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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 큐레이터 다이어리]판타지가 필요한 세상

미술작품은 삶을 고양시키는 도구로서 가장 좋은 판타지의 집적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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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72호 신민 진화랑 실장⁄ 2014.03.31 13:35:54

일요일 아침 상점이 즐비한 거리를 따라 여유롭게 걸었다. 아직 거리가 한산한 시간,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커피향이 코끝을 스치고 아직 닫힌 매장들의 쇼윈도에 비치는 내 모습을 힐끔 보며 걷는 순간 불현듯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평범한 순간 속에 존재하는 행복을 참 오랜만에 느꼈다.

그 동안 행복을 어디에 두었던 걸까. 특별한 순간에 행복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살아오지 않았나. 몽상 속으로 도피하며 행복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몽상을 꿈으로 여기며 살아왔을 지도 모른다. 이 둘은 엄연히 다르다. 꿈은 현실을 보게 하고, 그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좁혀나가기 위한 실천을 해나갈 때 의미가 성립된다. 이와 달리 몽상은 현실도피다. 필자 역시 현실이 힘겨울 때마다 잊기 위한 빠른 처방으로 몽상을 약으로 쓰곤 했다.

막연히 기분이 좋을 것 같은 상황, 내가 가져보고 싶은 능력을 발휘하는 상황을 설정하고 잠시 몰입해 보는 것이다. 갤러리 큐레이터가 자주하는 몽상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트페어 참가 시 자신이 선택한 작품들이 완판 되는 것? 세계 최고 작가의 전시를 유치하는 것?

판타지 드라마나 영화 혹은 소설이나 만화가 제공하는 허구에 빠져드는 일은 허황된 몽상, 현실도피의 극치이다.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불가능한 가상세계를 접하는 것은 허망한 일이지만 한편 상상력에 감탄하는 그 시간이 주는 에너지는 무시 못 할 요소다. 동심을 충족시키는 시간, 누구의 눈치도 아랑곳 않고 바보가 되어도 되는 시간, 순수해도 공격당하지 않는 시간, 재미없는 현실에서 일탈하는 시간으로서 의미가 있다.

얼마 전 종영한  SBS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폭발적 인기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시공을 초월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동화 같은 내용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김수현)은 멋진 외모에 똑똑하며 경제적 부까지 겸비한데다가 여자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마술처럼 나타나 해결해주는 초능력까지 지녔다는 점에서 여자라면 누구나 배우자로 꿈꾸는 완벽한 남성상이다.

여자주인공(전지현)은 괴팍하지만 아름답고 인간적인 여성상으로 여성과 남성모두가 좋아할 만한 캐릭터이다. 세속적으로 화려한 조건에 순수한 사랑까지 할 줄 아는 주인공들은 우리의 판타지를 기막히게 충족시킨다. 감정묘사가 꽤나 섬세하고 현실감 있게 그려져 있어 그저 우스운 허구로만 치부되지 않고 공감의 폭이 넓었다.

판타지 장르는 일부의 마니아들이 즐기는 편인데 이제 일반적인 대중들도 좋아하는 현상은 상상하는 행위, 황홀한 그 세계를 통해 치유를 하려는 욕구가 강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양하게 기획된 문화예술을 접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즐길 수 있는 능력이 향상된 것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북경 UCCA 크리스찬디올 전시 전경. 사진 = 왕진오 기자


판타지가 삶에 위트를 더하는 역할로 작용하면 다행이지만 현실을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 위험이 다분하다. 중독성 때문에 점점 빠져들면서 행복감을 느끼지만 깨어났을 때 현실이 더 초라하고 괜히 더 불행해진 기분이 드는 점에서 그렇다.

이와 달리 삶을 고양시키는 도구로서 가장 좋은 판타지의 집적체는 바로 미술작품이다. 보통 무력감은 허구 속 인물과의 비교를 통한 상대적 박탈감에서 비롯된다. 미술작품은 일단 비교할 대상이 없고, 그 앞에 선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경험을 제공한다.

작가의 의식세계와 무의식의 세계가 교차하며 생성된 현실너머의 새로운 세계. 작가도 분명하게 언어화하기 힘든 그 세계의 특성상 감상자는 자신이 직접 해석을 해야 하므로 능동적으로 온갖 감각세포를 활성화시키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고차원적인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 보는 황홀한 체험이 이루어진다.

그로부터 피로감을 느낄 수 있지만 끌려가다 허탈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 보다는 훨씬 건강한 일탈행위이다. 

예술가들의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는 몽상을 현실에서 하나의 물질로 만듦으로써 가치 있는 것으로 승화시키기 때문이다. 분노, 사랑, 환희, 절망 등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고 작업에 표출하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로저딘, Blue Demon.


예술가들의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

계속적으로 몽상에 충분히 빠져있을 수 있는 것은 다른 말로 감정적 욕망에 솔직하게 살아간다는 의미이고 이는 예술가들이 누리는 특권이다. 이 특권으로 인해 경제적으로는 배고파도 정신적 포만감은 크다. 육체를 위해 먹기만 할 뿐 정신에도 영양가 있는 식단을 마련하는 행위에는 무척 소홀한 일반인들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작품만큼 부질없는 것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영역이 또 있을까. 영혼을 살찌우기에 이만큼 맛난 밥도 없다. 현실도피를 약으로 할 것인가 밥으로 할 것인가는 선택의 몫이다. 약을 먹는 것은 진통을 완화시키는 단기 처방일 뿐 이전보다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밥은 순간 진통효과에 큰 작용이 없는 것 같아도 서서히 면역력을 높인다는 상식. 알면서도 놓치지는 말자. 밥이 보약이다.

현실을 부정하게 만드는 판타지는 약과 같다. 대신 삶의 순간을 고양시키는 예술의 판타지를 음미해보는 선택이 어떨까.

육신과 영혼의 건강이 균형을 이룰 때 살아 있음 자체가 행복임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 신민 진화랑 실장 (정리 = 왕진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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