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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블라고베셴스크] 중·러 만나는 아무르 강변의 법석을 한국만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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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24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7.02.27 10:25:45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1일차 (서울 → 하바롭스크 경유 → 블라고베셴스크 행)

극동 러시아 관문 하바롭스크

러시아 오로라 항공기를 타고 서울을 떠난다. 오로라 항공은 사할린에 허브를 둔 에어로 플로트의 자회사로서 러시아 극동과 시베리아에 다양한 노선을 가지고 있다. 극동 러시아를 여행하려면 거의 반드시 이용하게 될 항공사다. 출발 2시간 30분, 아무르강의 수많은 지류와 실개천이 보이더니 곧 하바롭스크 공항에 도착한다. 공항에서 열차 역으로 이동해 저녁 7시 10분 열차에 오른다. 열차표는 하바롭스크에 살고 있는 러시아 지인에게 미리 부탁해 놓았다. 여행 가방도 그에게 맡기고 작은 손가방 하나만 가지고 떠난다.

한·러 비자면제협정 이후

오늘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세 번째 오른다. 첫 경험은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 구간 787km, 다음은 이르쿠츠크(Irkutsk)-울란우데(Ulan-Ude) 구간 456km이었다. 모두 몇 해 전에 있었던 일이니 그동안 러시아 극동과 시베리아를 여러 번 드나든 셈이다. 특히 2014년 1월 한·러 비자면제 협정이 발효된 이후에는 러시아를 들고나는 일이 더욱 잦아졌다. 워낙 방대한 영토여서 한두 번의 여행으로는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탑승 팁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Trans Siberian Railroad) 전 구간 9289km를 주파하는 열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엿새 이상 걸리는 열차가 일주일에 서너 번 운행하고 훌륭한 침대 차량을 운영하지만 러시아 열차 여행은 생각만큼 편하지는 않다. 우선 차내 샤워 시설이 없으므로 간단한 세수만으로 여러 날 견디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름철에는 열차 내부가 무척 덥다. 열차가 달리는 중에는 냉방 시설이 가동되지만 정차 중에는 냉방 시설 가동을 멈춘다. 부채 한두 개와 짧은 바지, 얇은 상의는 필수다. 요금도 항공기보다 결코 저렴하지 않다. 내가 했던 것처럼 주요 구간 한번 쯤 탑승해 보는 것이 낫다. 굳이 추천한다면 한국에서 가까운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 사이 첫(마지막) 787km 구간 또는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호 남단을 바짝 끼고 돌아 울란우데까지 가는 456km 구간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경험하기에 좋다.

▲아무르강 건너편에 중국 헤이허가 보인다. 흑룡강성 최북단 도시다. 사진 = 김현주

▲개선문 뒤로는 승리 광장이 있다. 수많은 중국인 관광객들과 이곳에서 마주쳤다. 사진 = 김현주

아무르강 철교

나에게 배정된 4인용 침대칸에는 시베리아 아무르 주(Amurskaya Oblast) 틴다(Tynda)로 가는 철도 기술자 알렉산드르, 난방 기술자 드미트리 등 러시아인 중년 남성 3명이 함께 타고 있다. 다행히 모두 약간의 영어를 할 줄 알아서 즐거운 대화를 잇는다. 열차는 곧 아무르 철교를 건너더니 동시베리아의 광활한 초원을 달린다.

1916년 아무르강 철교 완공은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건설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이다. 이전까지는 여름에는 열차 페리로, 겨울에는 얼어붙은 강물 위에 임시 철도를 가설해 열차를 움직였던 것에 비하면 참으로 의미 있는 대역사였다. 바다처럼 넓은 아무르강에 놓인 2165m 길이의 장대 교량은 당시로서는 토목건설 기술의 집약체였을 것이다. 그것도 혹독한 겨울 날씨와 싸워가며 건설한 다리 아닌가?

열차 안 작은 파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열차 안에는 작은 맥주 파티가 열린다. 안주로 먹은 염장(鹽藏) 명태 안주가 매력적으로 맛있다. 러시아 남성들은 한 겨울 틴다는 정말 멋지다고 꼭 와볼 것을 권유한다. 짧은 만남이지만 내가 틴다에 온다면 마중 나가겠다고 우정을 표현한다. 스쳐 지나는 농장들, 피어오르는 저녁 안개, 언제 봐도 멋진 풍경을 보며 밤새 673km, 12시간을 달려 이튿날 새벽 아무르 주 벨로고르스크(Belogorsk)에 도착했다. 오늘의 목적지 블라고베셴스크(Blagoveshchensk)로 가기 위한 환승역이다.


