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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62) 녹운탄] “저승 가서도 나무 하시오?” 물은 양반의 노비시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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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83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09.14 11:20:58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오늘 찾아가는 길은 경교명승첩 속 녹운탄(綠雲灘)이다. 녹운탄이 어디인지는 옛 지도나 지명으로 기록된 문헌이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아마도 겸재는 그곳을 그리면서 자신의 느낌을 그렇게 형상화하여 이름 지은 것이리라. 다행히 겸재 전문가 최완수 선생이 그 지점을 찾아내 밝혔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최 선생이 찾아낸 곳은 지금의 지명으로 보면 남종면 수청1리 남한강가다. 우선 겸재의 그림 녹운탄부터 살펴보자(그림 1).

그림을 보면, 우뚝 솟은 산줄기가 이어지며, 강물에 이르러 절벽을 이루면서 떨어진다. 절벽 위에는 숲 속 정자가, 그리고 흘러내리는 산줄기에는 번듯한 기와집 네 채가 자리 잡았다. 그곳에서 강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버드나무 두세 그루가 서 있다.

곰곰 살피면 옆으로는 사립 울타리에 초가 두어 채가 보인다. 그 초가로부터는 강으로 길이 이어진다. 강물에는 일엽편주(一葉片舟) 한 척, 뜸(篷)으로 햇볕을 가리는 작은 거룻배 한 척이 있다. 사공은 이물(뱃머리)에서 부지런히 삿대질하여 배를 이곳 언덕으로 향해가는 듯 보인다. 고물(배꼬리, 船尾)에는 갓을 쓴 것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있다. 아마도 강 건너에서 이곳 기와집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궁금증을 일으킨다.

 

그림 1. 겸재 작 녹운탄. 

겸재의 그림에 필자가 표시를 해 보았다. 우선 강을 보자. 이 강의 남쪽은 겸재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광주군 남종면 수청1리다. 북쪽은 그림에는 보이지 않지만 양평군 양서면 도곡리로, 지금의 양서초등학교 앞 강변이다. 산은 좌측 끝 기슭만 조금 그려서 살짝 보이는, 수청리(水靑里) 마을의 주산 해협산이다. 높이가 528m나 되는 산으로 호젓한 산행을 즐기는 이들은 일찍부터 다니던 곳이다.

그림 속 ‘개 이빨 모양’ 바위는 진짜였을까

그 산에서 능선이 이어져 내려와 남한강까지 이어진다. 그 산줄기 끝은 바위들이 개의 잇빨(犬牙)처럼 삐죽삐죽 하다. 정말 그랬을까? 겸재가 그림의 완성도를 위해 그렇게 그린 것은 아닐까? 아쉽게도 이제는 확인할 길이 없다. 팔당댐이 들어서면서 필자가 푸른 선으로 표시한 곳까지 수몰되어 수중에 가라앉았다. 그래도 궁금하니 일단 미뤄놓는다. 또 산이 이렇게 고산준령으로 이어졌을까? 필자가 최근에 찍은 사진(88쪽 사진 1)과 비교해 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자, 이제 남종면 수청리로 출발이다. [대중교통으로 가자면 지난 호에 소개한 분원보다도 더 오지인데 일단 퇴촌까지는 전호(前號)에 소개한 방법으로 간 후 38-2, 38-21, 38-22, 38-23, 38-24, 38-26, 38-52로 환승하실 것. 단 인내가 필요합니다. 또 하나 방법은 양평버스터미날에서 4-5번 버스가 09:30, 17:30 하루 2회 운행되니 이 차편을 이용하고 돌아올 때는 위의 퇴촌행 버스를 타면 편리합니다. 권하기는 뭣하지만 하루 나그네길 이렇게 가면 느리게 살기에 좋습니다.]

 

지도 1. 녹운탄 주변 지도. 

