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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발칸 반도] 전쟁 아픔 간직한 두 도시, 사라예보와 모스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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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80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6.04.25 09:30:54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3일차 (사라예보 → 모스타르,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

아슬아슬하게 봉합된 갈등 요소들

새벽 두시 반, 버스는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국경에 닿는다. 좀 더 정확하게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 스릅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에 진입한 것이다. 1992년 성립한 스릅스카 공화국은 1995년 보스니아(BiH) 영토를 구성하는 두 요소 중 하나로 공식 인정받았다. 독립 당시 무슬림(Bosniak) 43.5%, 세르비아인(Serbs) 31%, 가톨릭계 크로아티아인(Croats) 17%로 구성된 보스니아의 다인종, 다종교의 이질성이 결국 참화로 터져 나온 것이다. 

유고연방으로 남고 싶은 세르비아계(Serbs)와 독립을 원하는 무슬림(Bosniaks)과 크로아티아계(Croats) 사이의 내재된 갈등 요소는 마침내 폭발했다. 1992년 보스니아가 독립 국가로 공식 인정받으며 UN에 가입하자 세르비아 민병대의 보스니아 마을 공격으로 시작된 보스니아 내전(1992~1995)으로 이어진 것이다. NATO의 개입과 미국의 중재로 겨우 끝난 3년 9개월간의 보스니아 내전은 9만 7000명의 인명을 희생시키고 180만 명의 난민을 낳은 참혹한 전쟁이었다.

인종청소

무슬림(Bosniaks)과 크로아티아계(Croats)를 대상으로 세르비아계(Serbs)가 저지른 인종청소(ethnic cleansing)의 아픈 기억에 전율한다. 그 중에서도 8372명의 무슬림들이 희생된 스레브레니차(Srebrenica) 대학살은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가장 참혹한 살육으로 기록된다. 인종적으로 동질적인 스릅스카 공화국을 이룩하고자 했던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의 광기가 부른 사건이었다.

▲올드 브리지는 보스니아전쟁 당시 파괴돼 안타까움을 남겼다. 2004년 복구됐고 200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사진 = 김현주

유럽의 화약고, 세계의 화약고

1995년 미국이 중재한 데이톤 평화협정(Dayton Agreement)으로 겨우 갈등이 봉합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BiH)이 탄생했지만 언제 갈등이 다시 폭발할지 모른다. 현재 보스니아연방 국토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51 : 스릅스카 공화국 49의 비율로 아슬아슬하게 반분돼 있다. 지구상에서 정치적, 역사적, 종교적으로 가장 복잡한 유럽의 화약고, 세계의 화약고는 아직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보스니아어,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는 모두 남부 슬라브 언어로서 상당 부분 서로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스레브레니차(Srebrenica) 대학살 추모전.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은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가장 참혹한 살육으로 기록된다. 사진 = 김현주

1984 동계올림픽 개최지 사라예보, 그러나…

국경 통과 후 어슴푸레 동이 틀 무렵 버스는 디나르 알프스(Dinari Alps) 산중으로 접어든다. 약간의 농지를 제외하면 보스니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험준한 산악 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알프스라는 이름이 낭만적으로 들리는 산악 풍경 뒤에는 참혹한 역사가 있었음을 계속 상기하지 않을 수 없는 여정이다. 아침 6시 반 버스는 드디어 동사라예보에 도착했다. 동사라예보(Istočno Sarajevo)는 사라예보 중에서 스릅스카 공화국에 속한 땅을 말한다. 1984년 유고연방 시절, 발칸의 수많은 도시를 제치고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될 만큼 앞서 갔던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사실이 쉽게 와 닿지 않는다.

