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안창현 기자) 집에 들어오자마자 TV를 켜는 이유는? 유현준 건축가는 이 질문에 건축학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마당이 없으니까.” 아니, 집에 마당이 없어서 TV를 켠다고? 마당 없는 거랑 TV 켜는 게 무슨 상관이지? 이런 반문에 대한 유 건축가의 대답은 이렇다. 마당은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변화는 자연스럽다. 그런데 더 이상 우리들의 집에는 마당이 없다. 온통 적막한 실내뿐이다. TV를 켤 밖에.
2016년 서울 생활의 한 단면이다. 인구 1000만이 사는 거대도시. 아파트와 고층빌딩 같은 사적 욕망의 공간은 늘어나는 반면,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교류의 장인 마당이나 공원, 광장 등 공적 공간들은 사라져간다. 유 건축가는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서울이 우리에게 편한 공간일 수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건축적으로 아름다운 도시라고 할 수는 없다”고 진단했다. 최근 그는 KBS 강연 프로그램 ‘명견만리’에 출연해 서울을 비롯한 현대 도시에 대한 건축가로서의 생각을 들려줬다. 우리는 어떤 도시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인 그를 학교 연구실에서 만났다.
먼저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가 있다. 센트럴 파크와 함께 뉴욕 시민의 사랑을 한껏 받고 있는 공원이다. 미국 맨해튼의 서쪽에 위치한 거리 1.6㎞, 높이 9m의 고가공원으로, 흔히 도시재생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이곳은 원래 뉴욕 주위를 순환하며 화물 수송을 담당했던 철도가 지나던 자리였다. 하지만 미국에 자동차가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급부상하면서 서서히 운행이 중단되다 1980년 이후 폐쇄됐다.
▲뉴욕 시민들의 도심 속 쉼터, 하이라인 파크. 사진 = 위키미디어
흉물이 된 철로를 보존할지 아니면 재개발할지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러다 뉴욕 시민들을 위한 공공 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시민단체가 만들어졌고, 2004년부터 뉴욕시의 후원을 받아 공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800 x 800 vs. 250 x 60
하이라인 파크는 이제 옛 철도 노선에 산책로를 조성하고, 낡은 창고와 건물을 활용해 갤러리 등 문화시설을 만들어 과거 뉴욕의 모습도 느낄 수 있는 공원이 됐다. 시민들의 관심으로 버려진 철로가 도심 속 훌륭한 쉼터로 탈바꿈한 것이다. 하이라인 파크는 서울역 고가도로 공원화 사업이 벤치마킹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시민들이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열린 ‘서울 밤 도깨비 야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유현준 건축가는 우선 서울역 고가도로와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는 여러 면에서 서로 다르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하이라인 파크는 오랫동안 버려진 땅이었고, 서울역 고가는 얼마 전까지 수많은 자동차들이 오간 도로였다.
하지만 도시 공간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보행자를 우선 배려하는 관점은 긍정적이라고 그는 평가했다. 무엇보다 좋은 도시는 사람이 걷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울은 지금껏 너무 보행자가 아닌 자동차를 중심으로 도시를 만들어왔다는 판단에서다. 유 건축가는 뉴욕 맨해튼과 서울 거리의 차이를 한 블록의 모양으로 설명했다.
“서울과 뉴욕은 모두 격자 구조를 하고 있다. 또 도시가 고밀도 상태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도로에서 한 블록의 크기와 모양이 서로 다르다. 서울은 대체로 가로 800m, 세로 800m 크기의 블록들로 이뤄졌다. 반면 뉴욕 맨해튼은 서울 블록을 가로로 접은 형태다. 평균적으로 가로 250m, 세로 80m 정도다.”
이런 차이는 뭘 만들어낼까? 유 건축가는 도시를 걷는 사람이 이런 블록 구조에서 서로 다른 풍경의 변화를 느낀다고 말했다.
서울처럼 블록 형태가 정사각형으로 돼 있다면, 보행자는 굉장히 심심한 도시 풍경을 볼 수밖에 없다. 가로로 걷든, 세로로 걷든 느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뉴욕 맨해튼처럼 블록이 직사각형 형태로 돼 있으면 느낌이 달라진다.
“뉴욕에서 한 블록의 가로 길은 스트리트(street)라고 부르고, 세로 길은 애비뉴(avenue)가 된다. 그런데 사람이 뉴욕의 스트리트를 걸을 때와 애비뉴를 걸을 때 도시 풍경이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한 블록의 가로, 세로 길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시속 4㎞의 속도로 걷는다고 할 때 한 블록의 스트리트를 걷는 데 4분 정도가 소요된다. 반면 애비뉴는 대략 1분 정도가 걸린다. 소요되는 시간이 스트리트가 4배 정도나 길다. 그렇다면 애비뉴보다 스트리트가 더 단조롭고, 보행자는 더 지루하다고 느끼게 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주로 애비뉴를 따라 걷는다. 애비뉴가 더 걷고 싶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로 길인 뉴욕의 애비뉴는 햇볕이 더 잘 들고, 1분마다 새 블록이 나타나며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서울이 지금 같은 정사각형 도로망이 아니라 뉴욕과 같은 직사각형 격자 구조를 가졌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걷고 싶은 도시로 느꼈을 것이다.
걷고 싶은 거리로 도시의 활기를
유 건축가는 서울의 주택 집들이 마당이나 테라스 등 외부공간을 없애고 전부 내부로 대체하면서 단조로운 모습을 보인다고 판단했다. 인구의 60% 이상이 아파트에 사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는 공원이나 광장 등 공적 교류와 소통의 공간이 사라져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지난 2014년 44년 만에 개방한 서울역 고가. 사진 = 연합뉴스
그는 서울에서 가장 좋은 공간으로 한강 시민 공원을 꼽았다. “역설적으로 감시를 많이 당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강 시민 공간은 밤에도 산책을 즐기고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훌륭한 공적 공간이다.”
이는 뉴욕의 센트럴 파크와 비교할 수 있다. 센트럴 파크는 낮에는 뉴욕 시민들의 훌륭한 공적 공간이 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고 교류한다. 하지만 밤에는 다르다. 센트럴 파크는 면적이 너무 커 인근 고층빌딩에서도 보이지 않는 지역이 많다. 그렇다 보니 밤이 되면 우범지대가 돼 도시의 거대한 블랙홀이 되곤 한다.
유 건축가는 걷고 싶은 도시를 좋은 도시의 요건으로 꼽았다. 여기 덧붙여 그는 공원과 광장의 역할을 강조했다. 집에서 걸어 나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인근 공원들이 조성돼야 도시의 활력이 높아진다는 설명이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동네 초등학교와 중학교 운동장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녁이면 이들 공간은 말 그대로 유휴공간이 된다. 이런 공간들을 잘 활용하면 유럽의 광장, 공원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다. 학교 인근의 상업 시설 설치는 제한되지만, 사회적 합의를 통해 잘 조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살기 좋고 아름다운 서울을 만드는 것은 시민들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여기에 건축가들은 다양한 의견을 줄 수 있다. 논의의 장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유 건축가는 “이제 많은 사람이 서울을 비롯해 우리 도시와 건축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희망적”이라고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