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창경궁은 푸른 녹음 밑에도 바람 한 점 느껴지지 않아 더욱 적막하다. 심심치 않게 외국인 관광객이 눈에 띄어도 더욱 조용하게 느껴지는 것이 내리쬐는 볕이 소리마저 잡아먹은 듯하다. 그래도 견고한 짜임으로 묵직하게 버티고 있는 명정전은 목재가 흡수한 오랜 시간만큼 깊이 있는 응달을 만들어내고 있다.
명정전을 바라보고 오른쪽의 회랑 너머에는 집복헌(集福軒)과 영춘헌(迎春軒)이 있다. 어지간한 양반집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이 두 집은 사연을 알면 대개의 한국인은 흠칫 놀라게 된다. 바로 그 유명한 사도세자가 태어났고, 그의 아들 정조(正祖, 1752~ 1800. 조선의 22대 왕)가 돌연 석연치 않게 숨을 거둔 집이며, 조선말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씨앗이 된 정조의 아들 순조가 태어난 집이라니 말이다.
현재 이 집에서는 정조 이산이 써내려간 글씨와 편지 등을 보여주는 전시 ‘정조, 창경궁에 산다 - 서화취미書畫趣味’전이 열리고 있다.
성장의 흔적
집복헌과 영춘헌은 원래 두 개로 분리된 집이었지만 순조 시절 일어난 화재 이후 증축해 8자 모양의 한 채 집이 됐다. 전시 관람을 위해서는 먼저 집복헌으로 들어서게 된다. 한옥 특유의 ㅁ자 중정에 서니, 바깥에선 바람 한 점 없었는데, 들문을 모두 올려놓고 사방으로 뚫린 창을 통해 기온 차를 느끼게 하는 바람이 더위를 식혀준다. 역사의 서늘함 때문일까.
문화재청이 주관한 이번 전시는 다른 무엇보다 정조가 머물렀던 사적 공간이 최초로 개방됐다는 사실이 주목을 끈다. 디자인 하우스의 기획 아래 웅 갤러리의 최웅철 대표가 아트 디렉팅을 하고, 지음 아틀리에의 박재우 대표가 공간 디자인을 했다.
시, 서화, 학문, 독서, 편지, 명상의 6가지 테마로 구성된 전시 공간은 송윤원 해설사가 열성적으로 설명해준다. 다소 부족해보였던 전시 해설 자료가, 찾아오는 관객에게 자세한 설명을 안겨주는 해설사의 모습으로 보충됐다.
서화를 테마로 한 공간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처음 만나는 곳이자, 가장 핵심인 전시 공간이다. 2014년에 한글박물관이 공개한 정조의 ‘한글 편지첩’은 정조 사후,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수신자 별로 정조가 보낸 편지를 정리한 책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정조가 외숙모에게 보낸 편지들이 연대기 별로 선보인다.
7~8세쯤으로 추정될 때의 글씨로부터 시작되는 그의 글씨체 여정에 따라, 한 인간의 성장이 보이는 동시에 다정한 마음 역시 느껴진다.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는 한글로 쓰고, 한 쪽 구석에 꽃 도장을 찍었다는 해설사의 설명이다. 7살짜리 원손이 어른인 척 안부를 묻는 말투에 어울리지 않게 제멋대로지만 과감한 글씨체에 꽃잎과 이파리의 색을 다르게 해 찍은 도장이 귀엽고 예뻐 보인다.
수재형 왕인지라 나이가 들수록 글씨는 점점 달필이 돼간다. 미쳐가는 할아버지와 역시 미쳤다는 혐의로 뒤주에 갇혀 숨진 아버지라는 인생사 때문에 정조는 심약했을 것이라는 지레짐작도 있지만, 그의 글씨에서는 대범하고 과감한 성격이 드러나는 듯하다. 비고처럼 신하가 곁에 적어 놓은 작고 단정한 ‘공무원체’ 글씨와 대비돼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선물 목록을 적어놓은 편지에서는 인간적인 모습이 느껴진다. 해설사는 “정조가 꽤 애연가였기에 주위 사람들에게 흡연을 많이 권했고, 담배 관련 선물도 많이 줬다”고 일러준다. 편지에 적힌 선물 목록에는 신하가 ‘담뱃대 2개, 담배 3근’이라 적어 놓기도 했다.
1만 갈래 시내를 비추는 밝은 달 같은 존재
정조가 남긴 그림은 총 6점이다. 그 중 2점은 보존 상태가 매우 나빠,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은 4점이다. 그 중에서도 단순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생물의 느낌을 표현한 ‘국화도’와 ‘파초도’는 이번 전시 이전에도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송 해설사는 정조의 작품에 쓰인 도장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정조가 그림을 그릴 때 썼던 도장은 총 3가지이다. ‘만기여가(萬機餘暇)’라 새겨진 도장은 ‘만 가지 업무 중 얻은 여가’라는 뜻으로, 정조뿐 아니라 선왕들이 사용했던 사적인 사인과도 같은 도장이다.
‘홍재(弘齋)’는 정조의 호로서 ‘세상에서 가장 큰 서재’라는 뜻이다. 임금이지만 당대 최고의 지성임을 자타가 인정했던 정조의 면모를 보여주는 호다.
