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진료 동안 엄마는 소모임 활동…“과잉진료 없어요”
▲서울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사무국 식구들. 사진 = 안창현 기자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안창현 기자) 과도한 검사와 수술 등 과잉 진료에 비급여 진료와 항생제 남용까지…. 환자들은 늘 불안하다. 진료시간에 의사에게 자신의 상태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고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기도 힘들다. 한국에서 시민들이 체감하는 의료서비스의 현실은 이렇지만, 환자가 병원의 주인인 협동조합이라면 어떨까?
환자를 우선하는 진료와 문턱 낮은 병원을 추구해온 서울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은 2002년 설립된 의료 협동조합이다. ‘병원은 의료진 고유의 영역’이란 생각에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일반 시민들이 모여 만들었다. 조합원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위원회, 지역모임과 소모임 등을 통해 조합원 의견을 수렴하며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병원, 과잉진료가 없고 환자가 주인인 병원을 찾아가봤다.
“과거 다니던 치과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치료가 끝나자마자 병원 측이 갑자기 덧니 교정을 추가로 하라고 권했다. 은근히 강요하는 분위기였다.”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무료 건강 진단행사. 사진 = 서울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세 아이의 엄마인 김명희 씨(42)는 이제 서울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 조합원이 된 뒤 이런 불쾌감을 느낄 일이 없다. 그녀는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병원인지라 과잉진료 같은 것은 안 하고, 아무래도 신뢰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의료협동조합 병원에 들어서면 ‘환자권리장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환자가 병원에서 질병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듣는 것은 물론, 치료 과정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듣고 적절한 치료를 환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내용이다.
기본적으로 병원이 이윤 추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역 주민의 건강 증진을 목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우리네한의원’은 값비싼 한약을 권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부분 한의원에서 권하는 보약 대신 생활습관 개선 등 근본적인 해결책을 실천하도록 알려주기 때문이다.
서울의료협동조합의 정미숙 사무국장은 “오히려 환자가 왜 보약을 못 먹게 하냐고 화를 낼 정도”라며 웃었다. “병원에서 환자를 충분히 배려하니 다들 좋아하신다. 한의원의 경우 원장님이 9년째 근무 중이라 환자와 의사 간에 신뢰가 쌓였다. 환자가 오랜만에 병원을 찾아도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잘 알기에 마치 주치의처럼들 느끼신다.”
의료 관련 협동조합이 만들어진 계기는 평소 의료서비스에서 환자들이 겪는 불편함 때문이었다. 협동조합 설립 초기부터 참여한 정 사무국장은 “그때는 병원들에 보이지 않는 문턱이 있다고 느꼈다. 시간에 쫓기듯 진료를 받고, 내 상태에 대해 자세히 알 수도 없었다. 주치의를 대하듯 좀 편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며 협동조합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마침 경기도 안성에 의료생활협동조합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1년 정도 준비기간을 거쳐 2002년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서울의료소비자생활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우리네노인복지센터’ 방문요양 모습. 사진 = 서울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뿐 아니라 지역사회에도 공헌
협동조합에서는 조합원들의 출자금과 증자를 통해 ‘우리네한의원’을 먼저 개원하고, 이후 ‘우리네치과’와 ‘우리네노인복지센터’의 문을 차례로 열었다.
협동조합의 병원은 비조합원들도 이용할 수 있다. 일반 생활협동조합은 조합원들만 이용할 수 있지만 의료 분야의 협동조합은 그 성격상 병원에서 환자의 진료를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조합원의 이용 비중이 50%를 넘는다. 정 사무국장은 “조합원에게는 보험 적용이 안 되는 비보험가 본인부담금의 10%를 조합에서 지원하고, 예약진료나 건강검진 프로그램 등 다양한 혜택이 주어진다. 한의원의 경우 조합원 이용률이 55% 정도이고, 치과는 70%가 넘는다”고 말했다.
현재 전체 조합원은 2200여 세대로, 어느 정도 안정적 기반을 갖췄다. 설립 초기부터 어려운 고비가 많았지만, 정부 등의 보조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경영을 개선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합원들의 꾸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용과 출자가 끊이지 않았던 점도 컸다.
정 사무국장은 “조합원들은 주로 인근 주민들이지만, 서울의 다른 지역이나 경기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병원이 교통이 편리한 장소에 있기도 하지만, 서울에 처음 생긴 의료 협동조합이라 멀리서 찾아와 가입하는 사람도 꽤 된다”고 전했다.
협동조합이라고 조합원들만을 위해 활동했던 것은 아니다. 협동조합 사무국의 허은구 팀장은 “처음에는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기 전이라 생활협동조합 개별법에 따랐다. 이는 소비자를 위한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의 형태였다. 하지만 우리는 의료 소비자뿐 아니라 의료진, 조합직원과 자원활동가, 나아가 지역주민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위한 협동조합의 성격이었다.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 제정 이후에 사회적협동조합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협동조합 내 ‘어린이 미술 특강’ 소모임. 사진 = 서울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서울의료협동조합은 조합원뿐 아니라 지역주민들이 소득 수준을 떠나 누구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다양한 보건활동과 건강 증진교육, 경제적 취약계층을 위한 복지교육 등을 시행하고 있다. 따라서 취약계층 진료비율이 평균 20~30% 이상으로, 다른 병원보다 상당히 높은 편이다.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우리네노인복지센터’도 마찬가지다. 허 팀장은 “지금처럼 장기요양보험제도가 자리를 잡기 전에 일자리창출사업의 일환으로 노동부 지원을 받아 2004년 노인 방문요양사업을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정부 지원이 끝나면서 인건비 부담 등으로 운영이 쉽지 않았지만, 서울의료협동조합은 노인복지센터를 계속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현재는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에 따라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장기요양 1, 2, 3등급의 판정을 받은 어르신이나 돌봄이 필요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요양보호사의 방문요양 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 외에도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한 무료 건강체크 행사를 개최하고, 장애인 사랑 나눔의 집 등을 후원하는 등 다양한 사회적 기여 활동을 조합원들과 함께 진행하고 있다.