2일차 (블라고베셴스크 → 비로비잔 행)

고려인 이고르 김

시베리아 횡단철도 주요 역 중 하나인 벨로고르스크역에는 수많은 화물 열차가 대기 중이다. 환승할 열차를 기다리며 역 앞 광장을 서성이던 중 나와 똑같은 생김새의 중년 남성과 눈빛이 마주쳐 말문을 연다. 밖에 나가면 한국인끼리는 얼굴로 통하는 그 무엇이 있어 금세 서로 알아 본 것이다.

이 도시에 사는 고려인 이고르 김(Igor Kim)이다. 나보다 열 살 아래인 이고르는 구소련 시절인 1966년 카프카즈 지방 체첸(Chechnya)에서 출생해 여러 곳을 옮겨 이곳에 정착한 농부다. 지금 서울에서 고려대학교에 다니는 아들 자랑이 대단하다. 이고르가 약간의 한국어를 할 수 있어서 이번에는 한국어로 그와 소통한다. 오늘 새벽 역두(驛頭)에 가지고 나온 채소와 과일을 모두 다 팔았다고 그의 한국산 봉고 트럭의 텅 빈 짐칸을 자랑스럽게 보여준다.

▲벨로고르스크역에서 나와 똑같은 생김새의 중년 남성과 눈빛이 마주쳤다. 이 도시에 사는 고려인 이고르 김은 1966년 카프카즈 지방 체첸에서 출생해 여러 곳을 옮겨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사진 = 김현주

▲드넓은 아무르강. 바다처럼 넓은 아무르강에는 2165m 길이의 장대 교량이 놓였다. 사진 = 김현주

러시아 열차 탑승 시 주의할 점

러시아 사는 것이 괜찮다면서 열차를 타러 떠나는 나에게 또렷한 함경도 억양으로 ‘잘가오’라며 배웅해 준다. 어릴 적 할머니로부터 늘 듣던 바로 그 말씨다. 왠지 울컥해진다. 아침 7시 50분, 블라고베셴스크 행 열차에 오른다. 참고로 러시아에서 열차 시각표는 국내 어디든 모두 모스크바 시간에 맞춰져 있으므로 열차 이용 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게다가 여름철에는 지역에 따라 서머타임을 적용하는 곳도 있으므로 더욱 주의할 일이다. 시간대가 모두 11개나 되는 방대한 러시아에서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방식으로 보인다. 

태평양을 향한 본능

벨로고르스크에서 블라고베셴스크까지는 135km, 열차 두 시간 거리다. 열차는 제야(Zeya) 강의 거대한 습지를 왼쪽에 두고 내려간다. 어제 열차로 건너온 초원, 타이가 침엽수림…. 러시아에서는 그 모든 것이 그저 어마어마할 뿐이다. 러시아 시베리아 여행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들이다. 370년 전, 우마차를 끌고 이 습지를 건너 아무르강에 도달한 로마노프 왕조 시절 러시아인의 개척 정신이 놀랍기만 하다. 태평양을 향한 그들의 본능은 지금도 막을 자가 없어 보인다. 그 무렵 러시아는 이미 알래스카까지 진출했으니 말이다.  

블라고베셴스크 개관

블라고베셴스크는 아무르 주의 수도로서 모스크바에서 8000km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인구 22만 5000명, 1644년 러시아인이 처음 진출한 후 1856년에는 군사 요새를 설치했고, 19세기 말에는 골드러시로 도시가 성장했다. 1900년 청나라 말기 일어난 외세 배척 운동인 의화단 운동(義和團 運動, Boxer Rebellion) 때는 부청멸양(扶淸滅洋), 즉 ‘청나라를 받들고 서양을 물리치자’고 외치는 청나라 열혈 애국청년들의 공격을 받아 도시가 잠시 점령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긴급 파견된 코사크 기병에 의해 진압되고 중국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80년대 말까지는 외국인은 물론 내국인도 방문이 제한됐던 러시아 전략 요충 중의 요충이다. 동쪽으로 제야 강, 남쪽으로는 800m 강폭의 아무르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흑룡강 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중국 국경 도시 헤이허(黑河)와는 여름철에는 페리로, 겨울철에는 얼어붙은 강물 위로 버스가 다닐 정도로 왕래가 빈번하다. 