이제 수청리의 위치를 살펴보자. 지도 1은 수청리(녹운탄) 주변 지도다. 분원(지도의 4 표시)에서 남한강변을 따라가면 수청리(지도의 1)에 이른다. 강 건너는 양평 강서면 도곡리이다. 표시 3은 중앙선 신원역 근처 신원1리인데 옛 월계나루가 있던 곳이다. 5는 양수리, 6은 옥천냉면으로 유명한 동네 옥천리이다. 겸재는 수청리(1 지점)를 남한강에서 비스듬히 바라보며 녹운탄이라는 이름으로 그렸다.

 

옛 지도 1. 영조 때 발간된 광여도. 

옛 지도에는 어떻게 그려져 있을까? 옛 지도 1은 영조 연간에 간행된 광여도(廣輿圖)인데, 겸재의 그림과 동시대에 발행된 지도이니 겸재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도 속 번호 1은 수청리이다. 여정승 묘(呂政丞墓)와 정(亭)이 그려져 있다. 그 시대 다른 지도들에도 여정승 묘와 정(亭) 또는 사(舍)가 그려져 있다.

 

옛 지도 2. 

다른 옛 지도 2를 보면 남한강 여울(灘)의 이름들이 보인다. 신원리 앞 월계나루는 월계탄(月溪灘), 지금의 수청리 앞 강에는 청탄(靑灘), 아신역 앞쪽 강물은 대탄(大灘)이다. 그리고 강북 쪽 길이 지금의 6번 국도(경강국도)인데 월계탄 앞, 청탄 앞, 대탄 앞 길에는 점막(店幕)이 그려져 있다. 육로로는 관동대로(關東大路, 평해대로)이며, 물길로는 남한강 물길 나루이기에 주막도 자리하고 여행객들 물품을 팔던 가게들이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수청리 마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의 녹운탄 속 기와집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여정승(呂政丞) 집을 그린 것이리라. 여정승이 누구이길래 이곳에 집을 짓고 산 것일까? 그리고 이곳에 묻힌 것일까? 수청리 입구에는 묘소 안내판이 붙여져 있다. ‘여성제 묘역 및 신도비(呂聖齊 墓域 및 神道碑) 500m’. 여성제는 누구였을까? 우리에게는 낯선 분이지만 영의정까지 오른 분이니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리된 자료를 인용해 본다.
 

여성제 선생 묘역.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여성제 선생 묘소의 광주시 자료사진.

여성제(呂聖齊, 1625년/인조 3 ~ 1691년/ 숙종 17)

참판을 지낸 여이징의 아들로, 인조비인 인열왕후의 아버지인 한준겸의 외손자. 26세인 1650년(효종 1)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1654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같은 해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정9품 검열(檢閱)이 됨. 이후 북평사, 지평, 집의, 동부승지를 거쳐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이어 내직으로 돌아와서 호조참의, 대사간, 좌부승지를 거쳐 54세인 1678년(숙종 4) 강릉부사가 되고 병조참판, 좌승지를 거쳐 예조판서에 특진.

56세인 1680년(숙종 6)에 조정에서 보사공신(保社功臣: 남인 세력을 몰아내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는 데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린 칭호)을 추가로 선정할 때, 공정하지 못한 공신 추록을 반대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서 좌천.

이듬해 현종의 국상 때 국상도감제조로 공로를 인정받아 숭정대부에 올라 도승지를 거쳐 판의금부사, 우찬성, 좌찬성을 거쳐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내고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64세인 1688년에 우의정이 됨.

1688년, 박세채가 숙종에게 동평군 이항을 총애함이 지나치다고 간하였을 때 박세채를 변호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경원부(慶源府)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1689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름.

여성제는 서인 계열의 소론으로, 당시 집권층인 남인과의 의견 충돌로 세 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전임. 이때 남인들이 성혼-이이를 문묘에서 출향하려 하자 부당하다고 반대 소를 올렸다가 죄를 얻어 양강으로 귀향 갔다가 풀려났지만, 인현왕후의 폐출 소식을 듣고 상경해 반대하는 소를 올림. 이때 오두인-박태보 등은 이를 반대하다 죽임을 당했지만 결국은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고향(지금의 수청리)으로 내려가 울분으로 인해 1691년 8월에 6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음. 저서로는 ‘운포집’이 있고, 시호는 정혜(靖惠).


