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6-357호 박현준⁄ 2013.12.16 14:46:02
이한성 동국대 교수 첫눈이 내렸다. 산을 바라보니 등성이가 하얗다. 가슴이 설렌다. 능선길을 오래 걸어 보리라. 서울 근교에 육산(肉山 흙산)이면서 능선길을 무리없이 걸을 수 있는 산 중 하나가 하남 검단산이다. 전철을 타고 천호역 6번 출구를 나선다. 이곳에는 강동대로를 지나 검단산입구로 가는 버스노선이 여럿 있다. 새로 생긴 하남환승주차장에서 내린다. 안쪽으로 향하면 바로 검단산입구다. 검단산 오르는 길은 이곳에서 유길준묘 방향으로 가든지 충혼탑 방향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오늘은 강변길을 걸어 배알미 코스로 올라 보리라. 창모루에서 시작하는 위례사랑길을 걸어 배알미에서 숨겨진 검단산의 골짜기를 더듬으며 정상에 오르는 길이다. 힘이 든 이들은 정상에서 하산하면 되고, 지구력이 되는 이들은 아름다운 능선길을 걸어 용마산에서 하산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지구력만 있다면 하루 큰마음 먹고 느리게 긴 길을 걸어 보는 것도 즐거움이다. 환승주차장에서 창모루(창우동)까지 약 1km, 창모루에서 아랫배알미까지 약 4km, 아랫배알미에서 검단산 정상까지 약 3km, 검단산에서 용마산까지 능선길 3.7km, 용마산에서 각화사까지 1.5km, 각화사에서 정류장까지 약 1km가 되니 산길 8km에 들길 6km 합하여 14km가 되는 제법 긴 길이다. 그런데 길을 걷다 보면 어느덧 알게 되는 것이 산 정상에 올랐다가 그대로 내려오는 산길은 의미도 재미도 반감된다는 사실이다. 환승주차장에서 산곡천으로 내려선다. 시민들이 걸을 수 있게 하천산책로는 잘 가꾸어져 있다. 산곡천(山谷川)은 동(東)으로는 검단산 용마산에서 발원한 물줄기와 서(西)로는 남한산성 산줄기들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은고개로부터 만나 한강으로 흐르는 물줄기이다. 창모루(창우동) 강변을 향해간다. 검단산 기슭을 오른쪽으로 끼고 팔당대교가 있는 북쪽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도미열전으로 보는 백제 개로왕에 얽힌 사연 이윽고 팔당대교에 다다르면 위례사랑길이 시작된다. 이곳에서부터 팔당댐까지 강기슭을 끼고 걸을 수 있게 옛길을 상당부분 생각하게 만든 길이다.
좌로는 예봉산 우로는 검단산이 자리하고 있어서 한강물이 갑자기 협곡 사이를 흐르는 구간이다. 상류에는 이제 댐이 자리하고 있어 수량도 줄고 세차게 흐르는 강물의 모습도 볼 수 없지만 예전에는 정선 아우라지를 지난 한강의 뗏목이 지나던 길목이요 남한강 북한강을 타고 한양으로 오던 세미(稅米)와 공물(貢物)이 지나던 조운(漕運)의 대로였다. 그러기에 산곡천과 한강이 만나는 모서리(모루 隅)에 이것들을 보관할 수 있게 창고(倉庫)를 지었는데 그 창고가 있던 산과 강이 만나는 모서리라 하여 창모루라 하였고 한자로 쓰다 보니 창우(倉隅)가 되어 이곳의 지명은 지금도 창우동(倉隅洞)이다. 그러나 토박이들은 아직도 정겨운 이름 창모루를 잊지 못한다. 창모루 잠시 지나면 강을 바라보는 닭을 닮은 닭바위가 나오고 이윽고 도미나루에 닿는다. 친절하게도 도미부인(都尾婦人)의 이야기를 목판(木板)으로 새겨 이 나루의 역사성을 살려 놓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본기, 연표, 지(志)에 이어 흥미로운 인물들의 이야기를 실어 놓은 열전(列傳)이 있는데 여기에 도미열전(都尾列傳)이 들어 있다. 도미는 백제사람으로 소민(小民: 일반 백성)이었는데 부인이 천하의 미인이었다. 이에 개루왕(蓋婁王 4대)이 도미의 부인을 탐하여 도미의 눈을 불구로 만들어 추방하고 그 아내를 취하려 했다. 그러나 그 아내가 기지를 발하여 강가에서 배를 타고 떠나 남편을 만나고 고구려 땅에서 일생을 마친 가슴 아픈 이야기가 도미열전이다. (졸고-이야기가 있는 길 (18) 참조)
