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1호 김금영 기자⁄ 2016.11.25 18:26:12
(CNB저널 = 김금영 기자) 해리포터의 새로운 시리즈 ‘신비한 동물사전’이 일주일 만에 누적 관객 수 200만 명을 돌파하며 사랑받고 있다. 조앤 롤링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해리포터 시리즈는 영화로 만들어져 2001년 첫선을 보였고, 마지막 편인 ‘죽음의 성물 - 2부’는 2011년 마무리됐다. 해리포터의 마법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을 삼키던 팬들은 5년 만에 새롭게 시작된 ‘신비한 동물사전’에 열광하고 있다. 학생 때 해리포터 시리즈를 처음 보기 시작해 이젠 성인이 된 사람들까지 팬의 연령층이 다양하다.
이들은 왜 해리포터 시리즈에 열광했을까? 현란한 마법 기술도 눈길을 끌었지만, 무엇보다도 정말 저런 환상의 세계가 실제로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과 기대가 인기의 원동력이 됐다. 고달픈 현실을 살아가면서 소설 속 마법을 꺼내놓고 싶은 순간이 있다. 이 욕구를 해리포터의 판타지 요소가 채워줬고, 사람들은 그 순간만큼은 힘든 현실에서의 자괴감을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신나게 상상의 놀이터에서 뛰놀 수 있었다.
김정향 작가 또한 사람들에게 판타지를 보여주는 작업을 한다. 앞서 그는 ‘환상 목욕탕 기행’과 ‘조력자들의 밤’을 선보인 바 있다. 환상 목욕탕은 치유와 상상이 이뤄지는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그리고 ‘조력자들의 밤’에서는 한 여성으로서의 작가의 경험이 녹아들어 쌓인 시공간이 환상적인 형태로 표출됐다. 그리고 이번엔 ‘수건 손 눈 숟가락 - 타니산(呑泥山) 견문록’이다.
본격 작품 감상에 앞서 먼저 작가의 글을 마주하게 된다. 작가는 어느 날 길을 걷다가 문득 광고지 하나를 발견했다고 이야기한다. 거기엔 ‘타니산(呑泥山) - 모든 고민과 어려움을 다 대신 삼켜드립니다. 관심 있으신 분만 문의 바람’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작았던 전단지는 작가의 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졌고, 그 안에는 빼곡한 산봉우리들, 그 아래로 가늘게 내려오는 여러 개의 물길들, 산 가운데쯤 펼쳐진 마을들과 거기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느새 작가는 전단지 속 세상에 빨려 들어갔다. 마치 구덩이에 빠져 이상한 나라로 가게 되는 앨리스처럼. 그리고 이제 작가의 타니산 기행이 시작된다.
이 글을 읽고 있노라면 현실에서 다른 공간으로 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이 글들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각 그림마다 관련된 글이 적혔다. 예컨대 ‘새로 짠 수건’ 그림 옆에는 수건을 준 할머니에 대한 글이 적혔고, ‘아롱다롱 눈이 열리는 숲’ 그림 옆의 글은 눈이 가득한 숲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전한다. 글과 함께 그림을 감상하면서 더욱 환상의 공간에 빠지게 된다. 특히 작가는 그간 한지를 써 오다가 이번 전시에서는 처음으로 옻칠종이를 쓴 작업도 함께 선보이는데, 종이 특유의 색감과 질감, 그리고 동양적인 작가의 그림 형태가 어우러져 꼭 한편의 설화를 보는 것 같다. 작가는 왜 이런 방식을 취했을까?
마냥 긍정이 아닌, 부정을 인정하는 세상
“어떤 그림을 글로 설명하면 사람들의 상상력을 제한할 수도 있죠. 그런데 세세하게 꼬치꼬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림에 대한 상상력을 열어놓을 수 있는 정도로 글을 적어 놓으면 그림에 대한 이해도 가고, 상상을 하면서 더 재미있게 작품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결국 그림뿐 아니라 이 글까지 포함해서 하나의 작품이 되는 거죠. 꼭 그림책 같이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림책을 봤는데 정말 많은 상상을 할 수 있었어요. 알게 모르게 그림책을 계속 본 것이 제게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아예 그림책 형식으로 책도 내놓는다. 평론 글과 작품 이미지가 담긴 일반적인 도록과는 차이가 있다. 손바닥에 들어오는 자그마한 크기로, 그림 옆에 바로 작가의 글이 적혀 전시장을 옮겨 놓은 느낌이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언제어디서든 이 작은 책을 펼쳐 타니산에 놀러올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작가는 이 타니산에 놀러 온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단순히 현실을 잊을 수 있는 환상적인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던 걸까? 물론 그것도 좋다. 하지만 작가의 근본적인 목적은 치유, 그리고 관계 이야기에 있다.
