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8호 박현준⁄ 2013.10.14 13:55:25
햇빛이 파삭 부서질 듯 쏟아지는 가을이 왔다. 이런 날에는 제대로 산행 한 번 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목표는 도봉산이다. 주말 등산객 많은 것 말고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산행길이다. 전철 7호선이나 1호선을 타고 도봉산역에 내린다. 1호선 타는 이들은 유의해야 한다. 바로 이웃역 이름이 도봉역이라 사전 지식 없이 오는 이들은 이 역에서 내리는 일이 종종 있다. 언젠가 이야기했듯이 남한산성의 산성역과 남한산성입구역이 혼동되고 근래에는 2호선 성내역이 잠실나루역이 되면서 낯선 이들은 잠실역과 혼동되는 일이 종종 생긴다. 무슨 사정이야 있겠지만 공연히 시험에 드는 일은 피곤하다. 역사(驛舍)를 나오면 8차선의 시원한 국도가 서울과 의정부를 잇는다. 건널목에서 바라보는 도봉산의 선인봉 만장봉은 우람하게 하늘로 발돋움한다. 건널목을 건넌다. 도봉산으로 향하는 앞쪽 비탈길에 ‘다락원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알아보는 이도 살피는 이도 많지 않으니 먼지가 뽀얗다. 400여 년 전 오늘의 필자처럼 이곳 다락원을 지나 도봉산 계곡으로 들어간 두 나그네가 있었다. 월사 이정귀(月沙 李廷龜)와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었다. 그때의 일을 월사가 ‘유도봉서원기(遊道峰書院記; 도봉서원답사기)로 기록한 것이 전해진다. 그때 두 사람은 조정에서 물러나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월사 이정귀가 백사에게 수락산과, 도봉산에 새로 생긴 계당(溪堂: 도봉서원에 새로 지은 계곡가 건물)에 유산(遊山: 산행)가자 제안하였다. “백사가 흔쾌히 말하기를 ‘수락산은 내가 날마다 가는 곳이니, 나는 도봉산에 가 보고 싶구려. 그대와 함께 가니, 매우 즐거운 일이오.’ 하고는, 즉시 아이를 불러 지팡이와 신발, 복건(幅巾)과 평상복을 준비하게 하여 여장을 갖추어 노새를 타고 나섰다. 개울을 따라 갈대숲 사이로 난 길을 수십 리 가서 다락원(樓院)의 대로를 지나 동구로 들어서니, 이미 다른 세계였다. (沙翁忻然曰:水落吾常日往 道峯吾願也 與君行甚樂事也 卽呼兒整杖屨幅巾布衣 跨騾而出 沿溪行蘆葦間數十里 歷樓院大路入洞口 已是別境)” 이때 백사는 벼슬길을 물러나 수락산 아래 노원(蘆原村)에 우거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중랑천 갈대숲 길을 노새를 타고 지난 후 지금 1,7호선 도봉산역 앞 윗다락원에 이르렀을 것이다. 다락원(樓院)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함경도 경흥에 이르는 경흥대로(관북대로) 상에 중요한 원(院; 국립여관)이 자리하던 곳이었다. 도봉산역 앞을 윗다락원(上樓院), 시계(市界) 넘어 의정부 호원동 지역을 다락원이라 불렀다. 경흥대로는 동대문(흥인지문)을 나서 보제원 ~ 수유현~ 누원 ~ 의정부… ~ 포천 송우리… 를 지나 철원, 김화를 거쳐 경흥까지 가는 길이었다. 아마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일화 함흥차사(咸興差使)도 이 길을 지났을 것이다.
