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면의 세계 뮤지엄 ③ 토리노 영화박물관]역시 이탈리아! 건물도 전시도 멋넘쳐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이상면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연구교수) 이탈리아 토리노(Torino)에는 아주 특별한 영화박물관이 있다. 공식 명칭은 국립영화박물관(Museo Nazionale del Cinema/National Museum of Cinema)으로, 거창한 건물 안에 있어서 건축물과 함께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이다.
토리노는 인구 90만 명 정도의 도시지만 주변을 합하면 약 170만 명이고, 피아트 자동차 회사가 있는 산업 도시이자 많은 화랑과 극장ㆍ오페라ㆍ박물관 등이 있는 문화예술 도시이기도 하다. 밀라노에서 출발하면 특급열차로 1시간 15분 정도면 토리노 중앙역에 도착한다. 중앙역 정문으로 나와 북쪽 방향으로 약 20분 정도 곧바로 걸어가면 영화박물관의 특색있는 건물이 이미 보인다(주소 Via Montebello 20).
사각형 천정과 뾰족하게 솟은 첨탑이 있는 이 건축물의 명칭은 몰레 안토넬리아나(Mole Antonelliana)이며, 1889년 토리노의 건축가인 안토넬리 부자(父子)에 의해 완성되었다. 높이 167.5m로 당시 유럽에서 벽돌 건물로는 가장 높았다고 한다. 이 건물은 본래 유대교 회당으로 지어졌지만, 완공 전에 유대교 단체는 건물을 토리노 시에 매각해 그 후 토리노 시가 관리했으며, 오늘날까지 도시의 명물(landmark)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건물에 영화박물관이 자리 잡은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박물관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 사진 = 토리노 영화박물관
본래 토리노 영화박물관은 1953년에 다른 곳에서 개관했지만, 건물에 안전 문제가 생겨 1985년 폐관하고, 1992년 국립영화박물관재단이 설립돼 새로운 준비를 하다가 2000년 이 건물에 자리 잡게 되었다. 박물관은 총 5층 구조와 3200㎡ 면적에, 르네상스 이후 발달한 많은 근대 영상기구를 비롯해 2만 점 이상의 영화 관련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스펙터클 체험 같은 관람
정문 입구를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1층 전시실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전시 공간은 사각형 건물의 테두리에 배치해 놓았고, 가운데는 비어 있다. 4각형의 건물 테두리에는 영화 속 무대장치들이 보이고, 위로는 시원하게 뻥 뚫려 있어 돔 천정이 높이 보인다. 이따금씩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도 보인다. 이런 독특한 구조는 설계자의 ‘수직적 꿈’(vertical dream)이 실현된 결과라고 한다. 이런 내부는 대성당 같은 인상을 주는데, 1층은 신전(神殿, Temple Hall)이라고도 불린다.
▲1889년 지어진 유서깊은 건물에 토리노 영화박물관은 들어가 있다. 사진 = 위키피디아
1층의 한쪽 벽면 가운데에는 거대한 조형물이 있는데, 초기 무성영화 시대에 이탈리아의 서사영화 ‘카비리아’(Cabiria, 1914)에 나오는 형상이다. 무성영화의 1차 황금기였던 1910년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폼페이의 최후’, ‘쿠오바디스?’ 같은 여러 대형 서사물이 제작되며 세계 영화를 주도한다. 할리우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니 이 조형물은 이탈리아 영화사에서 영광스러운 시대에 나온 영화의 일부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조형물 좌우에는 2개의 대형 스크린이 있어 여러 영화들의 짤막한 장면들이 보여지고, 관람객들은 붉은 의자에 누워 영화를 보는 동안 공간 분위기는 주변 조명에 따라 변화돼 다채로운 환경이 연출된다.
전체 5층 구조인 내부 공간에서 본격적인 전시실은 2~4층에 있다.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면 ‘영화의 고고학’(Archaeology of Cinema)이라는 입구에 눈을 끄는 문구가 있는데, 괴테의 문장으로 “나는 보기 위해 태어났다. …”라고 한다. 인류 문화에서는 시각 문화가 중요하며, 20세기에는 그 중심에 영화가 있었다. 2층 전시실에는 영상의 시초였던 그림자극이 먼저 나타난다. 이는 11세기 이후 인도네시아와 중국 등 아시아에서 먼저 시작돼 17세기 유럽에 전파돼 성행했다.
