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7호 김금영⁄ 2019.08.13 14:54:42
인력거에 황제처럼 올라탄 서양인 한 명을 여러 명의 동양인이 둘러쌌다. 이들은 코카콜라, 맥도날드 로고가 새겨진 빨간 부채로 서양인을 호위한다. 그리고 서양인 앞에 무릎을 꿇은 두 동양인의 모습은 작게 표현돼 마치 거인을 마주한 소인국의 나라에 불시착한 것 같다. 다소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이 광경은 중국 작가 왕칭송의 손길을 거쳐 탄생한 ‘캔 아이 코오퍼레이트 위드 유(Can I Cooperate with You)?’ 작업이다. 그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한미사진미술관이 중국 사진계에 설치미술과 행위예술을 접목시켜 중국 현대 사진예술에 반향을 일으킨 왕칭송 작가의 개인전 ‘더 글로리어스 라이프(The Glorious Life)’를 8월 31일까지 연다. 스스로의 작업을 ‘사회적 다큐멘터리’라 부르는 그의 작업은 중국 사회현상에 대한 식견과 날카로운 직감을 담았다.
특히 중국 문화대혁명 이후 급격한 경제 개방이 이뤄지고, 세계화와 도시화의 급물살을 탄 소비문화가 중국에 상륙하면서 중국인이 겪게 된 혼란에 주목했다. 앞서 언급한 작업 또한 중국과 서양의 문화가 만나 갈등하고 충돌하는 모습을 작가의 방식으로 연출한 것.
김선영 한미사진미술관 큐레이터는 “왕칭송은 본래 회화 작업에 몰두했으나 1990년대 후반 사진으로 전향했다. 경제 개방 이후 중국 사회는 빠른 변화를 겪었는데, 이 속도가 너무 빨라 회화로는 포착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모습을 디지털로 합성해 작업한 왕칭송의 초기 디지털 포토 몽타주 사진은 1990년대 전통 다큐멘터리 사진에 머물러 있던 중국 사진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고 말했다.
“나는 스스로를 예술가보다는 지속적으로 사회의 현장을 담는 기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는 작가의 가치관은 그의 대표 시리즈인 ‘더 글로리어스 라이프’를 탄생하게 했다. 이번 전시명이기도 한 ‘더 글로리어스 라이프’는 그가 1997~2018년 진행한 사진작업을 통틀어 지칭한다. 한글로 번역하면 ‘생활 예찬’인데, 화면 속 이야기들은 오히려 자신이 마주하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대차게 비꼬는 느낌이다.
예컨대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작가의 초기작 ‘픽 업 더 펜, 파이트 틸 디 엔드(Pick up the Pen, Fight till the End)’는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 쓰였던 포스터를 차용했다. 본래 포스터에는 어린 소녀가 중국의 근현대 정치가 마오쩌둥을 배경으로 중국의 전통 붓을 든 모습이 담겼다. 마우쩌둥은 자본주의적 사상을 경계한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 등장했다. 작가는 소녀 대신 자신의 모습을 합성했고, 손에는 전통 붓 대신 서양화를 그리는 용도의 붓을 들었으며, 손 앞쪽 테이블엔 금과 외국 지폐, 입시에 필요한 책들을 배치했다.
또 다른 작품 ‘리퀘스팅 부다(Requesting Budddha) 시리즈 No.1’에는 가부좌를 튼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불교는 중국인에게 심적 위안을 주는 뿌리 사상과도 맞닿은 종교인데, 작가는 코카콜라 상표가 부착된 의자 위에 앉은 채 손에 술, 담배, 돈, 금 등을 들었다. 어느 하나라도 손에서 놓치기 싫은 모양새다.
김선영 큐레이터는 “1990년대 후반 작가가 작업을 하던 시기 중국의 젊은 세대는 혼란을 겪었다. 마오쩌둥의 글을 읽고 자라면서 정치적 사상에 물들고 꿈을 키웠지만, 자본주의 사상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그들이 바라보는 이상에 변화가 온 것”이라며 “부자가 되고,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1990년대 중국에 만연하게 퍼졌다. 이 자체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너무 급격한 변화가 이뤄지다보니 문화적 충돌 등 혼돈이 생겼고 작가는 이를 포착해 작업에 드러냈다”고 말했다.