궁금증이 발동하여 여성제 선생 집과 묘소를 찾아 본다. 마을 당(堂)나무 아래 모여 앉은 노인들이 잘 알고 계신다. 강가 나루 좌측 산 밑인데 생가는 이미 무너져 없어졌고 사랑채 하나 남아 있었는데 지난해 문화원이 복원을 위해 철거해 갔다는 것이다. 나루 옆 산자락은 아쉽게도 건축 쓰레기만 남은 공터로 변해 있었다. 다행히 기와는 남아 있어 겸재의 녹운탄을 기와로 만나본다.

묘소는 마지막 집 표고 재배지 위로 올라야 하는데 묘도가 정비되어 있지 않아 도저히 오를 수 없었다. 광주시가 조만간 정비할 것 같으니 다음 기회에 올라 보기로 한다. 다행히 광주시에서 찍어 놓은 사진으로 대신한다.

여운형을 좌익으로 내몬 아픔 아직도 느껴져

“여씨 문중에서 시제(時祭)를 안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매년 봄에 지내기는 하는데 그다지 규모 있지는 않다고 한다. 몽양 여운형이 좌익으로 몰리면서 여(呂)씨들이 고향을 많이 떠났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곳 청탄과 하류 월계나루 남북 옛 양근 땅이 함양 여씨 세거지였다.

기왕 여성제 선생 향리에 왔으니 선생에게 보내 준 주변 인물들의 헌시 두 편만 읽고 가자. 선생이 북방에 절도사로 갈 때 朴世堂(박세당)이 보낸 시다.

長白東連鐵嶺高 장백산 동으로 철령 높이 이어지고
關山風雪擁征袍 국경 풍설은 도포를 휘감았네
封侯本自男兒事 봉후는 본래 장부의 일이거늘
況是君家有寶刀 하물며 그대 집안 보도가 있음에랴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노론 4 대신 중 한 명인 한포재 이건명의 보낸 만사(輓詞) 한 편 읽는다.

영상 여성제 만사〔呂領相 聖齊 挽〕
出入淸班四十秋 출입은 벼슬 드나든 지 사십 년
六卿三府遍周流 판서와 정승을 두루 역임하였네
大防全節無標榜 대방의 온전한 절개도 표방하지 않고
獻可孤忠屬退休 헌가의 외로운 충정 간직한 채 물러났지
山嶽尙思雲雨澤 산속에서도 운우의 은택을 생각하고
江湖漫帶廟堂憂 강호에서도 부질없이 묘당의 근심 품으셨건만
天時人事今相促 천시와 인사가 지금 서로 재촉하여
箕尾歸眞不暫留 조금도 지체 없이 기미성 타고 돌아가셨네 (기존 번역 전재)

 

사진 1. 녹운탄의 현재 모습.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다시 겸재의 그림으로 돌아와 보자. a 표시 지점이 여성제 선생이 거주하던 집이다. 지금은 산 아래 건축 쓰레기 속 빈터로 남았으며 아래로는 개인 밭들이 있다. b는 예전 청탄나루터 자리인데 지금도 나루터로 남아 있다. 오랜 느티나무 아래 있던 시골 나루터가 이제는 세련된 쉼터에 화장실까지 갖춘 동화 속 나루터로 변했다. 4.7톤 된다는 배도 한 척 있는데, 2004년 운항을 개시해 이곳 수청리에서 강 건너 양평 도곡리까지 이어주는 나룻배였다.