먼지 뽀얀 400년 전 다락원(덕해원) 표지석 동국여지승람에는 다락원의 이름이 덕해원(德海院)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봉산 밑에 들판이 있는데 해촌(海村)이라 한다. 덕해라는 원이 있다. 서울에서 30리 거리다.(道峰山下有原 曰海村 有院曰 德海 距京城三十里)’ 아마도 덕해원에 누각(樓閣)이 있어 후에 누원(樓院)이 된 듯하다. 조선초 문인 서거정은 저물녘에 덕해원에 도착하여 나그네의 여정(旅情)을 시로 남겼다. 誰家蘺落掩柴門 (누군가네 집 울타리는 내려지고 사립문 닫혔네) 柳暗花明又一村 (버들 우거지고 꽃 화사한 곳 또 다른 마을 하나) 日暮蹇驢不知處 (날은 저물고 다리 절룩 노새는 머물 곳 모르는데) 小橋流水月明痕 (작은 다리 흐르는 물에 밝은 달의 자취) 서거정은 그 저녁 달빛에 의지하여 묵을 곳은 잘 찾아 갔을까? 550여 년 전 서거정이 본 꽃 피는 마을은 아직도 윗다락원 터 안쪽에 남아 있다. 안골마을이다. 그린벨트와 군사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50여 년 전 모습으로 퇴락한 채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작은 실개천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환승주차장과 버스종점이 앞을 막아 갇힌 마을로 만들었고 실개천 가에 서 있던 노송(老松)들은 자취도 없다. 마을 안 제일 깊은 곳에 자리했던 조선시대의 정원 속 연못은 오래 전에 메워져 주말농장이 되고 정원을 둘러쳤던 정감어린 담장은 모두 무너져 흙과 돌무더기만 간간히 남았다. 마지막 남아 있던 한옥 한 채도 헐렸고, 수백 년 마을을 지켜주던 연당나무도 수명을 다해 삭둑 잘린 지 십 수 년을 넘었다.
도봉산 선인봉과 만장봉을 등에 업고 앞을 바라보면 수락의 연봉들이 눈 가득 들어왔던 삼태기 마을, 도봉산의 마지막 줄기가 좌청룡 우백호로 마을의 양 어깨를 껴안아 언제나 따사로웠던 마을, 실개천이 서출동류(西出東流)하여 중랑천으로 흘러들었던 우리 시대 몇 남지 않은 아름다운 조선의 자연부락은 철저히 망가져 있었다. 다락원은 조선 중기가 되면서 원(院)의 기능은 민간이 담당하여 점(店)으로 바뀌어 갔다. 나그네 쉬어가는 봉롯방도 있었고 한 잔 하는 주막도 생겼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장터의 기능도 더해갔다. 조선 초기에는 육의전(六矣廛)이라 하여 종로의 종각을 중심으로 국가에서 허가받은 시전(市廛)만이 장사를 독점하였다. 그러나 17세기가 되면서 사회는 다양한 변화에 직면하였다. 남대문밖 칠패시장(七牌), 종로4~5가 사이 배오개(梨峴)시장, 용산, 마포, 서강이 중심이 된 경강상인(京江商人)이 육의전보다 더 큰 손으로 성장하였는데 이른바 東部菜(동부-배오개시장-는 채소)요, 西部魚(서부-칠패시장-는 어물)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가 되었고 경강은 소금과 곡물의 큰 손이 되었다. 지금도 마포구에는 염리동(鹽里洞)이라는 동네가 있다. 얼마나 소금의 큰 손들이 많았으면 아직도 염리동이겠는가? 그런데 한양의 시장이 기능을 다하려면 물량공급 루트가 든든해야 한다. 이곳 다락원은 한양과 강원도, 함경도를 잇는 경흥대로의 주요 지점이었다. 동해바다의 어물, 강원 함경의 직물등 물산은 다락원을 통해 서울로 들어갔다. 다락원은 송파와 함께 한양 상권과 연결된 큰 손들의 시장이었다.
