳蓬萊山香爐, 국보 287호)가 140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능역과 나성(羅城) 사이 공터에 주차장 조성공사가 시행되었는데 절터의 회랑 쯤 해당되는 곳 진흙 속에서 공기와 차단된 채로 1400년을 숨어 있던 완전한 형태의 대향로, 660년 7월 나당연합군이 밀려오자 누군가 포장도 하지 못한 채 허둥지둥 진흙 속에다 묻고 훗날을 기약했을 것인데… 백제는 멸망하고 그 사람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는지 끝내 잊혀져 우리 시대에 와서야 그 모습을 드러낸 백제금동대향로, 그것은 압권이었다. 그 규모의 크기와 정교함, 다양한 조각상과 신선세계의 상징성 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 자체였다. 실물은 부여박물관에 있는데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향로가 너무도 마음에 든다. 국보 중에 국보라 한다면 너무 아부하는 것일까. 이 향로에다가 침향(沈香)을 넣고 불을 붙이면 열두 구멍으로 피어날 향기와 실같이 피어오를 연기는 상상만 하여도 경이롭다.
고구려에서 나온 백제, 사비(부여)의 꿈 향로가 발견되자 이곳 공터에 대한 정밀 발굴이 시작되었다. 결과는 왕릉을 수호하는 능사(陵寺) 자리가 확인되고 목탑자리 금당자리 등 가람구조가 밝혀졌다. 아울러 창왕(昌王, 시호는 위덕왕)과 그 누이가 아버지 성왕을 위해 지은 절임도 목탑자리에서 발굴한 석조사리감(石造舍利龕: 사리 넣은 홈 파진 돌통, 국보 288호)의 명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명문은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 해는 백제 창왕(위덕왕) 13년)과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567년 정해년에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함)로서 출토지와 연대가 확실한 이정표와 같은 출토물이었다. 게다가 면포(綿布)조각도 발견되었는데 문익점의 목화보다 800년이나 앞선 면제품의 실물이 나타난 것이다. 앞으로도 이곳에서는 역사의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더 많은 발견이 이루어질 것을 기원하면서 청마산성(靑馬山城)으로 향한다. 왕릉원을 나와 좌측 논산방향 차로를 500m쯤 나아가면 왼편 마을길로 부여노인요양원 안내판이 나타난다. 안내판이 지시하는 마을길로 들어선다. 마을 갈림길에는 다시 좌측으로 오석산요양원 안내판이 보인다. 이 요양원 지난 고갯마루가 바로 금남정맥길이며 이정표는 좌로 금성산, 우로 수자원공사를 가리키고 있다.
수자원공사 방향 약 1km의 고도 118m 되는 산이 청마산성(靑馬山城)이다. 조사에 의하면 포곡식 석성으로 그 길이가 9277m나 되는 국내 최대산성 중 하나라 한다. 무너진 석성 옆에 청마산성을 알리는 유지비도 세워 놓았다. 곳곳에 깨진 기와편과 옹기편이 1400년을 뛰어넘어 다가온다. 부여에는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네 개의 외각 성(城)이 있었다. 동은 청마산성, 서는 성흥산성(聖興山城), 남은 석성산성(石城山城), 북은 증산산성(甑山山城)이었다. 게다가 안으로는 서남북(西南北)으로 백마강이 해자(垓字)처럼 두르고 동으로 나성(羅城)이 감싸는 철벽같은 구조였다. 그런 사비성의 함락은 인재(人災)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제 다시 돌아와 금남정맥길을 통해 부소산으로 향한다. 왕릉원 뒷산(陵山) 지나면 길은 북으로 틀어 나성(土城임) 위를 걷는 사비길이 된다. 이 사비길은 산을 하나 넘어 금성산으로 이어진다. 금성산 정상에는 8각정 통수대(統帥臺)가 있어 옛 백제 부흥군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통수대 내려와 앞 언덕 오르면 팔각정인 무로정(無老亭)과 앞 언덕 위 성화대에 닿는다. 성화대에서 내려다보는 부여 시가지는 단아하다. 사비길은 이 길로 이어져 부여박물관으로 향하지만 사비길을 버리고 되돌아 나와 북쪽길로 향하면 성왕로(聖王路)에 닿는다. 바로 앞이 낙화암이 있는 부소산성이다. 이곳에는 백제 궁성의 기원사찰 서복사(西腹寺)지가 있다. 오늘 답사길은 부소산성을 돌아 고란사에서 배를 타고 그 드레나루로 나오는 길이다. 여기에서 버스터미널로 향하는 길목 관북리가 사비성의 옛터일 것이다.