아름다웠던 수청호 배, 다시 운항됐으면

전호에 이야기했듯이 남종면은 원래 양평에 속한 지역이다. 수청리에서 광주까지 나가려면 참으로 먼 길이다. 따라서 수청리 사람들은 장날이면 양평장을 다녔는데 대중교통편이 없었다. 그래서 나룻배로 강을 건너다녔는데 그도 여의치 않자 광주군에서 주민들 교통편으로 운항을 시킨 배였다. 어쩌다 우리 같은 외지인이 가도 뱃삯 1000원이었던가…. 그렇게 강을 건너 주었다. 잠시 건너는 강이지만 팔당댐이 막혔으니 청탄(靑灘)의 여울은 없고 물 맑고 경관 좋은 최고의 호숫길이었다.

요즈음도 수청리 나루터에 가면 수청호(水靑號)가 있지만 아름다운 강가에 매어져 있을 뿐이다. 선장님께 졸라도 배는 뜨지 않는다. 2016년 9월부터 앞에 소개한 양평행 버스가 하루 2회 다니게 되니 그나마 승객이 없어 수청호는 사진 모델로만 남았다. 그냥 퇴역시키지 말고 관광용으로라도 활약을 했으면 좋겠다. 겸재의 녹운탄 속 뱃사공처럼 선장님도 다시 조정간을 잡을 수 있게.

 

지도 2. 겸제 작 ‘녹운탄’ 속 위치들. 

그림 속 c 지점은 여성제 선생 묘소가 있는 산기슭이다. 아울러 요즈음 지도(지도 2)와 필자가 도곡리에서 수청리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사진 1)을 함께 올리니 살펴보시기를.

삼연 김창흡의 시에도 묘사된 ‘개 이빨 바위’

수청호 넘어 아름다운 청탄을 바라보면서 330여 년 전 1688년 이곳을 지나간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선생을 떠올린다. 그는 청풍 부사로 있는 둘째 형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을 찾아 뱃길 유람을 떠난다. 미호 석실에서 출발하여 명승을 감상하고 시를 지으며 여가(呂家)에서 머물고 청탄을 지나갔다. 그 기록이 삼연집(三淵集) 속 단구일기(丹丘日記)로 기록되었다. 이 앞 강을 지나간 기록을 보자.

(3월) 초 4일
(앞 생략).
월계에 들어가니 어둠이 내렸다. 물가는 희미했다. 강 안쪽을 비추어 보니 북쪽 강안은 긴 벼랑이 둘러 있고 지나는 이는 없다. 어부의 노랫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이때 어둠 속에서 들려 온다. 어둠 속에 4, 5리 가서 검단에 도착, 여가촌에 묵었다. 이곳은 강 남쪽 기슭이다. 이날 50리를 움직였고 시 일곱 수를 지었다.

초 5일
아침은 흐렸으나 저녁은 개였다. 해뜰 무렵 출발해 여가정을 지나며 바라보니 시원하기는 한데 트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강안은 빽빽하게 비쳐 자못 눈여겨볼 만하다. 강안을 도니 노온탄인데 물길이 높아 여울이 심히 사납다. 가운데 단단한 돌이 많고 돌이 개 이빨처럼 삐죽해서 바위는 사납고 물은 노하여 솟구친다. 찬 포말을 사람에게 뿜어대니 심히 두렵다 할 만하다.

入月溪有暝色. 洲渚微白. 照見江裡. 長遷繚繞北岸. 而無一行者. 漁歌犬吠. 時自茫昧中送響. 暝行四五里. 到黔丹呂家村投宿. 此江之南岸也. 是日行五十里. 得詩凡七首.

初五日. 朝陰晩晴. 平明發船過呂家亭. 望之殊瀟灑. 所未者寬敞. 然江岸映蔚. 頗可留目. 岸轉爲老溫灘. 水道高仰. 瀧勢甚悍. 中多頑石. 石犬牙錯. 以磯悍水怒騰沸. 寒沫吹人. 甚可怕也.


