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점에 500원인 퍼즐 조각부터 500만원의 금속 조각상까지. 이제 막 대학원 첫 학기를 마친 학생부터 4학기를 모두 보낸 학생들이 함께 뜻을 모아 학교 밖 전시를 기획했다. 조각뿐만 아니라 영상-설치 작품들로 다양한 체험까지 가능한 이 활기찬 전시를 직접 만나러 CNB저널이 최근 서울 성북구로 자리를 옮긴 아트스페이스 H(에이치)를 찾았다.
전시 ‘500’은 성신여대 대학원 조소과 학생들의 스터디모임 ‘재밌군’을 통해 자발적으로 기획됐다. 300명의 군사로 100만 군대에 맞서 싸우는 영화 ‘300’의 원작 프랭크 밀러의 동명 그래픽노블을 오마주한 제목이다. 영화 속에서 군사들이 “스파르타~”를 외치며 참혹하게 싸우듯, 원작도 전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비장한 싸우는 영웅적 모습을 그린다. 영화 ‘300’의 용맹스러운 영웅의 이야기가 이번 전시를 통해 대학원생 작가들의 열정적이고 치열한 작품이 모인 전시 ‘500’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아트스페이스H도 젊은 작가들을 위한 기획 전시로 ‘500’을 초대해 후원했다.
"스파르타~" 젊은 작가들의 치열한 열정 담은 작품들
박수근 작가가 색색의 아크릴을 동일한 모양으로 재단해 손수 잘라낸 퍼즐 한 점이 바로 500원짜리 작품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작은 조각이 모여 하나의 오브제를 이룰 수 있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이번 전시에는 비록 개체 하나로는 완전하지 않지만, 이 불완전한 개체들이 모여 각자 다른 모양과 생각을 만들 수 있는 퍼즐을 제작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레이저 커터가 아닌 실톱으로 아크릴을 직접 가공했다. 그래서 퍼즐 조각을 제대로 맞추어도 미세한 틈이 생기고 만다. 관객은 작가가 미리 마련한 가이드라인에 맞춰, 또는 자기 나름의 방식에 따라 저마다 다른 형태를 만들며 작가의 작품을 체험할 수 있다.
출품작 중 또 다른 참여형 예술 형태로 이혜진 작가의 ‘선 잇기’ 놀이도 눈길을 끈다. 작품 제목이면서 동시에 벽에 크게 붙어있는 문구 ‘그것은 그저 단순한 점이 아니다’를 통해 작가가 말하는 '점'은 고민 그 자체다. 무작위로 찍힌 점처럼 고민이 종잡을 수 없는 곳에서 솟아나고, 현재의 고민들은 이전 고민에서부터 선으로 연결되듯 계속해 이어지기 때문이다. 관람객은 책상 위에 마련된 OHP필름 위에 마커펜으로 점을 그려 선으로 연결하며 자신만의 고민 지도를 그려볼 수 있다. 어디가 끝이고 어디가 시작인지도 모를 고민의 흔적이 점차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작가는 솔직하고도 유쾌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임여송 작가는 자신이 토박이로 살아온 성북구 북문로의 어느 노부부에 흔적을 따라간다. 현재는 주인이 바뀐 집이지만 작가는 예전 노부부와 백구가 살던 그 집을 기억하고 있다.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노부부의 흔적을 쫓던 작가는 그들의 죽음을 접하게 된다. 그 집 주변 구석구석에서 노부부의 흔적을 찾아 사진과 글로 기록을 남겼다. 낙엽과 목공용 본드를 사용해 그리움으로 남은 노부부의 집을 만들기도 했다. 왠지 허망하고 쓸쓸해 가을을 연상시키는 추억이지만, 작가가 흘러간 시간의 흔적을 받아들이며 느꼈던 따뜻한 정서도 함께 녹아 있다.
