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뮤지엄 - 타이완] “문화가 정치다” 보여주는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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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글·김영애(이안아트컨설팅 대표)) 최근 중국과 타이완의 정상이 싱가포르에서 가진 만남이 화제가 되고 있다. 분단 66년 만의 양국 정상 만남이기 때문이다. 시진핑 주석과 마잉주 총통은 서로를 ‘선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상대 국가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이 성장함에 따라 홍콩의 중국 반환 문제에 이어 이제는 타이완과 중국의 관계가 초미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주변국들은 자국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타이완의 뮤지엄은 바로 이 양안관계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루브르 박물관, 대영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이어, 세계 4대 뮤지엄의 하나로 손꼽히는 대형 박물관이다. 소장품이 무려 69만점에 이를 정도라고 한다.
모든 소장품을 다 관람하려면 8년이나 걸리고, 따라서 3개월에 한 번씩 소장품을 교환하고 있다. 이토록 많은 보물들이 타이완에 모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본토인들이 찾는 박물관이니까
중화민국의 설립은 1949년 12월 장제스 주석이 이끄는 국민당이 중화민국 정부를 중국으로부터 타이완으로 옮기면서 시작된다. 중국 본토에서는 마오쩌뚱이 이끄는 공산당에 패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베이징을 중심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고 공산화를 추진한다. 하나의 중국이 본토와 타이완으로 나뉘는 순간이다. 국민당 정부가 중국에서 타이완으로 본부를 옮길 때 200만 명의 본토인도 함께 넘어왔지만, 그들의 문화재도 함께 가지고 왔다.
바로 국립고궁박물관의 시작이다. 본래 이 박물관은 1925년 베이징에서 시작되었지만 1931년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함에 따라 언제든지 소장품을 옮길 수 있도록 상자에 담아 보관하며 피난 준비에 들어갔다. 전쟁 중에도 일부를 런던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출품하기도 하는 등 몇몇 전시회가 개최되기도 했지만, 일본군의 침략이 계속됨에 따라 소장품은 난징, 상하이를 비롯한 안전한 남쪽 지역으로 흩어졌다.
1945년 일본군이 물러나면서 난징의 분원으로 되돌아온 소장품들은 다시 1948년 국공내전이 심화됨에 따라 국민당의 지휘에 따라 타이완으로 옮겨진다. 현재의 박물관은 1965년 모든 소장품을 한 자리에서 전시하기 위해 새롭게 지어진 건물이다. 쑨원(손문, 1866∼1925)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966년 문을 열었다.
루브르엔 모나리자, 고궁박물관엔 취옥백채
국립고궁박물관에 도착하면 쑨원의 휘호 ‘천하위공(天下爲公)’이 쓰인 문이 입장객을 맞이한다. ‘천하가 한 집의 사사로운 소유물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결코 군주 일인의 천하가 될 수 없다는 정치적 의미로 해석된다. 1911년 신해혁명의 구호가 됐다. 이로써 청나라는 사라지고, 현대 중국이 성립되면서 중국도 타이완도 모두 그를 국가의 아버지로 생각하는 연원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을 지칭하는 ‘중산박물관’이라는 이름도 쑨원의 호 ‘중산’에서 따온 것이다.
▲타이완 고궁박물관의 입구 모습. 사진 = 김영애
박물관 내부는 서예, 회화, 청동기, 도자기, 옥기, 완상품, 직물, 도서문헌 등 다양한 소장품을 종류별로 시기별로 구분하여 두고 있다. 그 중에서도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은 3층 도예관 ‘취옥백채’가 있는 곳이다. 루브르에 모나리자가 있다면 타이완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취옥백채가 있다고 할 정도로, 이 관의 내부는 마치 비행기 탑승객들을 줄 세우듯, 작은 전시공간 내부에도 한 줄로 걸어갈 수 있도록 칸막이가 나뉘어져 있다. 대부분의 박물관 기념상품도 취옥백채와 관련돼 있다.
작품의 의미와 관련해 본래의 정설 외에도 다양한 야사가 존재한다. 문화재를 통한 스토리텔링 마케팅도 압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방문한 고궁박물관에서는 청나라 시대 이탈리아로부터 중국을 방문한 선교사의 기획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바로 ‘낭세녕(郎世寧)’이라는 중국 이름까지 하사받은 주세페 카스틸리오네(Guiseppe Castiglione, 1688∼1766)이다.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으로, 27세에 선교사 자격으로 중국에 파견됐다.
그는 또한 뛰어난 화가였으며 중국에 남아 생을 마칠 때까지 궁정화가로 50여 년을 지내면서 수많은 그림을 남겼다. 원근법과 건축 기술을 중국에 전파했다. 비단 위에 동양 채색화로 그려진 정교한 세밀화는 일찍부터 시작된 동서 문물 교류의 시작을 보는 듯하다. 덕분에 그의 소식이 서구에 알려지고 중국의 문물이 전파되면서 유럽에서도 ‘쉬느와즈리’라고 불리는 중국 취향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꽃보다 문화재”
‘꽃보다 할배’에도 등장한 타이완 고궁박물관. 그래서인지 한국 관광객도 많이 방문하고, 한국어로 된 오디오 가이드도 마련되어 있다.
고궁박물관은 점점 늘어나는 관람객과 소장품의 전시를 위해 현대식 건물의 분관을 건립 중이며 올해 12월 시범관람을 시작할 예정이다. 박물관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이들은 바로 중국인 관광객들이다. 타이완, 홍콩에서 온 사람들도 있겠지만 중국의 각 지방에서 온 노년층의 관람객들이 대다수다. 그들에게는 소장품의 미적 감상도 흥미로운 부분이겠지만 마오쩌뚱과 장개석, 쑨원 등 인물과 얽힌 중국 근대사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들을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방문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이 이탈리아 작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을 소장한 데 격분한 한 이탈리아남성이 작품을 고국에 되돌려주겠다는 잘못된 애국심으로 도난사건을 벌인 것이 1911년이다. 수많은 중국 보물이 전시되어 있는 타이완에서, 그 작품들을 보러 온 중국 본토인들의 감정이 어떠할지 자못 궁금해진다.
정치와 경제 못지않게 막강한 힘을 지닌 것이 바로 문화임을 보여주는 고궁박물관. 박물관의 주요 미션 중 하나도 양안관계 전략이다. 중국과 타이완 간의 관계개선을 위한 다양한 협력 전시회가 열리는 이유다.
(정리 = 왕진오 기자)
김영애(이안아트컨설팅 대표)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