삼연은 월계나루를 지나 여정승 댁에서 하루를 지낸다. 다음날 새벽 길을 떠나는데 강안을 돌아 만나는 여울을 노온탄(老溫灘)이라 했다. 청탄을 삼연은 노온탄, 겸재는 녹운탄(綠雲灘)이라 했으니 시인과 화가는 자신의 예술 작품 속에서는 땅이름도 자신의 영감으로 바꾸었나 보다. 이 글에서 주위의 바위 모양을 개 이빨처럼 “삐죽삐죽하다(石犬牙錯)” 했으니 겸재 그림 속 삐죽삐죽한 바위들은 비록 수몰되었으나 사실적으로 그린 것 같다. 월계탄, 청탄, 대탄도 팔당댐 이후에는 잔잔한 호수가 되었으니 삼연의 저 글로 여울의 그리움을 달래 본다.
 

지금은 운항이 중단된 수청호.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바람, 햇볕, 사람마음이 따뜻한 신원1리

이제 강건너 양평 땅으로 가 보자. 경의중앙선 신원역이다.

신원역은 옛 월계역(月溪驛)이 새로 옮기면서 나온 이름인데 신원역 뒤 언덕에는 몽양 여운영의 생가가 있다. 지금은 전시관으로 꾸며 놓았다. 함양 여씨 중 한 사람이다. 독립운동가로 암살당했다.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담했는데 좌익으로 몰려 반공이 국시이던 시절 평가 받지 못했다.

신원역에서 서울 쪽으로 잠시 내려가면 옛 월계나루가 있던 신원1리가 나온다. 단구일기에서 보듯 남한강의 중요 나루 중 하나였다. 여기에도 기억해야 할 함양 여씨가 있다. 그는 헌적(軒適) 여춘영(呂春永)이다. 생소한 이름이다. 그러나 나무꾼 시인 정초부를 떠올리면 그가 누구인지 짐작이 간다. 정초부는 광진 나루에서 간단히 소개한 바 있다. 오늘은 정초부 고향 동네에 왔으니 시 한 편 살피려 한다. 헌적 여춘영은 월계나루에 사는, 시 잘 쓰고 새로운 생각에 깨우쳐 있던 젊은 선비였다. 어느 날 자신이 지은 시를 되뇌이고 있는 늙은 노비를 보게 된다. 그는 정 씨 성 가진 노비였다. 여춘영은 그 노비가 한시를 지을 수 있도록 지원해 준다. 시재(詩才)가 출중한 노비는 이윽고 제구실을 하는 시인으로 성장했고 주위에 이름이 알려진다. 여춘영은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그를 자유인으로 살게 한다. 노비는 나무꾼이 되었다. 부용산 기슭에서 나무를 해서 동대문 밖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었다. 이 사람이 나무꾼 시인 정초부(鄭樵夫)다. 그의 시 한 수 읽자.

江上樵夫屋 강가 나무꾼 집이라오
元非逆旅家 본시는 길손 맞는 집이 아닙지요
欲知我名姓 내 이름을 알고저 하면
歸問廣陵花 광릉 꽃에게 물으시지요

그의 시재가 알려지자 여러 사람이 찾아 왔던 것 같다. 양반들이야 호기심 반 궁금증 반으로 찾아 왔겠지만 한 끼 밥거리가 없는 그에게는 다 호사스러운 이야기였을 것이다. 가난에 찌들게 살던 그는 76세 되던 해 1798년 세상을 하직했다. 여춘영은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조문하였다.

黃庐亦樵否 저승에서도 나무 하시오?
霜葉雨空汀 단풍은 비 되어 텅 빈 물가 내린다오
三韓多氏族 삼한(三韓) 땅에 좋은 가문 많으니
來世托寧馨 내세(來世)에는 이런 곳에 태어나시게

신원1리는 삼태기 같은 지형의 마을로 바람과 햇볕이 따뜻한 곳이다. 이런 따듯한 사람의 정이 있었던 곳이라서 더욱 그런가 보다. 근세에 와서 중앙선과 6번 경강국도가 길을 막아 강과 단절된 막힌 마을이 되었다. 아쉽다, 월계나루. <다음 호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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