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사업으로 사람들이 모두 떠난 동네에서 일어난 일, 우리가 버리고 떠난 집과 마당의 꽃나무와 개와 고양이와 새들의 이야기, 우리가 까맣게 잊어버린 우리 이웃, 그리고 그들이 말하지 못한 이야기…. 김한울 작가가 이 이야기들을 담은 그림책을 펴냈다.
책을 펼치면 비탈길을 따라 크고 작은 집이 올망졸망 늘어선 동네가 나온다. 옥상에서 빨래가 펄럭이고, 담장 너머로 꽃나무들이 배죽 고개를 내민다. 하지만 이 정겹고 익숙한 풍경엔 ‘재건축 이주 안내’라는 글자가 빽빽하다. 사람들이 모두 떠난 자리, 사람들이 끝이라고 여기는 순간에서 그림책은 시작된다.
사람들은 손때 묻은 가구, 고장난 가전제품, 마당의 꽃나무 등 많은 것을 버리고 떠났다. 하지만 이곳을 터전으로 살았던 건 사람들만이 아니다. 이곳에 뿌리를 내린 풀과 나무, 둥지를 틀고 사는 새들과 길고양이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떠나고 남은 생명들은 여전히 그곳에서 삶을 이어간다.
사람들은 종종 사람만이 생명이 있고 사람만이 권리가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수많은 생명들이 함께 살고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고 작가는 강조한다. 자본의 논리만을 앞세운 개발 사업은 사람에게도 폭력적이지만 동식물에게는 더욱 폭력적임을, 삶의 터전을 빼앗고 목숨을 위협하는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또한 사람처럼 말하지 않고, 요구하지 못하고, 주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함께 살아가는 생명들을 잊어서는 안 되며, 우리가 서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나고 자란 동네가 재개발되는 과정을 몸소 겪으면서 지속적인 회화 작업을 펼쳐 왔다. 작가는 ‘자라나는 집’과 ‘일구어진 땅’이라는 두 번의 개인전으로 잃어버린 집과 공동체에 대한 상실감을 토로한 데 이어, 이 그림책에서는 인간 중심의 개발 논리가 다른 생명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조심스럽게 성찰한다.
그리고 작가는 위기에 내몰린 작은 생명들 앞에 고깔을 쓴 너구리를 보낸다. 작가의 이전 작품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이 너구리들은 집을 지키는 작은 신 같기도 하고, 버려진 이들을 위로하고픈 작가의 마음 같기도 하다. 손때 묻은 낡은 물건과 줄기 꺾인 풀꽃을 소중하게 여기고, 잊힌 동물들을 알아봐 주는 너구리. 하지만 자신들이 살아온 터전을 떠날 수도, 계속 머무를 수도 없는 이들에게 너구리들이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너구리들의 모습이 애잔하기도 하다.
작가는 “마지막 남은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은 참으로 아름답다. 버려진 집이 생기를 되찾고, 깨진 창문 너머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고, 망가진 선풍기가 꽃바람을 뿜으며, 모두가 행복한 얼굴로 함께 하는 꿈같은 밤이다”라며 “그러나 밤은 짧고 현실은 견고하다. 이제 동네는 사라졌다. 마치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텅 빈 흙더미뿐이다. 그래도 봄이 오면 그 흙더미 위에 다시 노란 민들레가 피어날 것이다. 삶은 계속되니까”라고 밝혔다.
김한울 지음, 그림 / 1만 5000원 / 보림 펴냄 / 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