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지난번에 이어 예빈산 ~ 운길산 종주길을 이어간다. 적갑산 능선길을 내려와 운길산 능선길로 접어드는 안부가 고개4거리인데 여기에서 남쪽 계곡 길을 내려오면 조곡(鳥谷)골을 지나 운길산역에 닿는다. 이 남쪽 고갯길을 언제부터인가 새우젓고개라 부르고 있다. 반면 고개사거리 북쪽 길로 잠시 가면 천마지맥의 적갑산 능선과 갑산 능선이 이어지는 안부가 있는데 이 고개는 새재고개라 부르고 있다.
그 길로 내려가면 도심역으로 향한다. 한편 옛 지도를 보면 이 위치쯤 되는 곳의 고개 이름을 시유치(時踰峙)로 표기하고 있다. 이제는 이 지역에 이런 이름의 고개가 없으니 의미나 유래를 알기는 어렵다. 그런데 새재(고개), 새우젓고개, 시유치(時踰峙), 시유치 넘어 마을 시우리(時雨里), 또 새우젓고개 아랫마을 조곡(鳥谷)골, 이런 지명들을 곰곰 살펴보면 전혀 무관한 것 같으나 짚이는 바가 있다.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짚어 보자.
어느 날 가시덤불 우거졌던 골짜기가 뚫려 새로 고갯길이 생겼다 하자. 사람들은 이름 없는 이 고갯길을 ‘새 고개’ 또는 ‘새 재’라 부르기 시작한다. ‘새고개’는 중세 우리말에 흔히 있는 현상으로 ‘ㄱ’이 탈락하여 ‘새오개’가 된다. 세월이 흘러 이런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발음 편히 ‘새우개’라 부르고 슬그머니 ‘새우고개’가 된 후 새우젓 장수가 넘나들던 고개라는 말이 생기면서 ‘새우젓고개’로 변신한다.
한편 기록을 하거나 지도를 그리는 한자문화권 양반님들은 ‘새’를 新으로 썼으면 좋으련만 ‘鳥’로 쓰기도 하고 ‘새넘이 고개’를 ‘새유치’로 쓰지 않고 잘못 듣고 ‘시유치(時踰峙, 嶺)’라 썼다 하면 지나친 추측일까? 더 나아가 시유치(時踰峙) 뒷마을은 ‘시유리’가 되면 좋으련만 ‘시우리(時雨里)’로 진화했다고 보면 더욱더 억측일까?
새고개 → 새우개 → 새우고개 → 새우젓고개?
새우젓고개는 이곳뿐 아니라 전국 도처에 새로 생긴 고개에 있으니 새우젓 장수는 서운하겠지만 이곳 새우젓 고개도 새고개에서 변신하였으리라. 또 이곳 아랫마을 조곡(鳥谷)도 새(新)를 오해하여 새(鳥)로 쓴 것은 아닐까? 다른 이야기이지만 문경 새재 조령(鳥嶺)도 이런 혐의가 짙은 고개 이름이다.
머릿속으로 이런 소설을 쓰면서 운길산 능선길로 접어든다. 어느덧 가을이 깊어 가니 능선길은 붉게 물들었다. 흙길과 바윗길이 알맞게 섞인 운길산 능선길은 산행에 맛이 있다. 호젓한 산행길 한 시간 반여 지나 드디어 운길산 정상에 닿는다. 정상에는 아담한 운길산 정상석이 고도 610m를 알리고 있다. 주위를 살필 수 있는 우뚝한 봉우리이다 보니 우리의 발길이 지나온 산줄기가 굽이굽이 물결치고 아래로는 두물머리를 감싸고 도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그야말로 그림이다. 한나절 대중교통으로 와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한국의 산과 강, 참 멋있다. 코로나 세상에서 답답한 이들, 외국 갈 수 없는 이때를 기화(奇貨)로 삼아 우리 국토 많이 다녀 보시기를 권해 본다.
