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0호 김금영 기자⁄ 2016.07.01 15:16:03
(CNB저널 = 김금영 기자) “피카소, 왜 사람들이 당신을 입체파, 나를 초현실주의 작가라고 할까? 나는 도통 모르겠네.”
호안 미로(1893~1983)의 손자 주안 푸넷 미로는 할아버지가 친구인 피카소에게 했던 말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초현실주의의 대표 작가로 불리지만, 정작 본인은 여기에 관심 없었어요. 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을 방문해 액션 페인팅의 선구자인 잭슨 폴락과 만나 영감을 받기도 했고, 다른 미술 사조들도 자유롭게 접했죠. 어떤 학파로 구분돼 불리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어디에도 소속되거나 정의되지 않은, 새로운 회화 양식. 그게 바로 할아버지가 원한 것이었습니다.”
스페인에서 가장 존경 받는 화가로 꼽히는 호안 미로의 작업을 소개하는 국내 첫 대규모 전시 ‘꿈을 그린 화가 호안 미로 특별전’이 공개됐다. 이번 전시를 위해 주안 푸넷 미로(석세션 미로 대표), 프란시스코 코파도 '마요르카 호안 미로 재단' 단장, 필라르 바오스 '마요르카 호안 미로 재단' 전시감독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들은 호안 미로와 관련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전했다.
스페인의 화가이자 조각가, 도예가인 호안 미로는 초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상상을 추구하는 초현실주의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혀 왔다. 주요 작품으로는 ‘꿈 그림’ ‘상상 속의 풍경’ ‘농장’ ‘네덜란드의 실내’ 등이 있다. 정작 본인은 자신을 초현실주의 작가라고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작가의 작업은 예상할 수 없는 독특하고 다양한 형태로 남게 된 것 같다. 흰색의 배경 위 검은 선이 강한 대조를 이루는 작품은 동양적인 느낌이 강해, 이 작품을 서양화가가 그렸을 것이라는 생각을 처음에는 선뜻 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작품은 매우 원색적인 느낌이 강하다. 원시시대 벽화에서 봤을 법한 강렬한 형태의 작품도 눈에 띈다.
다른 예술가와의 활발한 만남, 여기서 받는 영감이 그의 작업 속에 깊이 녹아들어간 것은 아니었을까. 한국 예술가와의 교류도 있었다. 주안 푸넷 미로는 “할아버지가 1950년대 말년을 보낸 마요르카에서 한국의 위대한 작곡가 안익태와 만났다. 당시 안익태는 스페인에 거주하는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산책 도중 만난 안익태와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안익태의 공연을 할아버지가 보러 가기도 했다. 두 사람의 교류를 보고 예술은 서로 다른 나라를 잇는 매개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이처럼 항상 새로운 교류에 목말라 했던 호안 미로의 작업 시기에 집중한다. 전시를 기획한 필라르 바오스 전시감독은 “이번 전시는 호안 미로의 마지막 창작의 시기 1956~1981년에 집중한다. 전보다 더욱 반항적이고 과격하면서, 반대로 사려 깊고 시적인 모습까지 공존했던 시기”라고 설명했다. 이어 “호안 미로가 뿌리를 내린 마요르카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이곳에서 자연과의 깊은 유대감이 표현된 작품들이 탄생했다. 그리고 판화가, 도예가 등과 협업을 하며 누구 하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고 함께 어우르며 작업한 그의 작업 방식도 엿볼 수 있다. 동양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던 호안 미로가 이 영감을 어떻게 풀어냈는지도 감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인의 영혼을 지닌 예술가’는
예술 학파 분류에 관심이 없었다
필라스 바오스는 호안 미로를 “시인의 영혼을 지닌 예술가”라고 표현했다. 그는 “호안 미로는 작업 방식에 한계가 없었다. 캔버스 위에 기름을 부어 배경을 만들어내고, 얼룩을 만들기도 했으며, 여기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직접 캔버스 위를 걸어다니는 건 기본이었다”며 “너무나 자유분방한 방식으로 당대의 미술 시장에서 내놓기 힘들었던 작품들이 이번 전시에서 공개된다.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접근한, 생동감 가득한작품을 감상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함께 준비한 프란시스코 코파도는 호안 미로를 “꿈을 그린 화가”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20세기 대표 미술가이자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그의 예술은 객관적 현실과 자연, 일상 사물로부터 출발했다. 첫 시작은 객관적 현실이었지만 주관적인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이룩했다. 꿈을 그린 화가라 할 수 있다. 그 꿈을 함께 나눠보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전시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크게 5개 섹션으로 구성된다. 유화, 드로잉, 콜라주, 일러스트, 테리스트리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 총 264점이 전시된다. 100호가 넘는 대형 작품도 전시된다. 첫 번째 섹션 ‘호안 미로 작품의 근원’은 호안 미로에게 가장 중요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던 자연과의 교감 작업이 이뤄진 마요르카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선사 시대 동굴 벽화와 로마네스크 양식의 프레스코화, 미로와 함께 카탈루냐 출신이자 근대 건축의 선구자로 평가 받는 안토니 가우디에게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도 전시된다. 역동적인 느낌이 강한 섹션이다.