인구 380만 명, 남한 국토의 절반이 조금 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iH)는 발칸 남서부의 중심 교차로에 있다는 지정학적 조건으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소국이라는 이유로, 아니 오토만제국 시절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들이 많다는 이유로 쉬지 않고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온 사연 많은 땅이다.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추모일을 맞아 추념 행사가 열리고 있다. 사진 = 김현주

보스니아 내전의 배경

나름대로 안온하게 살아온 이 나라 사람들의 운명은 1463년 오토만제국의 통치하에 들어가면서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기존 교회 조직이 강하지 않았고 가톨릭과 정교회의 마찰까지 있던 상황에서 발칸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이슬람이 쉽게 뿌리내렸다. 인류 역사에 처음으로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백인 이슬람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그런 만큼 오토만제국은 학교와 도서관, 모스크와 건축물들을 많이 남기며 보스니아 경영에 특별한 공을 들였다. 오토만이 물러나고 곧장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통치(1878~1918)에 들어간 보스니아는 이번에는 제국의 남방 전략 거점이라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렇듯 이질성을 포용하며 역사의 변혁기를 나름대로 헤쳐 왔던 보스니아는 1990년 유고연방 해체에 직면해서는 이질성에 따른 민족 간 입장 차이를 더는 극복하지 못했다. 독립을 원치 않는 세르비아계가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를 상대로 살육 전쟁을 일으킨 것이 보스니아 내전의 본질이다.

▲올드타운 중심에 있는 라틴 브리지. 사진 = 김현주

문명의 불연속선 사라예보

동사라예보에서 103번 트램을 타고 사라예보 시내 중심에 도착하니 1차 대전 발발의 진원 라틴 브리지(Latin Bridge) 부근이다. 도시는 높고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분위기다. 긴 산언덕을 따라 빼곡히 집들이 들어선 모습은 목가적이기까지 하다. 시내 올드타운(Old Town) 한 복판에는 모스크와 바자르, 유대교당과 가톨릭교회, 정교회 건물들이 한두 블록을 사이에 두고 공존한다. 교회당만 아니었다면 중동 어디쯤 와 있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완연히 이슬람 지역이다.

가지후스레브벡(Gazi Husrev Beg) 모스크는 규모만 작을 뿐 이스탄불에 있는 전형적인 터키식 모스크를 닮았다. 인근에 있는 모리칸 한(Morican Han)은 사라예보에 남아있는 유일한 오토만 시대 여관으로, 이슬람 순례자와 상인들의 숙소로 쓰였던 곳이다. 동방과 서방의 상인들이 만나서 교역하고 교류하면서 두 문명의 최전선이 펼쳐졌던 곳이다. 

발칸의 예루살렘

유대교당은 작지만 의미 있는 곳이다. 사라예보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1492년 레콩키스타(La Reconquista), 즉 국토 회복이 이뤄진 후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대거 몰려들어 거주했던 곳이다. 인근 두브로브닉, 베오그라드와 함께 유대인 밀집 거주 지역이었다. 모스크의 코란 낭송 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나오더니 곧 교회 종소리가 들린다. 이 무슨 야릇한 조화의 땅이란 말인가? 그래서 사라예보 올드타운은 유럽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특이해 발칸의 예루살렘, 유럽의 예루살렘이라고도 불린다.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며 사는 지혜를 수백 년 동안 터득하고 실천해왔던 곳이다. 역사를 통해서 늘 문명이 충돌했지만 관용과 인내로 평화를 지켜왔던 곳이 끝내 전쟁의 참회에 뒤얽혀버린 사연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 하나의 사라예보인 모스타르도 전쟁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이 도시는 보스니아전쟁 당시 유고 인민군에 의해 18개월 동안 포위됐다. 시내 곳곳에는 많은 건물들이 파괴된 채로 남아있다. 사진 = 김현주

사라예보 포위

포성이 멎은 지 20년이 지났으나 도시에는 파괴된 채 방치된 건물이 적지 않고 가끔은 전쟁 중 매설된 후 수습되지 않는 지뢰를 조심하라는 경고 문구 또한 발견할 수 있으니 섬뜩하다. 사라예보 포위(Siege of Sarajevo) 사건이 새삼 떠오른다. 세르비아계에 의해서 도시가 3년 넘게 봉쇄된 사건은 현대 전쟁사에서도 매우 희귀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여행자는 지금 사라예보의 거리를 평화롭게 걷고 있지만 한때는 언제 어디서 포탄이 날아들지, 언제 어느 건물 위로부터 세르비아계 저격수의 총탄이 날아올지 모르던 곳이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1차 대전 발발의 진원지 라틴 브리지 부근. 긴 산언덕을 따라 집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사진 = 김현주