그런데 옆에 서 있는 운길산 안내판은 무언가 어설프다. ‘구름이 가다가 산에 걸려서 멈춘다 하여 운길산이라 불린다 하며…’ 이렇게 시작하는데, 운길산의 유래치고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남아 있는 옛 지도들을 보면 이 산이라 짐작할 수 있는 이름이 지금처럼 대체로 ‘雲吉山’이며 간혹 ‘水鐘山’ 또는 정확한 위치를 지정하기는 어렵지만 ‘鳥谷山’으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필자 개인의 느낌으로는 강을 배경으로 운길산을 바라보면 그 위를 떠가는 구름은 길상(吉祥)스럽다(사진 1).
그것은 그렇다 치고 정상에는 넓은 데크를 깔아 놓아 쉬어가기에 그만이다. 어느날 늦은 오후 이 산을 내려오는데 어떤 이가 야영 배낭을 메고 힘차게 오르고 있었다. 어디서 비박하느냐? 했더니 정상 데크에서 한다는 것이다. 내려다 보는 두물머리 야경이 최고라고 한다. 그럴 것 같다. 부럽다. 이제 정상을 거쳐 골짜기 길로 내려오면 수종사로 바로 가는 길인데, 앞 봉우리로 오른다.
겸재의 독백탄에도 그려져 있고 사진 1에서도 보듯이 운길산은 주봉(主峰: 610m) 옆에 또 하나의 봉우리가 있다. 수종사는 이 봉우리 아래에 있으니 수종사의 주산(主山)은 이 봉우리인 셈이다. 겸재의 독백탄에도 이 봉우리 아래쪽에 수종사가 그려져 있다. 그동안 없던 이 봉우리에 정상석이 새로 섰다. 한글로 ‘절상봉 522m’라 했는데 근거가 있는지 궁금하다. 혹시 절(寺) 뒷봉 정상이라 붙인 이름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세조가 머물렀다는 수종사의 절경
이제 가파른 산길을 내려와 수종사(水鐘寺)에 도착. 세조가 행차(幸次: 임금의 움직임에는 行 대신 幸을 쓴다) 길에 여기에서 머물었는데 어디에서인가 종(鐘) 소리가 들려 찾아보니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부처님 상을 만났다는 전설의 절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두물머리는 참으로 절경이다. 정초(正初)에 맞이하는 신년(新年)의 해는 또 어떻고. 두물머리가 내려다보이는 삼정헌(三鼎軒)에 앉아 마시는 차 한 잔도 일미(一味)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어느 해인가 이곳에 앉았다가 이곳을 지키는 보살님의 퉁명스러움에 차 한잔의 낭만을 잃은 적도 있었다. 굳이 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요즈음에는 절에 갔다가 봉사에 나선 보살님들의 상심(上心)에 하심(下心)하려던 내 마음을 놓친 날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이 절과 인연을 맺은 이는 여럿 있었다. 그중 한 사람으로 겸재의 든든한 후견인 장동 김씨 농암 김창협(金昌協)이 있었다. 농암은 앞에서 소개했듯이 석실 넘어 삼주삼산각에 있었는데 학동들을 데리고 가까운 수종사에 와서 여러 날 지내고 있었다. 농암이 47세 되던 1697년(숙종 23) 겨울이었다. 이때 백부에게 보낸 편지와 수종사에서 쓴 시가 농암집에 전한다.
백부님께 올립니다 정축년
제가 산방에 와서 거처한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습니다. 이곳은 지대가 높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게다가 얼음과 눈으로 길이 막혀 버렸기 때문에 종일토록 바깥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다만 글을 배우는 아이들 몇 명과 함께 짝지어 밤마다 몇 덩이의 숯을 태우며 각자 자신의 수준에 따라 강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머물렀던 그 조용한 서원도 너무 시끄러웠다는 느낌이 듭니다. 다만 이러한 정취를 오래 누리기가 어렵지 않을까 염려될 뿐입니다.
上伯父 丁丑
猶子來棲山房. 已有一旬. 處地高迥. 兼以氷雪塞路. 終日不見外人. 只有數學子相伴. 每夜擁數塊熟炭. 隨分講說. 覺向來書院亦太鬧熱. 但恐此味不易久餉耳. (기존 번역 전재)
이때 쓴 시 한 편도 읽고 가자.