요즘 젊은이들의 생활상을 반영한 SNS 관련 작품도 눈에 띄었다. 이나래 작가는 SNS에 공유할 사진 한 장을 위해 너저분한 현실 속에서 인위적으로 조성한 가상 공간에 주목한다. 종이와 필기구 등이 복잡하게 널브러진 책상 가운데 흰 매트가 깔려 있고 그 위로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 풍경이 ‘SNS 감성’ 스타일로 꾸며졌다. 주변 현실과 이질적인 이 촬영 현장은 오로지 SNS에서의 과시욕과 허세를 충족하기 위해 연출된다. 작가는 실제관계보다 SNS 관계성에 집착하는 요즘 사람들의 SNS 중독을 표현하는 여러 작업을 함께 진행 중이라고 한다.
한편, 정화정 작가는 고전게임의 퀘스트(게임 플레이어에게 부여되는 해당 게임의 임무)가 우리의 SNS·인터넷 문화와 닮았다고 말한다. 고전 게임은 룰이 간단하고 목적도 단순하지만, 작동 과정은 마음처럼 쉽지 않다. 작가는 색색의 점들이 화면의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빠르게 이동하는 영상을 배경으로, 공격을 피하는 퍼포먼스 영상을 제작했다. 작가는 이전에 ‘셀기꾼의 자가복제’란 제목의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셀카 사기꾼을 의미하는 '셀기꾼'에 이입해 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어플을 이용해 자신의 얼굴을 극단적으로 변형한 작업이다.
이밖에도 이번 500전시에는 특히 동을 소재로 만든 조각 작품들이 눈에 띈다. 송현구 작가의 ‘꽃병도깨비’ 시리즈는 작가가 상심에 빠졌던 2년 전 처음 구상했다. 당시 초인적인 힘을 염원했던 작가는 이러한 상상 속 욕망을 도깨비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용을 탄 도깨비 영웅의 모습으로 자신의 초월적 자소상을 그리던 작가는 점차 도깨비 시리즈를 통해 치유 받았다고 한다. 이제 작가의 도깨비는 동이 트면 사물로 변하는 한국의 전통 도깨비를 차용해 사람들에게 꽃을 선물하는 '꽃병도깨비'가 됐다. 꽃병뿐 아니라 막걸리 주전자, 국자 등 생활용품에 천진난만하고 해학적인 도깨비 얼굴을 더해 긍정적인 삶의 에너지를 담아낸다.
남지형 작가는 돌 위로 동 선을 용접해 만든 선인장 작품에 ‘사브라’라는 제목을 붙였다. 사브라는 사막에서도 강인하게 자라나 꽃을 피우는 선인장의 열매를 부르는 말로, 이스라엘인들이 자신의 자녀를 부를 때도 쓰인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선인장을 통해 성공만을 강요하기보다 참고 인내해 꼭 꽃을 피워내란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동이 가열돼 1083도의 절정기에 이르면 녹아서 떨어지는 원리를 기법으로 사용했다.
류지오 작가도 동을 주재료로 작업한다. CNB저널이 2016년부터 각 미술대학로부터 추천받아 소개한 작가들 중 한 명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인터뷰로 소개한 바 있다.(링크: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20589)
작가는 미물로 여겨지는 곤충의 몸에 에디슨 축음기의 확성기가 결합된 형태의 조각 작업을 해왔다. 이번엔 에디슨 전구까지 더해져, 빛과 소리 그리고 금속이 만난 복합적인 조각을 선보인다.
장욱희 성신여자대학교 조소과 학과장은 전시를 기획한 스터디 모임에 대해 “학교 수업에서는 학생 본인의 예술성에 집중시키는 아카데믹한 교육이 진행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번 전시는 대중과 소통하며 관람객이 작품을 직접 체험하고 만날 수 있도록 자신의 작품을 밖으로 꺼내는 기회가 됐다"며 "학생들이 먼저 QR코드를 사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각자 블로그도 만들었다. 앞으로도 꾸준히 작업을 업데이트하며 자기 작품의 깊이를 간직한 상태에서 외부와 소통하려는 시도를 칭찬해주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