타니산은 삼킬 탄(呑), 진흙 니(泥), 메 산(山)으로, ‘진흙을 다 삼켜주는 산’을 뜻한다. 여기서 진흙은 더러운 것, 즉 아픔과 고민까지 다 상징한다. 타니산 광고 전단지에 적힌 ‘모든 고민과 어려움을 다 대신 삼켜드립니다’는 결국 이타적인 성격을 가진 이 공간의 특성을 말해주는 것. 대가성 치유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작가는 타니산을 보여주며, 긍정과 치유의 가능성을 살핀다. 그런데 이게 또 마냥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상처받지 않는 환상의 장소를 꿈꾸죠. 하지만 이 환상의 장소는 손에 잡히지 않는 괴리감이 있어요. 여기서 절망과 동시에 치유받고 싶은 욕구가 함께 불타오르죠. 사람들의 이런 마음이 반영돼 한동안 힐링이 트렌드가 됐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트렌드는 정말 한시적 유행처럼 지나가버린 키워드가 돼버렸죠. 저는 그런 의미에서 치유를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마냥 긍정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죠. 부정적인 현실을 인정하면서, 거기에서 긍정과 치유의 가능성을 찾고 싶은 거예요.”
작가는 이런 움직임을 현실에서도 발견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문학, 음악, 그림 등의 형태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고, 때로는 모여서 시위를 하는 형태로 긍정적인 방향, 즉 치유를 향하는 목소리를 꾸준히 내 왔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포기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아가면서 함께 이야기하고, 긍정을 찾는 것. 작가는 이 과정이 이뤄지는 곳이 타니산이라며, 타니산이 마냥 긍정적인 천국의 이미지는 아니고, 현실을 잊기 위한 도피의 장소도 아니라고 강조했다.
나 혼자 산다? 당신은 이미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
이 마음을 전하고자 글을 적었다. 작가의 글을 보면 공통적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수건’에서 눈물을 흘리던 작가에게 수건을 건네 준 할머니는 “이 수건으로 눈물도 닦을 수 있고, 추울 때 몸을 덮을 수도 있고, 이래저래 요긴하게 쓸 수 있다”고 말한다. ‘쉼 없이 국수를 뽑는 용’에서는 코와 입에서 입김 대신 쉴 새 없이 국수를 뿜어내는 용이 나온다. 이 용 덕분에 사람들은 허기를 모르고 누구든지 언제나 넉넉하고 배부르게 지낸다. ‘눈 열매만 먹는 새’에는 눈이 아픈 사람들이 새가 먹는 열매를 얻어먹고는 모든 대상을 왜곡하지 않고 바라보는 시력을 회복하는 이야기가 담겼다.
모든 이야기에 한 대상만 등장하지 않는다. 추울 때 수건을 건네는 할머니, 배고픈 사람들에게 국수를 주는 용, 사람들에게 열매를 나눠주는 새까지 서로가 서로를 돕는다. 관계에서 발생하는 치유, 바로 작가가 주목하는 점이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세상이지만 혼자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어요. 좋든 싫든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죠. 그리고 긍정과 치유를 찾으려면 이 관계에서 시작돼야 해요. 편견과 의심이 앞서는 세상에서, 서로를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노력이 필요하죠. 그리고 이 이야기가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숟가락, 수건, 가위 등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의 사물들을 그려 넣고 여기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함께 적었어요. 나와 먼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거죠.”
이미지로 접근하면 숟가락 위 신과 같은 복장을 한 새가 서 있는 것이 보이고, 거대한 용 등 동양의 신화적인 요소가 많다. 작가는 평소 과거 유물이나 신화에 관심이 많다. 시간이 날 때마다 관련 정보를 찾아보고, 직접 박물관에 가서 유물과 옛 도판을 보기도 한다. 이렇게 관심을 갖고 보다가 이 모든 유물과 이야기 속에 과거 사람들의 염원이 담겼음을 느꼈다. 그래서 그림에서 종교적인 의미보다, 사람들의 염원에 접근하는 마음으로 이 요소들을 그렸다. 그리고 과거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요소들은 현재에 이르러서는 치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염원까지 연결된다.
“과거엔 현실 비판적인 작업을 많이 했어요. 어두운 느낌이 강했죠. 강한 목소리는 필요하죠. 하지만 비판만 하는 게 아니라, 해법을 찾아보는 과정 또한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작품과 현실을 부드럽게 연결시키는 방식을 연구했어요. 지금도 한창 연구하는 중이죠.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저 또한 위로를 받으며 함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이야기를 하는 과정을 앞으로도 거치고 싶어요. 다음엔 또 무슨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말을 건넬까요? 저도 궁금하네요.”
작가가 타니산을 통해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는 갤러리 담에서 11월 30일까지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