수종사에 머물며 往棲水鍾寺
세상 피한다는 것이 별로였기에 遯世猶嫌淺
발길 끊긴 곳 찾아 암처에 드네 棲巖欲絶蹤
수종사가 먼 절은 아니지마는 水鐘非遠寺
운길산은 제 절로 높은 봉일세 雲吉自高峯
해질녘 돌아오는 새들도 보고 落景看歸鳥
세모라 용들도 칩거를 했네 窮陰有蟄龍
아마도 내 집에는 두세 학동이 心知二三子
문전 소나무에 기대 기다리겠지 候我倚門松
농암은 세상과 떨어진다고 석실서원 넘어 미호나루 변에 삼주삼산각을 마련하고 은거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글 배우는 애들과 여생을 보내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석실서원이 전국 유생들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면서 삼주삼산각을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농암은 그 겨울 학동 몇몇 데리고 또 다른 은거처 수종사로 둔세(遯世)하였다.
수종사를 찾아 글을 남긴 사람들
수종사를 찾아 글을 남긴 이들은 많다. 얼추 보아도 서거정, 김창협, 이병연, 초의, 다산…. 대둔산의 다승(茶僧) 초의선사는 세 번 서울에 올라왔는데 조선시대에 승려는 도성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서울에 오면 수종사와 수락산 학림암에 머물렀다. 초의와 수종사에 대해서는 졸고 ‘옛절터 가는 길’에 쓴 글을 다시 소개드린다.
초의는 스승 다산의 권유로 서울 상경에 오르기 시작했고 다산의 두 아들 정학연(丁學淵 ), 정학유(丁學遊)를 비롯한 당대의 문사들과 교류한 그가 수종사에 머물 때 남긴 시(詩)가 전해진다. ‘수종사에서 석옥화상시에 차운하다(水鐘寺次石屋和尙韻)’ 12수가 그것이다.
석옥청공화상(石屋淸珙和尙)은 중국 임제종의 법을 이은 고승으로 태고보우 대사에게 법을 전한 인물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법통(法統)은 한반도로 넘어왔다. 이 말은 달마를 통해 중국으로 넘어온 석가모니불의 법통이 석옥청공에게서 태고보우로 넘어옴으로써 불교의 법통이 한반도에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 석옥청공 대사의 시에서 운(韻)을 빌려 수종사에서 지낸 겨울 12수의 시를 지은 것이다. 그중 한 수를 읽는다.
꿈 깨면 누가 앙산의 차를 내놓을까(夢回誰進仰山茶)
게을러 경전 보며 어두운 눈을 씻는다(懶把殘經洗眼花)
뜻 맞는 친구들 산 아래에 있으나(賴有知音山下在)
인연 따라 올라와 흰구름 집(수종사)에 머무네(家隨緣往來白雲家)
이제 초의선사가 머문 흔적은 수종사에 없다. 다만 아쉬움을 달랠 흔적이 남아 있는데 선불장(選佛場)에는 초의선사의 시가 주련(柱聯)으로 걸려 있다. 안타깝게도 주련은 원래 시대로가 아니고 뒤죽박죽 얽혀서 걸려 있다. 또 시간만 나면 이곳에 올라 놀던 다산의 시도 한 편은 읽는 게 도리일 듯싶다. 긴 시이니 한 꼭지만 읽는다.
운길산에 올라 上雲吉山
산을 바라보면 뛰어 오르고 싶어 望山欣欲奔
찬바람 겨드랑에 이네 冷風生肘腋
들녘 나무 따스히 더욱 곱구나 野樹暄更姸
산길은 드높고 바위도 많군 山逕高多石
한편 수종사는 때때로 어전회의에 오르기도 했다. 무슨 일일까? 수종사는 한양에서 가깝고 수려하다 보니 종친, 양반가의 내실(內室)이나 니승(尼僧)들의 발원처(發願處)가 되었고 당일로 돌아갈 길이 아니었기에 절에서 머무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이리 되니 불교를 사시안(斜視眼)으로 바라보던 유학자 신료(臣僚)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기록에 남아 있는 것 중에 하나만 살펴보자. 경국대전이 완성되어 조선이 성리학의 가치로 무장하기 시작하는 성종 때의 일이다. 왕 4년 1473년 7월 경연을 마치고 사헌부 집의(執義) 현석규(玄碩圭)가 절에서 중과 여승이 풍기문란을 일으킨다고 문제를 꺼냈다.
