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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27) 목멱산 ②] 日칼날에 숨진 이들 기린 장충단이 쪼그라든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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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29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9.03.04 09:36:11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광희동 4거리에서 길을 건넌다. 잠시 광희빌딩 방향으로 되돌아가면 이어지는 골목길이 계속된다. 남소문동천 물길을 복개한 길이다. 큰길은 DDP에서 광희동 4거리를 지나 장충체육관 방향으로 이어지고 남소문동천은 뒷골목길이 되었다.

이 골목길이 끝나는 지점은 3호선 동국대역 앞이다. 1번 출구 앞 길은 오래된 빵집 태극당이 있는데 그 앞 소공원에는 남소영광장이라는 표지판을 최근에 세워 놓았다. 그리고 길바닥에는 남소영길을 알리는 놋쇠 판이 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학교 학생들이나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도 생소한 지명이 남소영이다. 더구나 남소영길이라니. 길 안내판에 그려져 있는 길의 약도를 보니 우리가 이미 설명해 놓은 남소문동천길을 이런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 지자체가 세워 놓은 안내문에는,

“남소영(南小營)이란 장충단 내 남소문 옆에 있는 터로, 장충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부근에 있던 조선 시대 어영청의 분영이며 수도 방위의 임무를 띤 조선 후기의 군사 주둔지의 딴 이름이다. 이곳에는 남산에서 흘러 조선 세종 때 장마철을 대비해 만든 ‘이간수문’까지 이르는 ‘남소동천’이 위치하고 있었다”라는 설명 판이 세워져 있다.
 

태극당 앞의 남소영길. 사진 = 이한성 교수 

같은 길에 생소한 이름이 왜 두 개?

주체가 다르다 보니 남소문동천(남소동천)을 복개한 이 길을 청계천 박물관은 남소문동천길로, 중구청은 남소영길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이 길에, 이름까지 두 이름이 비숫한 시기에 등장했으니 혼돈이 일어날 것 같다. 같은 길에 두 이름이 붙었으니 빨리 한 이름으로 정리되었으면 좋겠다.

 

‘남소문동천’을 표시한 청계천박물관의 자료.
‘장안연우’ 그림에 남소영길을 그려봤다. 

그리고 여기서 잠시 남소영에 대해서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일전(日前) 이 길을 지나오는데 어느 학인이 남소영(南小營)이란 이름이 생소하다고 무엇 하던 곳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남소영은 무엇 하던 곳이었을까?

조선 후기에는 중앙 군사 조직으로 5군영이 있었다. 대궐의 방위와 수도 한성 방어 책임을 맡은 기관으로 훈련도감(訓練都監),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을 삼군문이라 하였으며, 수도권 외곽인 경기 지역 방어책임을 맡은 총융청(摠戎廳)과 남한산성 방어 책임을 맡은 수어청(守禦廳)을 합쳐 오군영(五軍營)이라 하였다. 남소영은 이 어영청의 파견대였던 것이다. 옛 지도를 보면 지금의 장충단 공원 남쪽, 즉 남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울 동쪽에 많았던 군사 시설들

임진왜란을 거친 조선 후기에는 지대가 비교적 낮은 도성의 동쪽에 많은 군사 시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도 국립극장 위 남산 길에는 활터 석호정(石虎亭)이 자리 잡고 있는데 옛 활터는 평시에는 심신을 단련하는 곳이지만 비상시에는 군사 훈련을 실시하던 곳이기도 했다. 남산에는 석호정과 비파정(琵琶亭)이 유명하였다. 지금의 동국대 서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던 비파정은 활터이면서 조선 정예 교련병대(별기군)의 무예 훈련 장소이기도 했다 한다.

 

인왕산 기슭에서 바라본 남산의 모습. 자료사진

본래 비파정에서는 훈련도감 군사들이 무예를 닦았고, 남소영에서는 어영청 군사들이, 남별영에서는 금위영 군사들이 무예를 닦았다 한다. 1950년대에 쓰인 석호정 중수기에는 이 지역(獎忠壇 後麓)이 십팔기 옛터(十八技 舊址)라는 내용이 나온다. 바로 옛 장충단 권역인 남소영, 남별영, 비파정 지역인데 현 동국대를 포함한 주변 지역에 해당된다.