두 번째 섹션 ‘시, 기호, 리듬, 절제와 명상’은 호안 미로의 시각적 상상력, 그리고 회화적 실험이 돋보이는 작품들로 구성된다. 미국에서 관찰한 잭슨 폴락의 ‘뿌리기’ 기법에 영향을 받아 작업한 물감 방울과 손자국을 담은 작품도 눈에 띈다. 동양의 서예에 흥미를 가졌던 호안 미로의 모습도 발견된다. 기호와 구조, 글과 그림이 섬세한 균형을 이루는 동양의 서예에 영향을 받아, 후기 작품 제작 때 색의 절제와 흑백의 강한 대조 구도까지 시도한 작업들이 전시된다.
‘마요르카, 창조적 공간’은 호안 미로의 창작 공간(작업실)을 재현해 낸 세 번째 섹션이다. 호안 미로의 손때가 묻은 소품들과 작업도구 103점을 비롯해 미완성 캔버스들이 함께 공개된다. 원숙기에 이른 한 예술가의 은밀한 공간을 엿볼 수 있다.
네 번째 섹션은 ‘말년의 열정 - 독창적 색과 표현’이다. 충돌, 단절, 개방까지 호안 미로의 말년과 후기 작품에 끊임없이 반복된 요소에 집중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더 강한 독자성, 표현의 자유, 급진주의를 보인다. 또한 색의 변화도 보인다. 때로는 섬세하고 때로는 격렬한 검은 색을 주로 사용해 화면을 구성했다.
마지막으로는 ‘자연의 도식화’ 섹션이 있다. 우주와 별, 행성과 하늘의 천체를 다루는 작업들이 주로 전시된다. 곤충과 자유를 상징하는 새 역시 작품에 빈번히 등장한다. 또한 온 우주의 기원으로서의 여성이 작업 중심에 자리한다. 초상화에서 여성은 인생의 집합소로, 새와 별, 그리고 해와 관계를 맺는다.
전시에 대한 꾸준한 질문이 이어지는 가운데, 할아버지와의 추억에 대해 묻자 주안 푸넷 미로는 “항상 그림을 그렸어요” 하고 답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15년을 함께 한 것은 제게 행운이에요. 정말 너그럽고 친절하고 따뜻한 분이었죠. 가장 많이 기억나는 모습은 부엌에서 그림을 그리던 할아버지의 모습이에요. 연필을 수북하게 쌓아놓고 그림을 그렸죠. ‘할아버지, 왜 이렇게 그림을 많이 그려요?’ 하고 물으니 ‘복서가 매일 복싱 연습을 하듯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단다. 내 안의 에너지를 바깥으로 방출하고, 내 손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밤새 그림을 그려야 하지’라고 답했어요. 할아버지는 그렇게 그림을 사랑하는 분이었어요.”
호안 미로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담은 이번 전시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1~2관에서 9월 24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