고하건대, ‘중[僧]과 여승[尼]이 교통(交通)하고 서로 왕래하는 자는 과죄(科罪)하여 정역(定役)하라’고 일찍이 수교(受敎)한 바가 있으니, 죄를 다스리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이 듣건대, 여승이 수종사(水鍾寺)에 가서 삼재(三齋)를 설치하고 삼재가 지난 후에 다른 여승들은 모두 돌아갔는데, 오로지 정관(井觀)과 혜사당(惠社堂)만이 그대로 머물러 사재(四齋)를 기다렸으니,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중략) 지금 부녀(婦女)와 여승과 더불어 안연(安然)히 마주 앉아서 그들로 하여금 경숙(經宿)하게 하였고, 승도(僧徒)들로 하여금 문(門)을 지키게 하여서 그 수종(隨從)한 노복(奴僕)들을 물리쳐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정적(情跡)을 비밀스럽고 괴이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더욱 엄하게 다스려서 후래(後來)를 경계하여야 합니다. 고려 말엽에 부녀자가 절에 올라가는 것을 금지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중과 여승과 부녀자가 교통하고 서로 왕래하여 음욕(淫慾)을 마음대로 행하였으니….(후략)
今不治尼僧上寺之罪, 臣等考 ‘僧尼交通相往來者, 科罪定役’, 曾有受敎, 不可不治罪也. 臣等聞尼僧往水鍾寺, 設三齋, 過後他尼皆還, 獨井觀, 惠社堂留待四齋, 必有以也. (중략) 今與婦女尼僧, 安然對坐, 使之經宿, 令僧徒把門, 斥其隨從奴僕不納, 情跡秘詭, 宜加痛懲, 以戒後來. 前朝末, 婦女上寺無禁, 故僧尼婦女, 交相往來, 恣行淫欲.(후략)
태종태후는 과연 누구일까?
이렇게 유학자들의 음험한 눈초리가 절을 향하고 있었으니 니승(尼僧, 비구니)과 부녀자는 절에 다니기도 편치 않았다. 그런데 일찍이 이 절에 시주한 왕가의 여인이 있었다. 대웅전 옆 보물 1808호 곁에 서 있는 부도(浮屠)는 왕가의 여인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탁본을 떠야 확인되는 희미한 명문에는 왕가 여인들 이름이 등장한다. 그 명문은,
太宗太后貞懿(또는 惠)翁主舍利(造)塔施主□□柳氏錦城大君正統四年己未十月日立 [태종태후정의(혜)옹주사리(조)탑시주□□유씨금성대군정통사년기미십월일립]이라는 글이다.
이해를 위해 글씨를 띄어쓰기해 보자.
太宗太后 貞懿(惠)翁主 舍利(造)塔 施主 □□柳氏 錦城大君 正統四年 己未 十月 日 立
정통 4년은 세종 21년(1439)이다.
우선 이 명문을 읽는 통설은 ‘태종의 후궁인 의빈권씨는 태종이 승하한 후 비구니가 되었는데 외동딸 정혜옹주가 세상을 떠나자 불교장례법에 따라 화장을 하고 이 탑에 사리를 봉안했다’는 것이다. 과연 사실일까? 왕가의 옹주를 화장해서 사리탑에 모셨다? 이러한 전례도 없고 사실도 아니다. 태종과 의빈 권씨 사이에 태어난 정혜옹주는 운성부원군 박종우와 혼인하여 그 묘소는 지금도 연천 창남면 반정리 산55에 남편 박종우와 합장묘로 모셔져 있다. 따라서 정혜옹주 설은 논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이제 해석하기 전, 각 항목을 살펴보자.
