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사할린] 혹한을 살아내는 한인과 일본의 흔적들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일차 (유즈노 사할린스크 ↔ 홈스크 왕복)
부동항 홈스크
인구 3만 1000명, 일본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Maoka(眞崗), 즉 ‘진짜 언덕’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항구 도시라는 것 말고는 홈스크는 특징적인 건물 하나 없는 삭막한 곳이지만 거리에는 고급 유럽차가 굴러다니는 등 돈이 돌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1945년 8월 20일 일본 수비대의 완강한 저항을 뚫고 소련군이 홈스크에 상륙함으로써 남부 사할린 접수의 계기가 된 곳이다. 조선업과 어업, 해상운수업 등이 주요 산업이다.
해안과 산언덕 사이의 좁은 띠를 따라 남북으로 이어지는 도시는 매우 어수선하다. 도시 외곽에는 과거 제련소 굴뚝이나 낡은 공장 건물들이 부서진 채로 서 있어서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택시를 타고 도시를 탐방한다. 바닷가를 달리기도 하고 동해안 작은 언덕에 차를 세워 찰랑거리는 바다를 내려다보기도 한다. 바다는 차갑지만 얼지는 않았다. 얼지 않는 바다는 극동 러시아에서는 참으로 귀한 존재 아닌가?
제2의 고향
택시기사 권 씨는 대구 출신 할아버지와 이북 출신 할머니를 둔 한인 3세다. 아내도 한국인이란다. 백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땅에 수십 년 살아오면서 타인종과 피를 섞지 않고 굳이 소수 중 소수인 동포들끼리 만나 혈통을 지키려는 것은 무엇일까? 피는 무서운 것이다.
▲버려진 공장들이 보인다. 일본 남사할린 시절의 흔적이다. 여기에 가끔 일본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사진 = 김현주
그래도 태어난 여기를 조국으로 여기며 살고 있으니 왠지 나는 고맙고 미안하다. 홈스크뿐이랴, 사할린에서 공장과 탄광, 항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한국인이 살고 있다. 일본은 단지 노동력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인구가 희박한 사할린 남부를 채워야 했기에 이처럼 많은 한국인을 여기에 데려다 놓았던 것이다.
3일차 (유즈노 사할린스크)
유즈노 시내 탐방
오늘은 시내 탐방에 하루를 보낸다. 지난밤부터는 콧물이 수돗물처럼 흐른다. 이젠 봄이 멀지 않은 서울 날씨로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치료법일지 모르겠다는 기대로 버텨본다. 시내 중심에 있는 미술관은 일본 예술품, 한국 예술품(북한에서 기증이 아니라 판매했다고 하는데 작품들이 조악함), 그리고 러시아 프레스코 벽화 섹션으로 구성돼 있다.
미술관 리셉셔니스트가 한국계라는 것을 알고 그와 여러 얘기를 나눴다. 권만자(72세) 여사는 은퇴 후 여기서 일하며 부족한 연금을 보충한다고 한다.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곱고 우아한 모습에 한국어도 잘한다. 학식 높았던 그의 선친이 언제나 조선인 뿌리를 강조한 덕이라고 겸손해 한다.
▲김치는 사할린에서 최고 인기 식품이다. 사진 = 김현주
▲사할린 미술관 리셉셔니스트로 있는 한인 2세 권만자 여사를 만났다. 학식 높았던 그의 선친이 언제나 조선인 뿌리를 강조했다고 한다. 사진 = 김현주
볼 것 많은 사할린 박물관
사할린 박물관(Sakhalin Regional Museum)은 1937년 식 일본 건물(현청사, 縣廳舍)에 자리 잡고 있다. 유즈노 사할린스크에 매우 드물게 남은 이색적인 일본식 건축물이라서 주말을 맞아 많은 예비 신혼부부들이 웨딩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박물관 2층은 사할린의 역사, 1층은 자연사 섹션과 함께 아이누 특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역사 섹션에는 17세기 이후 러시아와 일본이 경쟁적으로 사할린을 개척한 역사가 기록돼 있다. 특히 러일전쟁 이후 사할린 남북 분단 시대 관련 사진과 기록이 흥미진진하다. 마오카(眞崗, 현 홈스크)와 토마리 탄광, 신사 등 당시 사할린 풍경을 담은 사진들이 볼 만하다. 전쟁 후 기록에는 한국인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자주 등장한다. 각 분야에 종사하면서 사할린 개발을 위해 열심히 일한 한국인 노력 영웅들의 기록을 보며 한인이 지닌 특별한 존재감의 근거를 확인한다.