▲영화 전시실의 컬러풀한 모습. 사진 = 토리노 영화박물관
그리고 곧바로 최초의 영상 기구였던 카메라 옵스쿠라(camera obscura)실이 나타난다. 이 기구를 통해 외부 세계의 像(image)이 반대편 벽면에 맺히는 원리를 관람객에게 직접 보여주고 체험시키기 위해 독자적인 공간을 만들었다(카메라 옵스쿠라에 대한 이론은 과학이 먼저 발달한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누워서 감상하는 영화관
다음에 나타나는 것은 18-19세기 동안 영상 그림을 보여주며 유럽의 많은 민중-시민들의 즐거운 오락거리가 되어주었던 영상그림 상자(peep-box)들이다. 다음에는 18세기 말경 처음으로 영상을 벽면에 투영하는 것을 실현시킴으로써 실내 공간에서 다수의 영상 관람을 가능케 해주었던 마술환등(magic lantern)이다. 전시물 옆 공간에는 전기로 불빛을 밝히는 현대식 마술환등 기구들을 설치해 놓고 당시의 유리 슬라이드들을 벽면 스크린에 비춰 보여준다. 옛날 마술환등 영상은 오늘날의 영상과는 달리 느리게 바뀌지만 매우 따뜻하고 낭만적이어서 우리를 잠시 과거 시대로 이끈다.
▲1층의 두 스크린. 사진 = 토리노 영화박물관
다음으로는 19세기에 이루어진 동영상과 사진술의 발전 과정이 나타난다. 1820년대 이후 연속적인 이미지가 움직임으로 인식되는 것을 보여주었던 기구들인 회전 그림과 회전 원판, 회전 원통이 있다. 그리고 19세기 중반 다게르 타입 사진술의 발달 이후 △1870년대 코닥의 회전 필름 등장 △1880년대 연속 촬영술의 발달에 이어서 에밀 레노의 움직이는 그림(動畫, 애니메이션)의 시작(1892) △뒤이어 에디슨, 뤼미에르에 이르러 회전 필름을 이용하는 영화의 출현(1895)이 있었다. 여기에 오면 뤼미에르의 촬영기-영사기인 시네마토그라프 원형도 볼 수 있다.
다시 계단을 올라가서 3-4층으로 가면 이제 영화 전시실이다. 여기로 가는 복도 천정에는 대형 포스터들이 걸려 있다. 20세기 전반 독일, 프랑스, 미국의 무성영화들뿐 아니라, 1940년대 후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작품들이 보이고, 1960년대 이탈리아의 거장 감독들인 로셀리니, 데 시카, 펠리니, 베르톨루치, 안토니오니, 서부 영화를 만든 세르지오 레오네 등의 영화 포스터들도 보인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유명한 세계 영화들의 스틸 사진, 의상과 소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누워 보는 영화관 옆의 장식물도 대단하다. 사진 = 토리노 영화박물관
이렇게 화려하고 요란하게 장식된 전시 공간들을 돌아다니며 흥미진진한 전시 관람을 마치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가면 카페마저 특별하다. 카페에는 약간의 어둠 속에서 푸르고 노란 조명이 테이블과 바 쪽으로 비춰지는데, 분위기가 흡사 영화 촬영장 같다. 관람객은 거기서 차 한 잔 마시는 동안 영화배우가 된다.
지하카페에 들어가면 내가 바로 영화배우가 된 듯
다시 1층으로 가면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 투명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깥을 내다보며 59초 동안 75m를 올라가 바깥 풍경을 보면 토리노의 주변 10km 이상 반경이 시야에 들어오고, 북쪽으로 봉우리에 눈이 쌓인 알프스도 보인다.
▲카메라 옵스쿠라를 체험하게 만든 공간. 사진 = 토리노 영화박물관
토리노 영화박물관에는 단체로 오는 아동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차세대에게 영상의 원리를 설명해주고, 영상예술에 대한 흥미를 일깨워주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건물 바로 옆의 별도 건물에서는 영화제가 열린다.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매년 11월 하순에 열리는 토리노 영화제다. 베니스 영화제에 이어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영화제로, 유럽의 작가 영화와 아시아-남미 등지의 영화들이 출품된다.
▲자료실 창 너머로 건물의 멋진 내부가 보인다. 사진 = 토리노 영화박물관
이렇게 토리노 영화박물관은 단순한 박물관 관람 이상의 체험을 하게 해준다. 이런 특별한 영화박물관이 탄생하기까지에는 한 여성 문화사학자의 각별한 노력이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영화 매체의 문화적 가치와 교육적 가능성에 매료된 마리아 아드리아나 프롤로(Maria Adriana Prolo, 1908~91년)는 1930년대 말 이후 영화를 연구하고 영화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며 영화박물관 설립에 앞장섰다. 박물관 설립 같은 거대 프로젝트의 뒤에는 이런 인물들의 노력과 열정, 또 그것을 인정하고 기릴 줄 아는 지자체 정부의 지원과 문화행정적 노력이 있었음을 간과하면 안 될 것이다. 토리노 영화박물관 웹주소는
www.museonazionaledelcinema.it.
(정리 = 최영태 기자)
이상면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연구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