아, 라틴 브리지

올드타운 중심에 있는 라틴 브리지를 다시 찾았다. 마침 오늘은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살해된 날이어서 각종 추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를 발칸 영토의 중심으로 삼고 공을 들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아닌가?

암살범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 청년 프린치프(Gavrilo Princip)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시대에 따라서, 그리고 보는 입장에 따라서 그에게는 반제국주의 혁명가로부터 파렴치한 테러리스트까지 다양한 타이틀이 씌워졌다. 어쨌거나 이 사건을 구실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발칸에 대한 침공을 시작하면서 인류는 전대미문의 대전쟁에 말려 들어갔다. 한 세기 전(1914년 6월 28일) 바로 그 역사의 현장에 서 있는 감회를 형언하기 어렵다. 

또 하나의 사라예보, 모스타르

묘한 기분에 휩싸인 채 모스타르행 버스에 오른다. 3시간 걸리는 여정은 쉬지 않고 산악도로의 백미를 선사한다. 헤르체고비나의 중심도시 모스타르 또한 문명이 충돌했던 곳이다. 이번에는 이슬람과 가톨릭의 충돌이다. 이 도시 또한 보스니아전쟁 당시 유고인민군(Yugoslav People’s Army)에 의해 18개월 동안 포위됐고 그 와중에 아름다운 올드 브리지(Stari Most) 또한 파괴됐다. 

전쟁의 흔적

그러나 아픔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고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처음에는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군이 연합했으나 유고군이 물러난 후에는 가톨릭 세력(크로아티아)과 이슬람 세력이 격돌해, 즉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돼’ 살육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시내 곳곳에는 파괴된 채로 남아 있는 건물들이 많아 그날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지 웅변해 준다. 올드타운 옛 골목을 돌아 나오다보니 작은 공동묘지가 눈에 띈다. 전투 중 사망한 젊은이들이 묻힌 곳이다. 마을 한복판 평화로운 공원이 곧 그들의 묘지가 됐음을 깨달으니 다시 한 번 울컥해진다. 

▲발칸의 예루살렘. 작은 규모이지만 의미 있는 곳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1492년 국토회복이 이뤄진 후 추방당한 유대인이 대거 몰려들어 거주했던 지역에 있다. 사진 = 김현주

오토만의 걸작품 모스타르 다리

1566년 오토만 통치자 술레이만(Suleiman) 대제의 지시로 건설된 올드 브리지(Stari Most)는 역시 압권이다. 오토만의 위대한 건축물로 손꼽히는 이 다리는 무지개가 하늘로 날듯이 네레트바(Neretva)강 위에 걸려 있다. 보스니아 내전 중 세르비아의 포격으로 부서진 이후 전쟁이 끝나고 2004년 복구됐고 200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부서진 조각들을 강에서 건져 올려 맞추는 등 원형을 최대한 복원한 정교한 공사였다. 

올드타운 산책

올드타운에는 크고 작은 모스크가 즐비하고 시장거리 한 복판에는 터키 영사관이 있다. 그만큼 터키인들이 많이 산다는 뜻이다. 코스키멧파사(Koski Mehmet Pasa) 모스크에 들른다. 1617년에 건축한 아담한 모스크이지만 미나렛(minaret, 첨탑) 내부를 통해 꼭대기에 올라가 올드타운을 조망하는 데는 아주 쓸 만하다. 번잡한 시장, 절벽 아래 계곡을 소리 내어 흐르는 네레트바강, 그리고 완벽한 올드 브리지 조망까지…. 이 평화로운 모습이 다시는 흐트러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정리 = 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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