그런데 안내판에 기록한 백제의 임금을 21대 개로왕(蓋鹵王)이라 하였다. 개로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포로가 된 후 아차산성으로 끌려와 죽임을 당한 임금이다. 이렇게 가슴 아픈 죽임을 당한 임금에게 어찌 선대에 있었던 음행(淫行)의 누명까지 씌운단 말인가. 이 나룻가 강 이름은 두미강 또는 도미강이다. 왕조실록과 세종실록지리지 및 동국여지승람에는 도미진(渡迷津)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 의하면 “도미진(渡迷津)은 동부면에 있는데 속칭 두미(斗尾) 또 두미(斗迷)라 한다. 북안은 도미천(渡迷遷)이다. (在東部面 俗稱斗尾 又稱斗迷 ... 北岸號渡迷遷)“라 했다. 대동여지도에는 이 나루를 두미진(斗迷津)으로 그려 넣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도 이 강의 이름이 보인다. 소천사시사(苕川四時詞)에 두미협관어(斗尾峽觀魚)라는 시(詩)이다. 풀이하면 ‘두미강 협곡에서 고기잡이를 구경한다’는 뜻이다. 무슨 고기를 잡았던 것일까? 이 물살 빠른 두미강의 겨울 잉어(鯉魚)잡이는 조선시대 볼만한 구경거리였던 것이다. 다산선생의 시를 읽으면 그 겨울 강태공의 고기잡이 모습이 그려진다. 俯鑿玻瓈萬孔(부착파려만공) 몸굽혀 유리 같은 얼음에 많은 구멍을 뚫고 橫施鐵鎖千尋(횡시철소천심) 물 깊이 쇠낚시 사슬처럼 옆으로 걸었네 天寒綠帽盈雲(천한록모영운) 날은 차서 녹색모에 하얗게 김 서렸는데 日射紅鱗耀金(일사홍린요금) 햇빛에 붉은 비늘 번쩍 금빛이어라
팔당댐이 막히기 전 도도히 흘렀을 도미강의 물굽이가 보고 싶어진다. 아름다운 위례사랑길은 계속 강을 끼고 뻗어 나간다. 흰고니들이 무리를 지어 강 건너편 도미천으로 날아간다. 이곳은 고니(백조)도래지이다. 올 겨울도 벌써 많은 고니가 날아왔다. 이윽고 그릴 & 샤브(옛골토성)라는 음식점 앞으로 올라온다. 길 건너 펜스 안에는 약사여래마애불이 이 겨울 홀로 검단산 북쪽 기슭을 지키고 계신다. 아마도 길과 앞 음식점이 자리한 터에 절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마애불만 남고 절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언제 생겼다가 언제 사라진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마애불만 외딴 곳에 남아 있다가 아들 낳아야 할 이 땅 어머니들에게 코를 다 내주시어서 코가 문드러졌다. 앞으로도 누군가 아들 낳고 싶은 어미가 오거든 코도 또 내주시고 마음 아픈 이 와서 빌거든 마음도 내 주십시오. 겨울 속에 마애불을 남겨 두고 배알미를 향하여 위례사랑길로 다시 들어선다. 잠시 후 두껍바위를 만난다. 저 아래 강가에 앉아 있다. 안내판에 기우제를 지내던 바위라고 한다. 얼마 후 수자원공사를 돌아 아랫배알미 마을로 들어선다. 강 건너 산은 예빈산(禮賓山)이다. 하얗게 눈에 덮여 있다. 조선시대 빈객의 연회(宴會)와 음식 등을 관장했던 예빈시(禮賓寺)의 시장(柴場 땔 나무를 조달하는 산)이 있던 산이다. 지금의 예봉산이라 불리는 산은 이 예빈산의 큰 봉우리였는데 요즈음에는 예봉산과 예빈산을 따로 구분하여 부르고 있다.
검단산 쪽은 무기제조를 당담했던 군기시(軍器寺)의 시장(柴場)이 있었다. 1710년(숙종 36년)의 실록 기사를 보자. 도제조 이이명(李頤命)이 아뢴다. “듣건대, 광주(廣州) 도미진가 군기시(軍器寺) 시장(柴場)에 유황이 산출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금영(禁營)에서 유황을 많이 저축(儲蓄)하지 못하여 매번 군색함을 근심하니, 마땅히 본영(本營)에 주어 캐서 쓰게 하소서. (聞廣州渡迷津上軍器寺柴場, 有産出硫黃處云。 禁營不能多儲硫黃, 每患苟簡, 宜付本營, 俾爲採用). 임금께서 허락하셨다(上許之)“ 이렇듯 검단산에서는 화약의 원료로 쓰여 일본이나 중국에서 수입해 쓰던 유황이 산출되었다는 것이다. 그 곳이 어느 지점이었는지 궁금하다. 화약의 원료 유황이 산출, 일본·중국서 수입 이제 산으로 오르는 출발점이다. 버스정류장이 있다. 위례사랑길을 걷지 않고 버스로 올 사람은 검단산 입구에서 2번 버스를 이용하면 이곳에 닿는다. 버스운행 간격이 약 40분이라서 인내가 필요하다. 택시를 이용해도 5km 정도이니 그 편도 괜찮을 것이다. 산행길은 수자원공사 앞에서 출발한다. 등산안내판에는 정상까지 2.1km에 1시간 10분이라고 씌여 있다. 그 옆으로는 통일정사 900m 안내판이 서 있다. 통일정사를 들려가기로 한다. 상수원보호를 위해 설치한 감시초소를 지나면 길은 정상을 향하는 길과 통일정사로 향하는 길로 나뉜다.