교련병대(별기군)는 십팔기를 전문으로 익혔다는데, 2월부터 9월까지는 비파정에서, 10월부터 정월까지는 하도감에서 훈련을 하였다.

이제 동국대 안으로 들어가 본다. 전철역 6번 출구에서 오르는 길이다. 에스컬레이터가 놓여 있어 학교구내를 지나 남산 길로 오를 수 있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에 박물관이 있다. 누구나 관람할 수 있는 시설이다. 비록 규모는 크지 않으나 불교 미술에 관련된 소중한 전시물들이 있다. 한 번 둘러보기를 권한다. 그 다음 둘러볼 곳이 정각원(正覺院)이다. 불교 재단에서 설립한 학교이다 보니 학교 안에 법당이 있는데 이 법당 이름이 정각원이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시설이다. 불교에 관심이 없는 분은 건물만 살펴보실 것.

 

경희궁의 정전이었던 ‘숭정전’이 지금은 동국대 경내에 정각원으로 남아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이 건물은 본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0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崇政殿)이다. 경희궁은 조선 광해군 때인 1617년부터 1620년 사이에 지어져서 290년간 조선시대 이궁으로 사용되어왔다. 그런데 1910년에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경희궁 자리에 세우면서 강제로 철거되어 팔려 나갔다. 1926년에 조계사로 이전되었다가 다시 동국대학교 안으로 이건(移建)되어 정각원이라는 법당으로 쓰이고 있다. 경희궁을 복원할 때 원래의 자리로 이건할 것을 검토했으나 낡고 변형이 심하여 결국은 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임금 대신 부처의 안식처가 되었다.
 

동악선생시단을 알리는 표지석. 사진 = 이한성 교수

이안눌 선생의 시혼 서린 동악시단

그 다음 찾아 볼 곳이 동악선생시단(東岳先生詩壇)이다. 학교 서쪽 전산원 옆 건물 화단에 세워져 있는 동악 이안눌(東岳 李安訥) 선생의 시사(詩社) 활동을 기리기 위해 세운 안내석이다. 동악 선생은 택당 이식의 숙부로서 선조, 광해군, 인조 시대를 산 분이다. 시인으로, 정치가로 살았는데 사후(死後)에는 청백리(淸白吏)로 추증되었다. 선생은 무려 4379수의 한시를 남겼다고 한다.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이른바 문치주의를 꽃피웠다는 선조의 시대 목릉성세(穆陵盛世)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동악 선생은 지금 동국대 학생 기숙사가 있는 묵사동(墨寺洞, 먹적골)에 단을 쌓고 그 위에 누(樓)를 지어 시(詩)를 읊었다. 함께 시작(詩作) 활동을 한 이들을 동악시사(東岳詩社)라 부른다. 둘도 없는 친구 석주 권필과 윤근수, 이호민(李好閔)과 홍서봉(洪瑞鳳), 그리고 이정구(李廷龜) 등이었다.

이에 관한 기록이 동악의 후손인 이석의 동강유고(桐江遺稿) 속 동원기(東園記)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시인들과 시를 짓고 풍악을 즐기면서 놀던 다락을 시루(詩樓)라 하였고, 그 단을 시단이라 불렀다 한다. 그리고 동원 마루터기 바위에다 시단을 기념하여 그의 현손인 이주진(李周鎭)이 영조 초에 東岳先生詩壇(동악선생시단)이라 새겨놓았다는 것이다.

이 동악선생시단의 바위는 1984년 동국대학교에서 기숙사를 지을 때 그대로 떠다가 시루 자리인 학생회관 옆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심한 풍화로 그만 쪼개져버렸다 한다. 지금 세워놓은 東岳先生詩壇(동악선생시단) 안내석은 쪼개져 버린 바위의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다.