義慈王을 위한 辨明 알다시피 서기 660년 여름 백제(百濟)는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해 멸망한다. 이 과정에서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 기록되어 있듯이 의자왕은 스스로 항복한 것이 아니라 웅진성 성주였던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모시고)와서 항복했다.(其大將禰植 又將義慈來降). 이 점에 대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의자왕이 동맥을 끊었으나 명이 끊어지지 않아 포로가 됐다고 했다. 예식의 반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예식(진)은 당나라 대장군이 돼 출세를 했다. 아무튼 백제는 망했다. 그 이후가 문제다. 삼국사기의 김부식은 의자왕이 궁녀와 음황(淫荒), 탐락(耽樂)하고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했으며 충신 성충(成忠)이 간하자 투옥했다 기록했다. 나라가 망했겠다 이렇게 계집질에 음주에 충신을 투옥하는 행위를 했다 했으니 의자왕은 이 한 방으로 역사 속 탕아가 됐다. 이것이 의자왕의 참모습이었을까? 이렇게 의자왕을 죽일 놈 만든 삼국사기임에도 그 책과 중국 역사서에는 다른 진실이 기록돼 있다. 우선 의자왕의 성품(性稟)이다. ‘어버이 섬기기를 효로써 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어 당시에 해동증자로 불리었다(事親以孝 與兄弟以友 時號海東曾子)’는 것이다. 또 아들 부여융의 묘지명에는 ‘과단성 있고 침착하고 사려 깊어 명성이 유독 높았다(果斷沈深聲芳獨劭)’다고 했다. 또 큰 실적이 있다. 경주김씨에다가 대대로 근거지가 경주였으며 친신라파인 사대주의자 김부식의 기록에도 의자왕이 신라를 쳐 30여 성을 함락시킨 사실을 적고 있다. 진흥왕의 나제동맹 배신 이후 백제가 신라에게 거둔 가장 큰 승리의 연속이었다. 주색에 빠진 군왕이 이룰 수 있는 업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렇게 자신감을 얻은 의자왕은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 정치를 강화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대대로 권력을 누려오던 귀족층과 충돌한다. 이런 때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로 침공해 온다. 1400년 전 백제금동대향로는 국보1호 급 아차 하는 순간 700년의 사직이 물거품이 됐다. 한 번 가정을 해 보자. 만약에 휴전선으로 북한이 침공해 오고, 서해 바다로 중국의 대함대가 침공해 온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을까? 의자왕은 1400년 전 이렇게 내환외우(內患外憂)를 맞았던 것이다. 그 후 세월은 흘러 탕아 의자왕과 낙화암(落花岩) 3000궁녀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진실이 돼 버렸다.
낙화암을 기록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일연스님의 삼국유사다. “백제고기에 이르기를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로 강물에 임했다. 전해오는 말로는 의자왕과 여러 후궁이 (화를) 면하지 못할 줄 알고 서로 말하기를, ‘차라리 자살하지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고는, 서로 데리고 와서 강에 빠져 죽었다고 하여 세상에서는 타사암이라고 한다(百濟古記云 扶餘城北角有大岩 下臨江水 相傳云 義慈王與諸後宮 知其未免 相謂曰 寧自盡 不死於他人手 相率至此 投江而死 故俗云墮死岩 斯乃俚諺之訛也 但宮人之墮死).” 이 글에서 보듯 낙화암의 옛 이름은 타사암(墮死岩)이었다. 그 후, 동문선(東文選)에는 고려 말 부소산 북쪽 주자봉(注子峰: 고려 지명은 石灘)에 와서 살던 선비 이존오(李存吾)의 칠언고시 석탄행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 비로소 시적(詩的)표현 낙화(落花)가 등장란다. ‘옛 나라 백제의 장강 구비에 (百濟古國長江曲) 석탄 풍월이 쓸쓸한지 몇 해던가 (石灘風月閑幾年) ………… 낙화봉 아래 물결은 굽이치는데 (落花峰下波浩蕩) 흰구름 천년 세월 속절없이 아득하네 (白雲千載空悠然)’ 이존오를 거치면서 타사암에서 낙화봉(落花峰)이 된 이 절벽은 고려 말 이색(李穡)의 아버지 이곡(李穀)의 주행기(舟行記)에서 낙화암(落花岩)이 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낙화암으로 정착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삼천궁녀(三千宮女) 이야기는 없었다. 드디어 조선 초 문인 김흔(金訢 : 1448년~)의 칠언고시 ‘낙화암’이란 시(詩)가 속동문선(續東文選)에 보인다.
역사에 왜곡된 의자왕, 성품 곧고 명성 높아 ‘삼천가무 모래에 스러졌으니(三千歌舞委沙塵) 꽃 지고 옥 깨져서 물따라 흘러갔네(紅殘玉碎水隨逝)’ 이제 3000 궁녀 스토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어서 성종 때 문인 입암 민제인(立岩 閔齊仁)이 명문 백마강부(白馬江賦: 立岩集)로 가세란다. ‘삼천궁녀 바라보니 구름 같아라(望三千其如雲)’ 이렇게 3000궁녀 스토리는 기정사실이 됐다. 1941년 역사소설가 윤승한이 소설 ‘김유신’에서 3000궁녀를 대중에게 알렸고 근년에 와서는 ‘봄날은 간다’로 우리의 가슴을 울린 손로원 선생의 ‘백마강’이 완전히 말뚝을 박았다. 1.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에 종소리가 들리어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아아아~ 달빛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2.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철갑 옷에 맺은 이별 목메어 울면 계백장군 삼척검은 임 사랑도 끊었구나 아아아~ 오천결사 피를 흘린 황산벌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3.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칠백년의 한이 맺힌 물새가 날면 일편단심 목숨 끊은 님 치마가 애닯구나 아아아~ 낙화삼천 몸을 던진 백마강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패자는 말이 없다. 당(唐)나라로 끌려가 해(660년)를 넘기지 못하고 명(命)을 다한 의자왕은 낙양(洛陽)의 북쪽 언덕 북망산(I北邙山)에 묻혔다. 그 아들 융의 묘지명은 발견됐으나 의자왕의 묘소는 영영 찾지를 못했다. 의자왕이시여, 1400년 뒤 이 땅에 당신이 그런 이 아니었음을 믿는 사람들이 있음을 아시고 편히 잠드소서.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남부터미널 ~ 부여 ~ 논산행 버스 (부여왕릉원 하차) 걷기코스 부여왕릉원 ~ 청마산성 ~ 능산(왕릉원 뒷산) ~ 금성산 ~ 성화대 ~ 성왕로 ~ 부소산(낙화암/ 고란사) ~ 그드레나루 ~ 터미널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