중화사상에 맞서 질문 던지는 중국인 작가
1978년 1인당 GDP가 379달러에 불과했고, 농촌 빈곤인구가 2억 5000명에 달한 농업 국가였던 중국은 오늘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에 올라섰다. 이런 드라마틱한 발전은 중국에 자문화 중심주의적 사상인 ‘중화사상’을 발생하게 했다. “세계에서 중국이 최고”라 외치는 중국인의 목소리. 하지만 작가는 풍요로워만 보이는 중국의 경제 성장 이면에 드리워진 어두움을 발견했다.
벽 한쪽을 채운 긴 파노라마 작업 ‘나이트 레벨스 오브 라오 리(Night Revels of Lao Li)’에서도 이 점이 드러난다. 이 작업은 작가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이뤄졌다. 공무원이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사회에서 받은 위로금과 부인의 장학금까지 가진 것을 다 쏟아 부어 산 필름카메라로 찍은 사진이다. 중국의 옛 지식인이 등장했던 고서화를 차용해 방탕하게 풍류를 즐기는 현대인의 모습을 표현했다. 작가의 실제 어려운 현실과는 매우 대조되는 화면이었다.
김선영 큐레이터는 “작가는 중국 고서화의 내용을 치밀하게 공부해 현대에 어떻게 빗댈 것인지 연구한다. 사회를 이해하는 예리한 직감이 그의 작업의 근간이다. 단지 스케일만 크다고 유명한 것이 아니다”라며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똑똑하다고 자칭하는 현대의 지식인이 정작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고 외면하며 안주하는 태도를 비판했다”고 설명했다.
올림픽을 상징하는 5개의 고리를 등지고 선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한 ‘더 글로리 오브 호프(The Glory of Hope)’도 눈길을 끈다. 특히 진흙탕 속 파묻혀 겨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5개의 고리가 궁금증을 자아낸다.
김선영 큐레이터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 월드 엑스포 등을 열며 눈부신 발전을 맞은 중국은 ‘우리 중국이 가장 큰 국가’라는 의식을 국민에게 심었고, 그들에게 핑크빛 미래를 꿈꾸게 했다”며 “하지만 이 이상은 실제 국민들의 삶과 괴리가 있었다. 이를 본 작가는 ‘허황된 이상을 심은 건 아닌가?’ ‘지금 힘들어도 중국의 미래는 무조건 밝을 것이라는 맹목적이고 획일적인 이상을 강요하는 건 아닌가?’ 질문을 던지며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기를 제안했다”고 말했다.
눈부신 겉모습 뒤 숨겨진 초라한 이면은 ‘도미토리(Dormitory)’에서 직설적으로 다가온다. 마치 장난감 박스와도 같은 작은 공간에 나체의 사람들이 들어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이 충격적이다. 빛나는 미래를 꿈꾸며 대도시로 이주했지만 생계의 어려움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현실을 표현한 모습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대도시 베이징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한 작가 자신이 겪은 경험이 바탕이 됐다.
한국 못지않게 치열한 입시교육 경쟁도 작가의 화면에 담겼다. ‘팔로우 유(Follow you)’에서는 산더미 같은 책 사이 시체처럼 엎드린 사람들 속 오로지 작가 한 명만 고개를 들고 있다. 하지만 작가 또한 링거를 꽂고 눈에 초점 없이 앉아 있는 모습이 숨 막히다.
김선영 큐레이터는 “이 작품은 국내의 실정과도 맞닿는다. 중국에서도 중고등학생 입시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좋은 대학에 가야 돈을 잘 번다는 사상에 휩쓸린 중국인의 모습을 희화화한 작가는 진정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안락하고 행복한 삶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사진 작업뿐 아니라 영상 작업도 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중국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미화시킨 부분만 기록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제기하는 대형 작업 ‘더 히스토리 오브 모뉴먼츠(The History of Monuments)’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작업 과정을 담은 영상 작업이 함께 설치됐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지닌 공격성, 잔인함에 대해 고찰하는 영상 작업들도 볼 수 있다. 또한 이번 전시를 기념해 동명의 사진집이 전시 개막일에 맞춰 발간돼 전시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김선영 큐레이터는 “단순히 현상의 관찰자가 아닌 시대 흐름을 나타내는 문화적 아이콘인 왕칭송은 중국사회가 처한 현실과 나아갈 방향성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보여준다”며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의도를 읽고 함께 논의의 장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