이 동악시단은 식자(識者)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어서 필사본 한경지략(漢京識略)에도 그 내용이 실려 있다. 고적조를 보면,

“동악시단이 남산 기슭 먹적골에 있다. 옛날 동악 이안눌이 집 동산 기슭에 단을 쌓고 여려 선비들과 더불어 시를 읊었는데 매우 성황을 이루었다.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어서 사람들이 이 단을 입에 올리는데. 단 옆에는 중국에서 가져온 홑꽃잎의 홍매나무(紅梅樹)가 있다.(東岳詩壇在南山下墨洞 昔李東岳安訥築壇于家園麓 與諸文士賦詩甚盛 至今遺墟人皆稱道之此壇 傍有單瓣紅梅樹自中國淂種者也).”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도 어김없이 동악시단을 언급하고 있다. 제택조(第宅)에는 “비파정 위에 시단이 있다”고 하였다. 이제는 비파정도 시단(詩壇)도 시루(詩樓)도 홍매(紅梅)도 없다. 그 홍매 있었더라면 지금쯤 붉은 매화 수줍게 꽃망울 터트렸을 것을.

정조가 평가한 동악-석주의 시 세계

당대 사람들이 석주 권필은 이백에 비견하고, 동악 이안눌은 두보에 비견할 만큼 빼어났다고 한 동악은 어떤 시를 썼던 것일까. 정조의 저서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는 정조가 평한 동악과 석주의 시평이 전해진다. 동악을 평한 것을 보면,

“동악의 시는 갑자기 보면 무미한데 다시 보면 오히려 좋아진다.
비유하면 근원이 샘물이 콸콸 솟아 일시에 천리까지 쏟아져
횡으로나 종으로나 스스로 문장을 이루네.
東岳詩, 驟看無味, 再看却好.  
譬如源泉渾渾, 一瀉千里,  
橫看竪看, 自能成章.”

또 정조는 석주를 어떻게 평했을까?

“석주의 시는 비록 웅혼함은 모자라지만 매끈하고 아름다워 일미(一味)이며
이따금 놀라게 하여 깨우쳐주는 곳이 있다.
‘성당(盛唐)의 수준이다’라고 한다면 그건 아니지만
‘당풍(唐風)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크게 폄하한 것.
石洲雖欠雄渾, 一味裊娜,  
往往有警絶處.  
謂之盛唐則未也,  
而謂之非唐則太貶也.”

시문(詩文)이라면 한가닥 하는 정조의 평이니 두 분 다 좋은 점수를 받은 것이다. 그러면 석주의 시는 이미 소개한 바 있으니 동악의 시 두 편만 읽고 가자. 사월 십오일(四月 十五日)이라는 시 한편 읽는다. 시는 동악이 임진왜란 후 동래부사로 부임하였을 때의 일을 쓴 것이다.

사월이라 보름날   四月十五日
                            
이른 아침 집집마다 곡하는 소리    平明家家哭
천지는 변하여 쓸쓸해지고    天地變蕭瑟
싸늘한 바람은 숲을 흔든다    凄風振林木
깜짝 놀라 늙은 아전에게 물어보았네    驚怪問老吏
곡소리 어찌 이리 구슬픈가    哭聲何慘怛
임진년에 바다 도적 몰려와서는    壬辰海賊至
바로 오늘 성이 함락되었답니다    是日城陷沒
이때 다만 송 사또께서    惟時宋使君
성벽을 굳게 하여 충절 지켰죠    堅壁守忠節
백성들 성안으로 몰려 들어와    闔境驅入城
한꺼번에 피바다를 이루었지요    同時化爲血
쌓인 시체 밑에다 몸을 던져서    投身積屍底
천백 명에 한둘만이 살아남았죠    千百遺一二
그래서 해마다 이날만 되면    所以逢是日
상을 차려 죽은 이를 곡한답니다    設奠哭其死
아비가 제 자식을 곡을 하구요    父或哭其子
아들이 제 아비를 곡을 하지요    子或哭其父
할아비가 손주를 곡을 하구요    祖或哭其孫
손주가 할아비의 곡을 합니다    孫或哭其祖
어미가 제 딸을 곡하기도 하고    亦有母哭女
딸이 제 어미를 곡하기도 하지요    亦有女哭母
지어미가 지아비를 곡하는가 하면    亦有婦哭夫
지아비가 지어미를 곡한답니다    亦有夫哭婦
형제나 자매를 따질 것 없이    兄弟與姉妹
살아 있는 이들은 모두 곡을 합지요    有生皆哭之
이맛살 찡그리며 듣다가 말고    蹇頞聽未終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네    涕泗忽交頤
아전이 나서며 아뢰는 말이    吏乃前致詞
곡할 이나 있다면 덜 슬픕지요    有哭猶未悲
칼날 아래 온 집안이 죄다 죽어서    幾多白刃下
곡할 이도 없는 집이 얼마인뎁쇼    擧族無哭者
(기존 번역 전재)