다락원에서 명태를 매석하면 한양사람들 제수(祭需)도 타격을 받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불효가 아니고서야 어찌 제사상에 포가 빠지겠는가. 그러던 다락원 터는 그 시절 흥청거리던 흔적은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일제를 거치고 6.25를 지나면서 북으로 통하는 길이 막혔다. ‘땅은 다 수명이 있다’더니 그 말뜻을 다락원 터에서 깨닫는다. 도봉산 등산길로 향한다. 주변에는 음식점과 등산복 상점으로 가득하다. 다락원의 상혼(商魂)이 이곳에서 부활했다면 기쁜 일이다. 버스종점을 지나면서 큰 계곡을 끼고 산행길이 펼쳐진다. 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좌측으로 다리 건너 보문능선으로 가는 길이 갈리고 잠시 뒤에는 우측으로 광륜사(光輪寺)가 나타난다. 좌청룡 우백호, 조선시대 도봉 안골마을의 추억 안내문에 따르면 서기 673년 의상조사가 창건하였고 원래 사명은 만장사(萬丈寺)였다 한다. 임진왜란 이후 폐사된 것을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의 원력으로 중창하였다 한다. 신정왕후 조씨는 순조의 큰아들 효명세자의 부인으로 세자빈이었는데 효명세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그 큰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여 헌종이 되었고 효명세자는 익종으로 추존되니 왕대비에 봉해졌다. 중전은 되어 보지 못하고 대비가 되었으니 여인으로서 행복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아들 헌종도 아들이 없어 방계에서 철종이 뒤를 이었는데 철종 또한 아들 없이 승하하니 궁중의 어른 조대비가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 분이 고종이다. 고종을 익종의 양자 되게 하여 정통성을 확보한 것이다. 이로써 조대비는 여인으로서는 불행하였지만 왕실의 어른으로서는 힘과 부귀를 함께 누릴 수 있었다. 이곳 광륜사는 조씨 집안의 원찰로서 조대비의 별서(別墅)로 활용되었다 한다.
광륜사 앞 계곡 옆으로는 큰 바위에 ‘道峯洞門’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우암 송시열이 도봉서원에 왔다가 쓴 글씨라 한다. 그 위로는 서원말(·로 씀: 마을)을 알리는 표지석도 세워 놓았다. 위쪽에 도봉서원이 있었기에 형성된 서원마을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다. 잠시 앞으로는 북한산국립공원 도봉분소를 지나게 되고 녹야선원 갈림길을 지나면 계곡 건너편 바위에 ‘明水臺’라고 쓴 글씨가 눈에 들어오면서 길 우측으로는 약수터가 나타난다. 수량 풍부하고 맛도 좋은 약수이다. 조금 나아가면 도봉서원 공사막 옆으로 김수영(金洙暎) 시비(詩碑)가 서 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김수영 시인의 시 ‘풀’ 일부가 새겨져 있다. 요즈음 젊은 세대는 김수영 시인의 시가 교과서에 실려 있어 이 시인을 알지만 중년 이상의 연령층은 이 시인이 낯설다. 시인은 자신의 시처럼 세상을 살아간 분이다. 고등학생 시절 한국 현대시인들의 시를 모아 놓은 시집을 한 권 샀는데 그 시집 속에 이 시인의 시 ‘달나라의 장난’이 실려 있었다.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 이렇게 시작하는 시였는데 팽이처럼 내 머리도 팽팽 돌았다. 지금 다시 읽으면 이해가 되려나 모르겠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무언가 가슴으로 쏴~ 하며 들어오는 게 있었다.
