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2호 이상주 역사작가⁄ 2014.01.20 13:51:49
“신민(臣民)들이 술 때문에 덕을 잃는 일이 가끔 있는데 이를 고려의 풍조가 다 없어지지 않은 탓이다. 이는 매우 민망한 일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세종실록/15/10/28>
조선의 주신(酒神) 중 한 명이 세종 때의 학자 윤회다. 열 살의 어린 나이에 통감강목을 외운 그는 총명함과 민첩함으로 태종과 세종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일처리가 공명하고 진실했던 그에 대해 태종은 “학문이 고금을 통달했다. 세상에 보기 드문 재주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훗날 문신의 최고 영예인 대제학에 오른 그는 세자의 스승인 빈객도 했다. 그는 천성이 술을 즐겼다. 술로 인해 실수를 했고, 태종과 세종은 꾸짖고 경고했다. 하지만 천성이 바뀌지는 않았다.
세종 2년 종묘 추향대제 때 병조참의였던 그는 책보사 직책을 맡았다. 책보사는 국왕과 왕후의 시호가 적힌 책 등을 신실에 올리는 임무다. 술에 취한 그는 의례에 벗어난 행동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종묘대제는 태조와 임금으로 추존된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영혼을 모시는 경건한 의식이다. 신생국 조선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만백성에게 효와 충을 설파하기 위한 최고의 국가대사였다.
세종은 난감한 상황에서 “윤회는 술에 약하다. 취중의 일로 벌하기는 어렵다. 그를 불러서 책하리라”고 시간을 번 뒤 다음 날 “그대는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인데, 도에 넘치게 술 마시는 게 결점이다. 이제부터 과인과 상왕(태종)이 하사하는 술 이외에는 과음하지 말라”며 금주령을 내렸다.
윤회는 한동안 술을 자제했다. 그가 술 마시는 날은 상왕과 세종이 마련한 피로연 등이었다. 세종은 3년(1421년) 여름에 상왕을 모시고 송계원에서 매사냥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중량포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저녁까지 계속된 회식에서 몇 잔술을 한 윤회는 임금 앞에 나아가 즉석 시를 지었다. 절로 시가 나올 정도로 술이 반가웠던 것이다.
여름 밭두렁 산들바람에 보리 이삭은 길어지고
가을 들판에 빗물이 넘쳐, 벼꽃이 향기롭다
우리 임금 한 번 놀이로 삼농(三農)에 바라보니
시월 타작마당에 풍년 들리라
문학성과 재치가 돋보이는 윤회의 시에 상왕은 즐거운 얼굴이었다. 윤회는 술을 떼놓고는 흥이 나지 않았다. 대궐 연회에서는 술을 곧잘 입에 댔고, 구설수가 있으면 임금은 훈계를 했다.
하루는 세종이 베푼 주연에서 고주망태가 됐다.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 나갔다. 임금은 다음날 그를 불러 “석잔 이상의 술은 절대 마시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무리 주신이라 해도 어명은 어길 수 없다.
그는 묘안을 냈다. 잔이 아닌 사발로 마셨다. 취기는 더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가 큰 사고를 쳤다. 세자에게 공부를 가르쳐야 할 빈객(賓客)인 그가 술에 취해 서연(書筵)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불경죄에 해당됐다. 사헌부에서는 세자를 공경하고 마음을 삼가는 뜻이 없다고 처벌을 강하게 건의했다. 세종은 다시 윤회에게 경고로 마무리했다.
술에 대해 절제력이 강했던 임금은 15년(1433년) 10월 28일 음주대책 교지를 내린다. 주자소에서 인쇄해 서울은 물론이고 지방에도 반포해 만백성이 술의 폐해와 바르게 마시는 법을 알게 했다. 백성들에게 음주 교육을 한 것이다. 교지에서는 음주의 목적과 현실 그리고 음주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 음주로 인해 폐망한 나라나 인물을 소개하고, 절주를 한 사례도 적었다. 또한 조선의 정책과 현실을 말한 뒤 지켜야 할 당부의 내용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