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갤러리, 미술관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대체로 아래와 같이 진행된다. 레지던시 지원 접수를 받고 작가를 선정한 뒤 작가들에게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다. 몇 개월 또는 약 1년 동안 작가들은 이 공간에서 작업을 하고, 그 결과 보고 전시가 열린다.
그런데 백아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뭔가 독특하다. 프로그램 기간이 얼마냐고 물으니 “대체로 3~4주”라고 한다. 일반적인 기준과 비교하면 짧아 보인다. 그러면 그 기간 동안 작가들은 어디서 작업하는지 물으니 “특정 장소 한 군데가 정해져 있지는 않다”고 한다. 도대체 뭘까? 이 궁금증은 백아트에서 2월 20일까지 열리는 ‘헤노시스’전에서 해결된다.
전시는 백아트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인연을 맺었거나 앞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할 예정인 작가 8명(해리 도노, 마르코 리오스, 크리스틴 웬, 미튜 센, 다오 듀이 텅, 멜라 자스마, 알리안시아 카니아고, 양정욱)의 작업을 선보인다. 또한 한국 작가 이완을 비롯해 아흐마드 자키 안와, 한용진, 벤캅, 세바스티안, 인디게릴라즈 등 작가 9명의 작업노트 중 발췌한 글 일부를 함께 전시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반적인 레지던시 결과 보고 전시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들의 다양한 국적, 그리고 전시가 이뤄지기 전까지 작가들의 행보를 알면 생각이 달라진다.
백아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지향하는 건 문화 교류 그리고 체험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한 백아트는 멕시코, 인도네시아, 한국 등 다양한 곳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건 프로그램의 진행 방식. 약 3~4주의 기간 동안 작가가 기존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이 아닌, 전혀 다른 환경에 가서 그곳의 문화를 직접 접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즉 이 프로그램에서 작가들의 작업 공간은 제한된 건물이 아니라,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이 된다. 이를 위해 각국의 예술 관련 기관 및 학교들과 협업 관계도 구축하고 있다.
예컨대 2016년 1월 진행된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완 작가는 인도네시아에 가서 그곳에서 사용되는 천연 염색 기법을 체험했다. 그리고 이 경험을 작업 ‘메이드 인 인도네시아’(2016)에 풀어냈다.
작업 방식엔 제한이 없다. 그림을 그리던 작가라고 꼭 그림만, 조각을 하던 작가라고 꼭 조각만 할 필요는 없다. 이것이 작가 9명의 작업노트도 이번 전시에 함께 마련된 이유다. 이완 작가가 인도네시아에서 문화 체험을 한 뒤 받은 느낌을 쓴 시도 전시됐다. “익숙한 삶의 관성으로부터 탈출 /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 망고나무 두 그루가 있는 집 / (중략) / 2주 / 새로운 문화 / (중략) 살아있기 위해 지루하게도 / 발걸음을 옮김.”
최태만 미술평론가도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는 이번 전시에 소개된 글 ‘동행자들을 통해 배운 세계’를 통해 당시 뉴스에서 자카르타에서 테러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듣고 불안했지만, 막상 도착한 현지에서 느낀 평온한 분위기에 놀랐음을 고백한다. 마치 해외에서 뉴스를 보면 북한이 당장이라도 전쟁을 일으킬 것 같지만 정작 서울에 오면 별다를 것 없는 하루가 흘러가듯, 현장에 가야만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있다. 백아트는 이렇듯 작가들이 직접 보고 느끼는 경험을 중요시한다.
백아트 측은 “2011년부터 지금까지 서울을 포함한 멕시코시티, 족자카르타, 노스 캐롤라이나, 로스엔젤레스 등 다양한 지역에서 작가 21여 명과 큐레이터 2명이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며 “다양한 문화권의 작가와 학자들의 만남을 도모하고 그들의 생각과 활동을 교류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작가들이 반복적이고 고립적인 패턴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는 작가들에게도 새로운 창작에 대한 영감을 주는 좋은 기회가 된다”며 문화 교류에 중점을 둔 이유를 설명했다.