시인은 48세 때 마포 구수동에서 인도로 뛰어든 버스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 집안의 선영이 있으며 어머님과 양계를 했던 오봉초등학교 뒤 도봉산 자락에 묻혔다. 그래서 시인은 도봉산의 시인이 되었다. 시비 옆으로는 도봉서원을 복원하는 발굴, 건설 현장이 있다. 도봉서원 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 중기 이후의 일이고, 이곳은 본래 나말여초(羅末麗初)부터 700년을 이어온 대표적 선종사찰 도봉원(道峰院)이 있었던 곳이다. 불교국가였던 고려는 역원(驛院)을 운영하면서 지방의 큰 사찰에는 원(院)을 겸하게 하였다. 예를 들면, 중원미륵사는 미륵대원(彌勒大院), 혜음사는 혜음원(惠陰院), 고달사는 고달원(高達院), 도봉사는 도봉원, (道峰院), 문경 희양사는 희양원(曦陽院)이었다. 여주 고달사에 있던 원종대사탑비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광종22년(971년) 황제는 조칙을 내려 ‘국내 사원 중에 도봉원, 고달원, 희양원 오직 3 곳은 전통을 지켜 문하의 제자들이 상속하여 대대로 주지가 되도록’ 하였다. 이른바 황제의 칙령을 받은 부동사찰(不動寺刹)로서 중요성이 인정된 사찰이었던 것이다. 도봉산이란 산 이름도 도봉원에서 생겨난 이름일 것이다. 왕실의 어른 조대비 집안의 원찰, 광륜사 또한 북한산 신혈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임금이 된 8대 현종(대량원군)은 즉위하던 해에 왕권을 확립할 사이도 없이 거란의 성종이 이끄는 40만 대군의 침략을 받았다. 이 때 그가 지나간 피난길이 ‘적성(단조역) ~ 양주 (창화현) ~ 양주(도봉원) ~ 광주(요탄역)~ … 나주’였다.
현종은 피난길에 이곳에서 심신을 추스르고 국사에 임했던 것이다. 그만큼 도봉원은 고려의 중심 사원 중 하나였다.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했을 때는 천태종에 소속되었다. 조선시대가 되면서 도봉원은 어느새 이름이 영국사(寧國寺)로 바뀌어 기록에 나타난다. 무학대사와 관련이 있다하나 분명치는 않다. 김수온의 식우집(拭疣集)에는 ‘영국사’를 읊은 시가 전해지고 동국여지승람에도 영국사가 소개되어 있다. ‘청룡사ㆍ망월사ㆍ회룡사ㆍ원통사ㆍ영국사(寧國寺)는 모두 도봉산에 있다’(俱在道峰山). 그러면서 서거정이 영국사를 읊은 시 한편이 소개되어 있다. ‘옛 탑은 층층이 하늘로 희게 섰고, (古塔有層空白立) 깨진 비석은 글자도 없이 반쯤 푸르게 쌓여 있네 (斷碑無字半靑堆)’ 아, 영국사의 탑과 비석은 지금 어디로 간 것일까? 이곳 영국사에 선조 6년(1573년) 도봉서원이 세워진다. 양주 목사 남언경(南彦經)이 주도를 하고 촌은 유희경(劉希慶)이 안팎의 일을 맡아 도왔다. 사림의 거두 정암 조광조 선생을 배향했고 곧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그 후 1696년 우암까지 모셔졌으니 1871년 대원군에 의해 서원이 철폐될 때까지 자못 위세가 당당하였다. 경치 좋지, 사림의 거두를 모셨지, 사액서원이 되었지, 한양에서 가깝지, 이러하니 한양 유생들의 인기 답사코스였다. 따라서 도봉서원에 다녀간 기록과 한시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김수온, 서거정, 이정귀, 송시열, 이민구, 성여학, 김창협, 이안눌, 정약용, 어유봉, 김상헌 등등) 또한 그림도 그려졌는데 이징(李澄)이 서원 옆에 있던 유희경의 임장(林庄)을 그린 유촌은임장도(劉村隱林庄圖)는 아쉽게도 전해지지 않고, 겸재 정선이 그린 도봉서원도는 남아 당시의 도봉서원 모습을 생생히 보여 주고 있다. 요즈음 도봉서원 재현은 이 그림에 의존하고 각종 답사 기록에 남아 있는 건물의 이름을 살리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서원 앞 계곡에는 이곳을 다녀간 이들이 남긴 각자(刻字)가 바위에 많이 남아 있다. 아쉬운 점은 계곡이 출입금지 되어 있고, 별도의 안내프로그램이나 사진과 내용을 설명하는 안내판도 없어 그림의 떡일 뿐이다. 고려시대 중심 사원 도봉원, 영국사로 바뀌어 서울시가 발행한 ‘서울금석문대관’에는 사진과 탁본과 해설이 곁들여 있다. 舞雩臺(무우대), 光風霽月(광풍제월), 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授(제월광풍갱별전 료장현송답잔수), 高山仰止(고산앙지), 濂洛正派 洙泗眞源(염락정파 수사진원), 伏虎洞天(복호동천), 鍊丹窟(연단굴) 등이다.