▲아무르 지역 박물관(Amur Regional Museum)은 자연사, 아무르강 유역 개척사 등에 관한 내용을 전시한다. 전시물들은 청나라와 영토 분쟁의 정당성을 애써 주장한다. 사진 = 김현주

▲1891년 당시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의 방문을 환영해 건립한 개선문. 사진 = 김현주

아무르 어원 풀이

역에서 블라고베셴스크 시내를 향해 걸어간다. 격자형 가로의 깔끔한 도시여서 걷기에 쾌적하다. 도시 설립 초기에 지어진 목조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곧 도심이다. 중국인 관광객이 넘쳐나는 도심은 그들이 뿌리고 간 관광 머니로 화려하게 단장하고 있다. 레닌 광장을 지나서 조금 더 걸으니 드디어 아무르 강변이다.

강 건너에는 중국 흑룡강성 최북단 도시 헤이허의 고층 빌딩이 강물 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빠르게 흐르는 아무르강은 이 시련 많은 땅의 역사를 아는 것 같다. ‘검붉다’는 뜻 이외에 선주민 언어로 ‘큰 물’을 뜻하는 ‘아무르’는 우리말의 ‘물’이나 일본어 ‘미즈’와 발음이 비슷하다. 모두 우랄알타이 계통의 언어인 것이다.

강변의 멋진 건축물들

강변 프롬나드, 널찍한 대로와 블루바드, 많은 공원…. 반듯하게 잘 가꿔진 도시는 걷기에 그만이다. 강변 선착장을 중심으로 이 도시의 멋진 건축물들이 모두 모여 있다. 언제나 느끼지만 한 나라의 건축물들은 국경에 이르러 가장 멋을 부리는가 보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개선문이다. 1891년 당시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의 방문을 환영해 건립한 것이다.

넘쳐나는 중국인 관광객

개선문 건립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많은 중국 관광객들이 온갖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 어색해 보인다. 개선문 뒤로는 승리 광장, 그리고 러시아 어디를 가도 있는 2차 대전 승전 기념비가 있다. 중국인 관광객들과 계속 마주친다. 어디를 가도 거칠 것 없는 그들이다. 하루 수백, 수천 명씩 중국 전역에서 몰려온다고 한다. 중국에서 강 하나만 건너면 늘씬한 금발 미녀들이 활보하는 별천지는 당연히 멋진 볼거리일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볼거리가 많은 도시다. 오늘 금요일, 도시 곳곳에서는 선남선녀들의 결혼식 포토 세리모니가 열리고 있어서 그것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볼거리다.

아무르 지역 박물관

박물관을 찾는다. 여기도 중국 단체 관광객들이 점령하다시피 했다. 아예 전속 중국어 가이드 러시아 여성이 근무할 정도다. 아시아 내륙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의미 있는 변화를 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엉겁결에 그 틈에 끼여 박물관 관람을 시작한다. 아무르 지역 박물관(Amur Regional Museum)은 자연사, 아무르강 유역 개척사 등에 관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호랑이 박제, 운석, 매머드 상아 같은 전시물들이 인상 깊다. 전시물들은 청나라와 영토 분쟁의 정당성을 애써 주장한다. 혁명과 사회주의 시절 기록들, 특히 생생한 혁명화들이 눈길을 끈다.

동포라는 이유 하나로

하바롭스크 행 밤 열차로 도시를 떠난다. 중간 정차역 플랫폼에 나가 바람을 쐬던 중 하바롭스크로 여행 중인 한국계 러시아 여성 두 명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 블라고베셴스크에 사는 안젤리카와 스베틀라나다. 각각 이 씨와 안 씨 성을 가진 두 여성은 사촌이란다. 다행이 미국에 어학연수를 다녀온 안젤리카의 유창한 영어 덕분에 쉽게 대화를 이어간다. 영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피를 나눈 동포라는 이유 하나로 대화는 거침없이 흐른다. 짧은 하루 동안 가슴 뭉클해지는 일을 연거푸 겪는다. 러시아는 우리에게 이처럼 가까운 곳이다. 

(정리 = 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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