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중국인 친구와 언어교환을 시작했다. 교환학생 경험은 있는데, 중국어 쓸 기회가 없다 보니 까먹어 가는 게 내심 아쉬웠다. 학원 다니자니 실생활에 크게 도움 될 것 같진 않고, 과외를 하면 비쌀 것 같고. 이래저래 따지다가 나 같은 사람들이 언어 교환할 친구를 구하는 인터넷 카페를 찾았다. 가입만 해두고 ‘눈팅’하길 수차례. 결국, 나이가 비슷한 20대 여성한테 눈 딱 감고 연락했다. 다행히 잘 맞는 친구라서 매주 만나 수다 떨기로 했다. 물론 비율은 한국어 70%에 중국어 30% 정도다. 순전히 퇴보한 내 중국어 실력 때문이다.
언어교환을 네 차례 정도 해본 터라, 이번에도 동년배 여성들의 관심사인 화장품이나 연예인 등이 주된 대화겠구나 싶었는데 오산이었다. 심오한 친구였다. 우린 첫 만남부터 ‘진정한 행복’이나 ‘슬픔’에 대해 토론했다. 면접장에 와 있는 기분도 들었지만, 나 같은 인간은 평상시에 떠올리지 않을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그 친구 사고의 깊이를 가늠케 했다. 다소 철학적인 질문에 말문이 막혀 고민하던 찰나, 그가 내 직업에 흥미를 보이기에 잠시 벗어날 기회다 싶어 냉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묻는 대로 한국의 언론사들이나 기자에 대해 설명하다 보니 나도 문득 궁금해졌다. 가끔 중국 매체 기사도 보는지라 중국은 어떤 매체가 공신력 있냐고 물었다. 돌아온 그의 대답은 이랬다. “난 중국 매체 안 봐. 솔직히 중국은 공산당이잖아. 기사에서 믿을 내용 하나도 없어. 공산당 유리하게 다 잘라버리거든. 난 그래서 한국이 좋다고 생각해. 모두가 정치적 자유 아래 살잖아.” 갑자기 머리가 띵했다. 역시 허를 찌르는 친구다. 잊고 있었는데, 우리는 자유의 공기에서 숨 쉬고 있었다.
한국은 명실상부 민주주의 국가다. 우리는 법적으로 출판·결사·언론의 자유 등 정치적 자유를 보장받는다. 그런데 나는 그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약간은 낯부끄럽게 느껴졌다. 정작 우리의 민낯은 ‘편 가르기’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뜻깊은 해다. 진정한 자유의 시발점 ‘광복’을 위해 많은 이들의 희생을 거친 결과다. 그러나 해묵은 이념싸움과 여전한 편 가르기에 그 의미가 다소 퇴색되는 듯하다. 특히 정치판은 편 가르기의 온상이다. 쌍심지부터 켜기 일쑤다. 서점가에서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언급 덕분에 얻게 된 반사효과라고는 할지라도, 식민사관으로 무장한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흥행을 거듭하고 있다.
편 가르기, 이념싸움이 그렇게 중요할까. 분열과 삿대질을 멈추고, 고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한 이들의 뜻을 기릴 순 없을까. 독립운동, 임시정부 수립, 광복 그리고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모두 되새기고, 치욕과 영광 모두 우리였다고 따뜻하게 포용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고된 역사 속 그분들께 감사하다고, 그 덕에 우리가 이만큼 자유로운 세상에 산다고 말씀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