통일정사는 고즈넉한 길 끝에 자리잡고 있다. 근세의 절로 건물도 일반 사가(私家)의 건물 모습을 하고 있다. 경내로 들어서자 먼저 만나는 것이 보각선사(寶覺禪師)의 승탑이다. 보각스님은 격동의 시기인 삼일운동 당시 이화학당에서 유관순 열사와 5년 룸메이트로 지낸 분이다. 유관순 열사의 기록은 보각스님의 증언으로 정리될 수 있었다 한다. 삼일운동에도 참여하였고 결혼도 하여 자식도 낳아 키운 분이다. 남편을 따라 기독교에서 개종도 하였는데 이승만 대통령 당시에는 불교정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으로 두 아들과 남북으로 헤어진 후 더욱 불교에 심취하다 출가한 분이다. 법당편액은 관음전이라 붙여 있다. 관세음보살 같은 젊은 비구니스님의 상호(相好)가 편안함을 안겨준다. 돌아 보이는 아랫녘으로는 고요한 한강이 풍경화처럼 펼쳐져 있다. 걸려 있는 주련(柱聯)도 잘 어울린다. 白衣觀音無說說(백의관음무설설) 백의 관세음은 說없이 說하시고 南巡童子不聞聞(남순동자불문문) 남순동자는 들은 바 없이 들었도다 甁上綠楊三際夏(병상록양삼제하) 꽃병에 녹색 버들 三世토록 여름이고 巖前翠竹十方春(암전취죽시방춘) 바위 앞 푸른 대(竹)는 온 세상 봄이로다 통일정사를 떠나 검단산 능선을 향해 오른다. 눈꽃이 가지마다 가득 매달려 햇빛 속에서 솜사탕처럼 빛난다. 비탈길 올라 드디어 능선에 도착한다. 119 안내목에 3.2 지점의 갈림길인데 유길준묘 등산로라고 쓰여 있다. 유길준묘에서 올라오는 능선길인 것이다. 정상까지는 0.98km, 애니메이션고에서는 2.54km라는 거리표지판도 서 있다. 유길준 선생은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최초의 국비 미국유학생이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들과는 뜻을 함께 했던 선구자였다. 미국과 서구의 견문을 서유견문(西遊見聞)을 통해 소개하였는데 시대를 만나지 못해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했던 분이다. 일본이 준 작위도 거부하였던 심지 굳었던 분으로 100년 전 이 나라의 안타까운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등산로 입구에 두 부인(경주 김씨와 충주 이씨)과 함께 합장되어(祔左, 祔右) 잠들어 계신다. 정상을 향해 능선길을 오른다. 준수한 자태의 소나무들에 첫눈이 가득 얹혔다. 전망대 지나고 억새동산 지나니 이윽고 정상에 닿는다. 정상은 헬기장으로 사용할 수 있게 시원한 평탄지로 고루어 놓았다. 정상석에는 산 높이를 657m로 기록해 놓았다. 검단산(黔丹山), 신성한 산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 온조왕조에는 관심을 끌만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온조왕이 도읍할 곳을 정하는 대목인데, “생각컨대, 이 하남 땅은 북으로는 한강을 띠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 남으로는 옥택을 바라보고 서로는 큰 바다를 격하였다(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隔大海)”는 내용이다.
