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0년대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추상회화가 유행을 휩쓸었던 시기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최근의 국내·외 미술계는 그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사조로서 단색으로 이뤄진 추상화에 주목했고,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의미의 거대한 물감 덩어리들을 많이 보게 됐다.
하지만, 이런 물감 덩어리들이 행위의 흔적이라는 사실에 근거해, 마치 추리 게임을 하듯, 작업을 하던 작가의 상태를 유추해보면 어떨까. 단색 추상화는 작가의 철학이나 개념의 증거일 뿐 아니라, 감정의 흐름과 억제 그리고 개인의 성향을 가감 없이 드러낸 결과물일 수도 있다.
리안 갤러리에서 현재 열리고 있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오베르텡(Bernard Aubertin)의 전시는 앞서 얘기한 추리 게임 즐기기에 적합하다. 오베르텡 역시 60~70년대 청년 시절을 보내고 물질성과 정신성에 대해 씨름했던 작가다. 1957년 이브 클라인(Yves Klein)과의 만남이 작품의 정체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전해진다.
그의 최근작 위주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선 빨간색과 검은 색의 단색 평면회화와 일렬로 늘어선 길고 두꺼운 물감 덩어리 및 못으로 가득 채운 캔버스 등을 만날 수 있다.
감상 포인트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색이며, 다른 하나는 행위다. 작품들의 주요 색깔인 빨강과 검정은 생명과 죽음, 에너지와 에너지가 사라진 후, 태초의 원시성 등을 상징한다. 그리고 촘촘하고 가지런하게 못을 박는 행위와 흩뿌리지 않고 고요하게 물감을 짜 내린 흔적 등에서 그가 화면 안에 담고자 했던 에너지가 어떤 것인지 유추해보는 재미가 있다.
한편, 이번 전시는 의도치 않게 오베르텡의 한국 첫 개인전이자 유작전이 됐다. 갤러리 측은 이번 국내 첫 전시를 앞두고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갤러리 측은 “오베르텡은 자신의 작업이 끝난 상태가 아니라 언제든 다시 행위를 시작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하는 화면으로 보여지길 원했다”며, “지난 60년간 작가의 손을 떠나지 않았던 붉은색 모노크롬의 힘을 엿볼 수 있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서울 전시에서는 프랑스에서 오랜 시간 오베르텡의 전시를 기획-관리 하던 디렉터 쟝 브롤리(Jean Brolly)가 전시 오픈과 함께 작고한 오베르텡을 대신해 불을 사용한 작업 과정을 퍼포먼스 형식으로 재연했다. 전시는 4월 2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