4월 15일날 이른 아침부터 집집마다 곡하는 소리가 들린다. 늙은 아전에게 그 연유를 물으니 이날이 바로 동래성이 함락되어 부사 송상현이 순절하고 거의 모든 백성은 도륙당한 날이었다. 그날이 다가오니 이렇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다. 두보를 좋아한 동악은 두보의 시풍을 따라 이른바 시로 쓴 역사(詩史)를 쓴 것이다. 목민관으로서 아픈 백성들과 마음을 함께 한 것이다. 절창(絶唱)이다. 또한 금정산 범어사에 가면 대웅전 옆 바위에 동악의 시들이 쓰여 있다. 동악이 동래부사 시절 범어사에 가서 남긴 흔적이다.

이제 내친 김에 시 한 편 더 읽는다. 동악도 석주처럼 동대문을 통해 유배길에 오른 때가 있었나 보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던 때 동악은 관망했다고 해서 사헌부의 탄핵을 받는다. 인조실록을 보면 1624년(인조 2년) 3월 기사에 위기에 처한 동악 관련 기사가 나온다.

“헌부가 아뢰기를: 행 부호군 이안눌은 이괄의 변란 때에 몰래 관망하는 마음을 품고 감히 여러 가지 패역스런 말을 공회석상에서 함부로 하였으니, 그의 임금을 잊어버리고 적에게 뜻을 가진 죄에 대해서 하루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憲府啓曰: “行副護軍李安訥, 當适變之日, 潛懷觀望之心, 敢以許多悖逆之言, 肆發於衆會之中, 其忘君向賊之罪, 不可一日容貸)”

그렇게 해서 동대문을 지나며 석주를 그리는 애도시 한 편을 쓴다.

微臣罪大死猶宜    미천한 신하 죄가 커서 죽어 마땅하건만
竄逐遐荒識盛時    먼 곳으로 내치시니 성대임을 알겠네
行過郭東花落處    동대문 밖 꽃 떨어진 곳을 지나면서
故人詩骨至今悲    고인 시재(詩才) 생각에 지금도 슬퍼지네

동악이 석주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시는 한두 편이 아니다. 그런 두 사람도 이제는 옛 책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모두 시간 속으로 떠나갔다.

수십만 명 모였던 장충단이었는데…

이제 동국대 교정을 떠나 장충단 공원으로 내려온다. 장충체육관, 신라호텔, 동국대 사이에 낀 조그만 공원이다. 그러나 시간을 100여 년 되돌리면 장충단은 국립극장, 유소년 야구장, 동국대, 장충체육관, 신라호텔, 그 위 지유센터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1900년대 초는 남산동록(南山東麓)이 모두 장충단 권역이었다는 말이다. 장충단이 무엇 하는 곳이기에 이렇게 넓은 권역을 차지했던 것일까? 1900년(광무4년, 고종 37년) 10월 어느 날의 고종실록을 보자.