문화 교류를 기반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작가들
또 프로그램이 진행될 때 작가들은 구성원을 자유롭게 조합할 수 있다. 문화 교류를 베이스로 둔 ‘따로, 또 같이’ 방식이다. 작가들끼리 마음이 맞으면 같이 만나서 돌아다닐 수 있고, 큐레이터의 동행을 원할 경우 이것 또한 가능하다. 이완 작가와 최태만 미술평론가, 서준호 오뉴월 대표의 경우 자카르타공항에서 만나 같이 이동했다. 숙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오후의 자유로운 시간을 이용해 족자카르타를 통치했던 술탄의 숭전인 케라톤을 방문한 뒤 판따이 데뽁 해변을 가기도 했고, 예술 기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 참여 작가들 또한 자유롭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다. 백아트 측은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 참여 작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서로 인사하거나 여행 일정을 이야기하는 등 교류의 시간을 가졌다. 이후 각자 다른 국가에서 문화 체험을 하고 온 뒤 자체적으로 모여 어떤 점을 느꼈는지 이야기하는 등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는 과정이 인상 깊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모이고 흩어지면서 자유로운 방식으로 작업을 풀어낸 결과가 이번 전시다. 먼저 1층에 전시된 다오 듀이 텅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젓가락을 이용해 개미를 빛 쪽으로 자꾸 옮기는 영상 작업이 설치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개미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타의에 의해 움직여야 할 때도 있지만, 진정 원하는 곳으로 가고 싶은 열망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2층에는 본격적으로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한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된다. 멜라 자스마의 작품도 눈에 띈다. ‘도그워크(DogWalk)’엔 소, 염소, 양 등 동물 코스튬을 한 사람들이 줄지어서 걷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각국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신성시되는 동물이 있다. 이 동물은 어떤 나라에서는 숭배시 되는가 하면 다른 나라에서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기도 한다.
백아트 측은 “인도네시아 이슬람교는 강아지를 불순한 존재로 여겨 잘 만지지도 않는다고 한다. 한국에서 강아지가 가족과 같은 친근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과 다른 양상”이라며 “작가는 문화, 종교적 차이로 발생되는 이런 현상에 관심을 갖고 접근했다. 차이를 갈등이 아닌 재미있는 위트로 풀어내려 한 작가의 시도가 돋보인다”고 밝혔다.
알리안시아 카니아고는 누워 있는 코끼리의 모습을 담은 페인팅, 그리고 돌을 계속해서 발로 차는 영상 작업을 선보인다. 코끼리는 인도네시아에서 과거 흔히 볼 수 있는 상징적인 동물이었지만 현재는 84마리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다.
이 가운데 영상에서는 급진적인 개발 과정으로 파괴된 건물들을 배치해 대조를 이룬다. 백아트 측은 “현재 인도네시아에선 우리가 과거 80년대 겪었던 급진적인 개발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환경이 파괴되고 동물들은 멸종돼 가며, 인간 사회에서도 부유층과 극빈층이 더욱 극심히 나눠지고 있다”며 “작가는 극빈층의 동네부터 왕이 사는 가장 부유한 지역까지 발로 돌을 차는 모습을 보여준다. 극빈층 동네에서는 아무도 제지하지 않던 이 행동을 부유층의 동네에서는 경찰들이 쫓아오며 제지했다고 한다. 작가는 현재 인도네시아가 처한 사회 자체의 모습을 보여주며 많은 생각을 하게끔 유도한다”고 설명했다.
미튜 센의 작품은 백아트 레지던시의 정체성과 맞닿았다. 여행에 열광하는 그는 여러 나라들을 탐험했다. 작업 중 대부분은 여행과 경험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번엔 인도를 상징하는 작은 이미지들을 둥그렇게 배치했다. 백아트 측은 “작품을 하나하나 보면 개별적이지만 이 다양한 작품들이 하나의 원을 이루며 조화를 이룬다”며 “이는 작가들이 따로, 또 같이 모여 자유롭게, 또 조화롭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레지던시 콘셉트와도 맞는다”고 밝혔다. 이밖에 백아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 예정인 양정욱 작가의 키네틱 아트도 함께 전시된다.
3층 전시장에서는 작가들의 협업 작품을 볼 수 있다. 백아트 측은 “해리 도노와 크리스틴 웬이 문화 교류를 바탕으로 작업을 완성했다. 두 작가가 많은 이야기를 나눈 뒤 해리 도노가 먼저 그림을 그리고, 뒤를 이어 크리스틴 웬이 그림을 그렸다. 또한 LA에 사는 마르코 리오스는 인도네시아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한 뒤 그때 느낀 감상을 시각,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 다른 아티스트와 협업 과정을 거쳤다. 이를 퍼포먼스, 설치 미술로 확장시킬 계획도 있다”고 밝혔다.
헤노시스는 고전 그리스어로, ‘하나 됨’ ‘조합’ ‘통일’을 뜻한다.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라 서로의 문화에 대해 잘 몰랐던 작가들이 교류를 통해 새로운 창작을 이야기하는 플랫폼, 이번 ‘헤노시스’전은 그런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