김 여사의 사연
사할린 박물관 코트룸 관리 요원으로 근무하는 여성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한인이다. 물어 보니 역시 펜숀(연금)으로는 부족해서 용돈을 벌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김씨 성을 가진 62세의 이 여성은 사할린 2세인데 한국어가 유창하다. 한국인 아버지가 일본인 어머니를 따라 일본으로 떠나가는 바람에 어린 시절 혼자서 자랐다고 한다.
이처럼 가슴이 미어지는 사연이 어디 이 여인 뿐이겠는가? 러시아인과 결혼해 대륙 멀리 이주해 간 딸과 손주들을 보러가겠다는 기다림으로 하루하루를 지낸다고 한다. 콧물을 줄줄 흘리는 나를 보더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약을 모두 꺼내 챙겨준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4일차 (유즈노사할린스크 → 하바롭스크)
회한 속에 떠나는 무채색 도시
아침 7시 반. 이제야 사방이 어둠에서 깬다. 북방의 겨울 해는 더디게 솟는다. 호텔을 나와 공항으로 향한다. 러시아 어디를 가도 있을 예쁜 교회, 멋진 콜로니얼식 건축물, 화려한 광장과 공원, 이런 것들이 이 도시에는 없다. 일본을 몰아내고 전쟁이 끝난 이후 건설을 시작했으니 시간이 충분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할린을 어떻게 키우겠다는 계획도 없었을 것이다.
유형지로 시작된 땅을 떠나려니 나도 모르게 회한이 솟구친다. 이 땅을 모국과 고향으로 여기며 살아야 할 3만 5000 한인들의 행복과 건강을 빈다. 그리고 그 후손들…. 서울 명동거리, 강남역, 신촌 어디에 가도 전혀 손색없을 출중한 용모의 젊은이들을 보면서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 오는 것을 감출 수 없다.
▲사할린 박물관 앞 마당 전시 현장. 일본 남사할린 시절에 세워진 영토 표시 경계석이다. 사진 = 김현주
▲사할린 박물관은 일본 남사할린 시절 현청 건물이다. 유즈노 사할린스크에서는 매우 드물게 남은 이색적인 일본식 건축물이다. 사진 = 김현주
아직 한 겨울인 하바롭스크
오늘 아침 날씨는 매섭다. 바람이 송곳처럼 찌른다. 하바롭스크(Khabarovsk)행 오로라 항공기는 정시에 이륙해 유빙이 가득한 타타르 해협을 건너더니 대륙의 방대한 설원 위를 난다. 한 시간 남짓 후에 도착한 하바롭스크는 아직 완전히 겨울이다. 다행히 바람이 잦아 견딜 만하다.
과거 이 도시에 몇 번 와봤지만 겨울에 오기는 처음이다. 오늘 한 낮에는 영하 7도까지 올라가고 바람 한 점 없으니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짧은 겨울 해를 즐긴다. 돌도 안 된 갓난아기들까지 유모차에 실려 아무르 강변을 산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어린 나이부터 추위에 단련되며 자랐으니 러시아인은 추위에는 달인일 수밖에 없다.
▲사할린 미술관 앞에 안톤 체홉 동상이 서 있다. 안톤 체홉은 ‘사할린 기행’을 남겼다. 사진 = 김현주
▲하바롭스크 우초스 전망대로 가서 아무르강을 굽어봤다. 멋진 겨울 풍경이 보인다. 사진 = 김현주
우초스 전망대로 가서 아무르강을 굽어본다. 참 멋진 도시다. 겨울은 겨울대로 멋진 북방 도시의 정취를 풍기고 있음을 확인한 하바롭스크 겨울 방문은 내게는 의미 있는 기록이다. 짧은 겨울해가 곧 떨어지니 나의 취약한 복장으로는 추위를 견딜 수 없어 서둘러 호텔로 돌아온다.
5일차 (하바롭스크 → 서울)
따뜻한 고국의 품
오늘은 하바롭스크를 떠나 서울로 향하는 날이다, 항공기는 하바롭스크 출발 2시간 40분 만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어디 머나먼 다른 별에 다녀온 느낌이다. 고국의 품이 이렇게 따뜻해 본 적도 없다. 솔직히 ‘어서 빨리 따뜻한 남쪽 나라로 돌아가야지’ 하면서 하루하루 기다렸던 귀국길이다.
서울에 도착하니 수돗물처럼 흐르던 콧물도 저절로 멎는다. 작아도 내 조국은 조국이다. 그동안 세계 각 지역을 다니면서 조국이 무엇인지 자주 묻는다.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스스로 묻는 시간이 많아졌다. 여행은 타문화에 대한 나의 남다른 호기심뿐만 아니라 감성 또한 살찌우는 값진 양식이다.
(정리 = 김금영 기자)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