“전 남소영(前南小營)의 유지(遺址)에 장충단(奬忠壇)을 세웠다. 원수부(元帥府)에서 조칙(詔勅)을 받들어 나랏일을 위해 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前南小營遺址, 設奬忠壇. 元帥府欽奉詔勅, 爲死於王事人致侑也. 奬忠壇)”

을미사변(1895년)으로 비운의 최후를 맞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가 떠나고 5년, 고종은 남소영(南小營) 터에 장충단을 세워 을미사변 때 순사한 장졸들의 영혼을 배향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처음에는 을미사변 때 전사한 시위대장 홍계훈(洪啓薰), 영관(領官) 염도희(廉道希)·이경호(李璟鎬)를 주신으로 제향하고 대관(隊官) 김홍제(金鴻濟)·이학승(李學承)·이종구(李鍾九) 등 장병들을 배향하여 제사지냈다.

그러나 ‘창선(彰善)·표충(表忠)의 일이 어찌 군인에게만 한할 것이랴(表忠奬節, 奚別文武? 疏陳頗爲近理, 令掌禮院稟處)’는 육군법원장 백성기(白性基)의 제청에 의해 다음해부터 을미사변 때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을 비롯, 임오군란·갑신정변 당시에 순의(殉義), 사절(死節)한 문신들도 추가, 문무의 많은 열사들이 장충단제향신위(奬忠壇祭享神位)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장충단은 곧 일제에 의해 폐지되고 만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이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으로 공원화하고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칼날에 숨진 이들을 기리는 장충단비. 사진 = 이한성 교수
장충단 공원에 생뚱맞게 남아 있는 수표교. 수표는 홍릉 세종대왕기념관 앞뜰에 있다니 하루 빨리 제 위치를 찾아줄 일이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지금 장충단 공원에는 장충단비(奬忠壇碑: 서울특별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가 남아 있다. ‘奬忠壇(장충단)’ 세 글자는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글씨라 하며 뒷면에 쓴 143자의 찬문(撰文)은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의 글이라 한다.

아담한 공원에는 생뚱맞게 수표교가 동소문동천 위에 걸려 있다. 그 밑을 흐를 동소문천은 메마른 건천으로 남아 있다. 수표교는 1959년 청계천을 복개할 때 뜯어서 신영동으로 옮겼다가 1965년 이곳으로 옮겼다 한다.

그런데 함께 있어야 할 수표(水標)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이유인지 수표는 홍릉 세종대왕기념관 앞뜰에 서 있다. 하루 빨리 수표와 수표교를 함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수표 없는 수표교는 애들 말로 ‘뭐 없는 뭐’ 아니겠나.
 

동소문 동천의 흔적이 메마른 채 남아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해방 뒤에도 수십만 명이 모일 정도의 광장이었던 장충단 공원이 지금은 한 뼘만큼만 남아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배호 노래처럼 쓸쓸해진 장충단

이곳에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가수 배호다. ‘안깨 낀 장충단 공원 그 누굴 찾아 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이른 봄 찾아간 장충단 공원에는 안개도 낙엽송도 없다. 그저 미세먼지 낀 공원이 있을 뿐.

또 하나 생각나는 일은 1957년 5월 있었던 자유당 독재에 항거한 야당의 시국 강연회가 열린 곳이란 사실이다. 그 전 해에 있었던 총선에서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선풍적인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며 나섰던 해공 신익희 선생이 급서(急逝)하고, 여당 자유당의 ‘갈아봤자 별 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몰린 선거. 부정과 부패로 물든 정권에 대한 몸부림으로 기획된 조병옥 박사 등에 의한 시국강연회는 정치 깡패 유지광 패거리의 난동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 시절 수십 만 명을 모을 수 있는 공간이 한강 백사장과 장충단 공원이었음을 우리도 잊고 살고 있다. 손바닥만큼 남은 장충단을 보면서 많이 변했다는 상념에 젖는다.<계속>

 

신라호텔 등이 들어서기 이전의 장충단 모습.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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