마지막으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은 ‘1만 갈래 시내를 비추는 밝은 달 같은 존재’라는 뜻으로서, 정조가 후기에 스스로 불리길 원했던 호라고 전해진다. 도처에 물은 많지만, 그 물에 비치는 달은 오로지 하나이며, 달을 반영하지 않는 물은 있을 수 없다는 ‘정조대왕’의 자부심이 담뿍 담긴 호다. 해설사는 “이 도장이 후기에 사용된 것이라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전시 준비 때만 해도 전반기 작품으로 추정되던 정조의 ‘추풍명안도’가 후반기에 그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집복헌과 영춘헌을 잇는 복도 격인 공간에는, 7년 전 발견된 ‘어찰첩’에서 추려낸 편지부터 다섯 살 무렵의 편지까지를 물결 모양의 조형물에 인쇄해 전시하고 있다. 어찰첩은 신하 심환지와 말년에 주고받았던 편지 300여 통을 모아놓은 편지 모음이다. 심환지는 ‘정조 독살설’의 중요 인물로 거론되기도 하는 인물이다. 이 어찰첩이 공개됨으로써 당시 정치적 상황에 대한 연구가 새삼 이뤄지고 있기도 한다. 정조는 편지를 통해 심환지에게 “회의에서 이런 말을 하라”고 지시하거나, 또는 비속어도 섞어 편지를 보내는 등 매우 친밀한 사이인 것처럼 보인다.
다만, 정조는 편지 끝마다 ‘이 편지를 세초하라(없애라)’라는 지시를 빼놓지 않고 있다. 정치적으로 정조와 대척점에 서기도 했던 심환지에게 이렇게 개인 편지를 보낸 것도 별나지만, 신하가 왕명을 어기고 비밀편지를 차곡차곡 모아둔 것도 신기하다.
이 조형물의 끝부분에는 정조의 다섯 살 때 편지도 공개돼 있다. 서툴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내 족건(양말)이 작아졌으니, 조카에게 신기라‘는 분부가 실려 있어 절로 웃음이 터진다.
현대 미술품으로 재현해보는 정조의 생활
이 밖에 시, 독서, 학문, 명상을 테마로 한 공간은, 현대의 공예가들과 미술가들의 작품으로 정조의 생활공간을 재현한 공간들이다. 이세용의 달항아리와 임영율의 사방탁자, 김인자의 침선, 조대용과 조숙미의 발 등 다양한 공예 분야 장인과 무형문화재의 작품들이 선보인다.
작품을 선정하고 아트 디렉팅을 맡은 최 대표는 “최초 기획에서는 정조의 사적인 시간을 테마로 하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문화재 안에서 이뤄지는 전시이기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에 기본을 두고, ‘정조가 현대에 살았으면 어떤 모습일까’를 염두에 두고, 공간을 꾸몄다”고 밝혔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전시 공간의 가장 큰 특징은 인공조명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방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은 건축뿐 아니라, 공예품들의 자연 그대로 깊이 있는 색을 돋보이게 한다. 인공조명이 없는지라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와도 어색하지 않게 어울린다.
정조의 흔적 이외에 눈에 띄는 작품 중 하나는 최 대표가 마련한, ‘책가도’를 입체화 한 작품이다. 호가 ‘세상에서 가장 큰 서재’인 만큼 책을 사랑했던 정조 시대에는 ‘책가도’가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정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책가도는 수원성에 원본이 있다. 최 대표는 그 원본을 참고로 사방탁자를 연결해 입체적인 책가도를 재현해냈다.
이 밖에도 ‘명상’을 테마로 한 공간에는 경치 좋은 곳에서 자유롭게 사색하기를 꿈꿨던 정조의 소망을 담았다. 손이 가는대로 푸른색의 붓 터치로 흔적을 남긴 김선형의 추상화 설치 작업 ‘블루가든’은, 자갈을 형상화한 이상길의 스테인리스 조각과 어우러져, 숲인 듯 시냇물인 듯 흘러내려온 한 폭의 자연이 방 안 가득히 펼쳐진다.
“과거와 현재의 조화에 주력”
전시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은 공간디자인을 담당한 박재우 소장의 타이포그래피 설치작업으로 꾸며졌다. 방 안을 채우며 천정부터 길게 내려온 종이에 인쇄된 글씨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 지은 정조의 축시다.
박 소장은 “화려하지만은 않은 공간에서 깊이를 느끼는 전시가 되게 하는 것이 주안점이었다”며, “과거와 현재가 어색하지 않게 조화를 이루는 것에 많은 고민을 했다”고 밝혔다. 더불어 “과거 속에서 현재를 찾는다는 것은, 겪어보지 못한 것을 상상하고 제시하는 것이어서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궁에서의 과거 회상은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국왕들이 태어나고 정조가 여가와 업무를 봤던 공간은 생각보다 매우 소박했다. 더불어 전시를 주관하고 실행하는 주최와 기관 및 인력이 상당히 다양해 이들이 얼마나 조화로운 전시를 펼칠 수 있는지도 궁금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현대의 미술과 정조의 흔적이 작고 소박한 공간 안에서 어색하지 않고 조화롭게 펼쳐진 것 같다는 것이 기자의 감상이다. 전시는 10월 30일까지이니 조금 날씨가 식은 다음에 가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