백제의 성산 검단산, 조선 태종도 제사 지내 백제의 하남위례성을 정설로 굳어져 가는 풍납토성으로 보거나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하남 춘궁동으로 보더라도 동쪽으로 의지할 높은 산(東據高岳)은 검단산으로 비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여기에 온조왕 원년에는 자신들의 조상인 부여의 시조 동명왕을 모신 동명왕사당을 세우고(立東明王廟) 2대 다루왕(多婁王)부터 8명의 임금이 배알하였다. 아마도 검단산은 한성백제의 성산(聖山)이었을 것이다. 백제인들이 세웠다는 동명왕묘(東明王廟)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이처럼 신성한 산 검단산은 옛 광주의 진산(鎭山)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주 동쪽 7리에 있는데 진산이다(在州東七里鎭山)”이라 했고, 중정남한지에는 “동부면에 있는데 곧 고읍의 진산이다. 백제 검단선사가 거처하던 곳이다 (在東部面卽古邑之鎭山也 百濟僧黔丹禪師所居)“라고 하였다. 백제 24대 위덕왕 때의 고승 검단선사에 대한 이야기는 이처럼 전설로는 전해지나 역사적 기록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어 그 진위를 알기는 어렵다. 검단산에 신께 제사를 지낸 것은 백제만이 아니었다. 조선 태종 때도 검단산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내시 별감을 보내어 광주의 성황(城隍)과 검단산의 신(神)에게 제사지냈다. (遣內侍別監, 祭廣州城隍及儉丹山之)” 이처럼 검단산은 신성한 산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검단산에서 짐승을 쫓으면 비가 내린다 하여 그렇게 한 일이 성종실록에 남아 있으니 이래저래 검단산은 영험(靈驗)한 산이었던 것이다.(聞廣州檢丹山逐獸則雨 성종 1년 1470년) 이렇게 신령한 산이었건만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 고립된 왕을 구하러 온 강원도 근왕병(勤王兵)들이 이곳에 주둔했다가 참패를 당하기도 하였다. (江原道營將權井吉, 領兵到儉丹山, 擧火相應. 未幾, 爲賊所襲而敗) 검단산 신령님은 스스로 최선을 다하지 않은 임금은 구원할 의사가 없으셨던 것 같다. 검단산에는 짐승도 많았던지 태종과 세종 연간에 왕이 친히 사냥을 나온 기록도 여러 차례 남아 있다. 어찌 그것뿐이랴? 꽃도 아름다웠다. 강 건너 마재 땅에 사시던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이곳에 꽃구경한 일을 시로 남기셨다. 그 제목은 검단산 꽃구경(黔丹山賞花)이란 그림 같은 詩이다. 村小梨花白立(촌소이화백립) 작은 마을 배꽃 하얗게 피고 山深杜宇紅然(산심두우홍연) 깊은 산골 진달래는 붉어 徐從石磴樵路(서종석등초로) 돌비탈 초동(樵童)길 천천히 따라 還訪煙磯釣船(황방연기조선) 돌아와 안개낀 강가 낚시배 찾지. 두물머리로 모이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보인다. 다산 선생이 사시던 곳 마재마을도 고스란히 내려다보인다. 선생의 영혼이라도 저 강가 낚시배를 찾아 가신 것일까? 눈 덮인 능선길이 구불구불 용마산(龍馬山)으로 이어진다. 오후의 햇살이 눈길을 비춘다. 설레임 안고 그 길로 들어선다. 초겨울 발목까지 빠지는 눈 덮인 능선길이 가져다주는 기쁨은 걸어 본 사람만 안다. 걸어야 할 능선길은 약 3.7km. 2km 쯤 지나니 이정표에 고추봉(두리봉; 566m)이라고 적혀 있다. 지도상에는 두리봉인데 아무 표지 없던 이 봉우리에 누군가가 고추봉이라고 적은 안내지를 부착한 후 힘을 얻어 이제는 고추봉이 일반화 되고 두리봉이라는 본래 이름은 낯설어졌다. 1.6km 능선길 걸어 용마산(595m)에 도착한다. 경안천이 흘러오면서 강물과 합친다. 그 기슭에 분원(分院)마을이 보인다. 조선시대 백자기의 본고장이 있던 곳이다. 요즈음에는 매운탕과 붕어찜 고장이 되었다. 이제 길은 좌우 두 갈래로 나뉜다. 좌는 각화사(覺華寺), 우는 엄미리이다. 각화사로 내려간다. 1.5km 아래에 각화사가 있다. 옛 절터에 새로 세운 절이다. 법당 한 채와 요사채가 전부인 아담한 절이다. 옛 절 기둥을 받쳤을 초석들이 흩어져 있고 어느 스님의 사리탑을 받쳤을 받침대도 축대곁에 끼어 있다. 이름도 연대도 알 수 없으니 안타깝구나. 중정남한지에 검단산에 있었다는 이름만 남은 절 백종사(百種寺)는 또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뉘엿뉘엿 해가 진다. 걸음을 서둘러 삼성3리 버스정류장으로 내려간다. 교통편 천호역 6번출구 버스 환승 30, 30-1, 30-3, 30-5, 112-1, 34 ~ 하남 환승주차장 : 귀가시에 삼성3리 버스시간이 안맞으면 퇴촌 방면 삼거리로. 걷기 코스 환승주차장 ~ 산곡천 ~ 창모루 ~ 도미나루 ~ 배알미 마애불 ~ 아랫배알미 ~ 통일정사 ~ 검단산 ~ 용마산 ~ 각화사 ~ 삼성3리 버스정류장 ~ (퇴촌 방향 3거리 버스정류장)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