도대체 무슨 뜻을 담고 있는 것일까? 1. 舞雩臺(무우대): 우암의 수제자인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가 새긴 글이다. 행서(行書)로 흘려 써서 판독하기 어렵다. 쓴 이의 이름은 한수옹(寒水翁)으로 기록해 놓았다. 논어 선진편(先進)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묻는다. 혹 너희들을 알아준다면 어찌하겠느냐? 여러 제자들이 대답한 후, 나이 많은 증점(曾點)이 대답한다. ‘늦은 봄에 봄옷이 완성되면 관을 쓴 어른 5,6명과 어린이 6,7 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쏘이다가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이에 공자도 감탄하며 ‘나도 증점이와 함께 하겠다’고 한다. 이곳을 찾는 조선의 선비들은 도봉계곡에서 목욕하고 무우대 바위에 올라 바람 쏘이고 싶었던 것이다. 2. 光風霽月(광풍제월): 한천(寒泉) 이재(李縡)가 새긴 글이다. 송나라 학자 황정견이 주자의 스승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인품과 기상을 칭송한 말이다. 비온 뒤 맑은 바람 비갠 뒤의 깨끗한 달이란 뜻. 도봉서원 건물에는 제월루와 광풍당이 있었다. 3. 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授(제월광풍갱별전 료장현송답잔수): 글쓴이를 화양노부(華陽老夫)라 했는데 우암 송시열을 뜻한다. 출전은 주자의 시에서 각각 한 구절씩 모아 쓴 것이다. 성리학의 뿌리가 다시 각별히 전해지니 오로지 책읽는 소리로 물소리에 답하네. 4. 高山仰止(고산앙지): 시경 소아(小雅)에 ‘高山仰止(고산앙지) 景行行止(경행행지)’라 하였다. 큰 산은 올려다 볼 수 있고, 큰 길은 다닐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止는 ‘정지하다’는 뜻은 없고 종결사로 쓰였다. 옥천에는 우암이 세운 二止堂(이지당)이 있는데 윗글에서 따온 것이다. 5. 濂洛正派 洙泗眞源(염락정파 수사진원) :쓴 이가 춘옹(春翁)인데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글씨이다. 濂洛(염락)은 염계(濂溪)와 낙수(洛水 )로 주돈이와 정자 형제가 강학하던 곳이며 洙泗(수사)는 洙水(수수)와 泗水(사수)로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따라서 ‘주자학의 바른 줄기이며 공자 가르침의 진원’이란 뜻이다. 6. 伏虎洞天(복호동천): 범이 엎드려 있는 형상의 진경이란 뜻이다. 7. 鍊丹窟(연단굴): 도교의 신선 수련법이 연단이니 연단하는 굴. (다음호에 계속)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1, 7호선 도봉산역 하차 걷기 코스 도봉산역 ~ 다락원터 표지석 ~ 안골마을 ~ 광륜사/도봉동문 각자 ~ 김수영 시비 ~ 영국사터(도봉원터)/도봉서원 ~ 서원교 갈림길에서 우측 능선 ~ 도봉대피소 ~ 천축사 ~ 마당바위 ~ 관음암 ~ 오봉 ~ 여성봉 ~ 송추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