조합원 건강과 함께 지역주민 건강까지 돌봐
건강에 생활까지 돕는 따뜻한 공동체 지향최근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하듯 대학에서 수업의 일환으로 개설하는 ‘직업 체험’ 시간에 학생들이 일반 기업이 아닌 사회적경제 관련 단체에 지원하는 경우도 많다. 서울의료협동조합에선 한신대 학생들이 지난 4~5년 간 직업 체험 과정을 받았다.
한신대 허성빈 학생은 서울의료협동조합에서 직업 연수 과정을 마치며 “의료협동조합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탓도 있었겠지만 조합 사무국에서 하는 일은 막연히 협동조합을 위한 사무적인 부분만을 담당하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각종 소모임과 대외활동이 활발해 놀랐다. 실무자와 조합원의 거리가 굉장히 가까웠고, 협동조합에서 적극적으로 소모임과 대외활동이 이뤄졌다”며 자신의 경험을 말했다.
“한의원이나 치과에서의 진료 활동도 중요하지만, 조합원들에게 다양한 참여의 기회를 줘 조합원 스스로 삶의 질을 높이고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가정주부인 김명희 씨가 협동조합을 처음 알게 된 것도 소모임 활동 때문이었다. “아이들 피부가 굉장히 건조했는데, 지인을 통해 우연히 협동조합 내 ‘천연 화장품 만들기’ 소모임을 알게 됐다.”
지금은 화장품 소모임 외에 ‘어린이 발레단’ 소모임과 ‘반찬 만들기’ 소모임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녀는 “아이들이 발레를 배우는 동안 엄마들끼리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반찬을 만들어 집에 가져가자는 생각에 다른 엄마들과 반찬 소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대의원 총회. 사진 = 서울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서울의료협동조합에서는 고양, 관악, 구로, 금천, 대림, 동작, 양천, 영등포 등 여러 지역모임과 요가, 영화, 댄스, 배드민턴, 예쁜글씨 등 10여 개가 넘는 다양한 소모임이 진행된다. 또한 교육위원회, 보건위원회, 조직위원회, 경영위원회 등을 통해 조합원들이 적극적으로 조합 운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정 사무국장은 “조합원으로 가입하는 경로는 다양하다. 그런데 친분 관계가 있어 오시는 분들이 아니면 처음에는 조합 활동에 적극적이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럴 때 조합 내 소모임 활동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꼭 진료받기 위해 오지 않아도 협동조합에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지금은 사무국이 잘 정리되어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무실이 꼭 개척교회 같다며 우리끼리 웃었다. 작년에 사무국 공간을 확장해 소모임 공간을 따로 만들었고, 조합원들의 소모임 활동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현재 소모임 활동은 협동조합 내에서 조합원들이 단지 취미활동을 함께 하며 친목을 도모한다는 것 외에 지역 공동체의 소통 장소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다.
일본엔 종합병원급 의료협동조합 있어
일본은 협동조합의 역사가 깊고, 지역주민들의 참여도 높다. 허 팀장은 “일본은 오랜 역사와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어 한국의 의료협동조합들이 가서 배워올 점이 많다. 우리도 작년에 한번 다녀왔다. 6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며 일본 협동조합들은 거의 종합병원 급의 의료기관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지역 주민의 30~40%가 그 지역 협동조합에 가입되어 있는 만큼 주민들에게 큰 신뢰도 받고 있다. 협동조합이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해결해주지 못하는 부분들을 잘 대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서울의료협동조합도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다. 어린이 보육시설부터 양로시설, 장애인 재활시설까지 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지역 주민들의 건강에 대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의료 단체가 되는 것이다.
정 사무국장은 “어느 날 친한 조합원 언니가 찾아오더니 나한테 협동조합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뜬금없이 물었다. 왜 그러냐니까, 앞으로는 협동조합 밖에 살 길이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의외였다”고 말했다.
“요즈음 사회가 너무 힘들고, 공유경제니 사회적경제니 대안적인 경제 모델을 찾으려는 움직임들이 있지만, 협동조합을 시작한 것은 그런 원대한 사명감이 있었다기보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좋아서였다”며 정 사무국장은 “좋은 사람들과 마음에 맞는 무언가를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이 협동조합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허 팀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초기에 어려운 시기를 거치며 단체가 안정화되기까지 꾸준히 조합원들이 늘어갔다. 결국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모여 현실의 어려움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사람의 힘에 의해 이끌어지기보다 다 함께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성취감이 크다. 느리게 보일 수도 있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맞춰가며 함께 가고자 하는 방향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것, 그것이 협동조합의 힘이고 협동조합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바탕인 것 같다.”
‘서울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 조합원이 되려면?
협동조합의 설립취지에 동의하는 누구나 가입할 수 있다. 각 의료기관, 조합사무국,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가입원서를 작성하고, 출자금 5만 원(5구좌 기준. 1구좌에 1만 원) 이상과 가입비 1000원을 납부하면 조합원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조합원이 되면 ‘우리네치과’와 ‘우리네한의원’을 조합원 자격으로 이용할 수 있다. 조합원은 예약이 가능하고, 비보험 치료에도 본인부담금의 10% 할인이 된다. 조합 내 여러 소모임에도 참여할 수 있다. 조합원 가족(등본상의 가구원)은 조합원과 같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문의: 02-848-2150,
www.medcoop.org)
안창현 기자 isangahn@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