太宗太后: 태종태후는 과연 누구일까? 태종대왕 헌릉신도비명을 보면 원경왕 후 민씨(元敬王后 閔氏)를 태종왕태후(太宗王太后) 또는 줄여서 태후(太后)라 표현하였다. 한편, 貞懿宮主 → 懿嬪은 ‘懿嬪 權氏’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태종태후는 ‘원경왕후 민씨’를 지칭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사리탑이 세워진 해는 1439년(세종 21년)이고 원경왕후가 세상을 떠난 해는 1420년이니 19년 전 죽은 사람이 사리탑을 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사리탑에서의 태종태후는 다른 사람을 지칭한다고 보아야 한다. 아마도 이때 홀아비로 사는 태종에게 원경왕후를 대신하여 국모 역할을 한 사람을 공식적은 아니지만 예우하여 사적으로는 태종태후라 부른 것은 아닐까? 그 사람은 의빈 권씨(정의궁주)였다.
貞懿翁主: 아쉽게도 정의옹주로 불린 사람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태종실록 (1402년 4월)에는 ‘권 씨를 봉하여 정의궁주(貞懿宮主)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세종실록(1422년 2월)에는 정의궁주 권 씨를 봉하여 의빈(懿嬪)을 삼았다 한다. 이때 함께 봉작을 받은 이가 신녕옹주(信寧翁主) 신씨(辛氏)였는데 그녀는 이날 신녕궁주(信寧宮主)가 되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옹주 → 궁주 → 빈’의 순서로 서열이 올랐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기록은 남지 않았지만 사리탑의 정의옹주는 ‘정의옹주 → 정의궁주 → 의빈’의 순서를 거쳤을 것이며 정의옹주는 ‘의빈 권씨’로 볼 수 있다. 그녀는 세조 14년(1468년)에 졸(卒)하여 딸(정혜옹주)이 묻혀 있는 연천 창남면 반정리에 묻혔다.
OO유씨: 사리탑 銘文에 금성대군보다 앞에 기록한 점으로 보아 금성대군보다 항렬(行列)이 높거나 직위가 높은 사람일 것이다. 유(柳)씨 성을 가진 윗항렬 왕실 여인은 3명이 있다.
*정경궁주(貞慶宮主) 유씨; 태조의 후궁으로 생몰연대는 알 수 없는데 가능성은 희박하다. 금성대군보다 3대(代)가 앞선다.
*가의궁주(嘉懿宮主) 유씨; 미망인의 몸으로 정종의 후궁이 되어 아들 하나(佛奴)를 낳았는데 정종이 선양한 후 삶이 결코 편하지 않았다. 의빈 권씨나 금성대군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사리탑에 기록된 유씨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현빈(賢嬪) 유씨; 현빈 유씨는 태조의 8째 아들 세자 방석(의안대군)의 빈이었다. 입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조 2년(1393년) 폐출되어 기록에서 사라졌다. 이때 의안대군은 우리 나이로 12살, 세자빈은 아마도 10대 중후반이었을 것이다. 이때 내시(內侍, 內豎) 이만(李萬)이 처형되었다. 신하들이 이유를 물었으나 태조는 집안일이라 하고 끝내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세자빈이 내시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수군대었고, 우리 시대 극작가들은 탕녀로 그녀를 난도질하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과연 그랬을까? 시집온 지 1년도 안 된 10대 수줍은 처녀가 그 눈 많은 대궐에서 무슨 남자 경험이 많다고 몸이 타올랐겠는가? 아마도 동궁전 내시 이만은 어린애에게 시집온 세자빈을 애틋한 눈으로 보며 정성을 다하지 않았을까? 이 일에 대해 신의왕후 한씨 소생 큰 아들들의 음모일 것이라는 썰(說)도 있다. 이렇게 사가(私家)로 돌아온 그녀의 기록은 어디에도 전해지지 않는다. 만일 불륜이 사실이었다면 자결했을 것이고, 사실이 아니라면 비구니(比丘尼)가 되었을 것이다. 이 당시 왕실 여인들은 혼자가 되면 비구니가 되는 일이 흔했다. 만일 비구니가 되었다면 정업원(淨業院)에는 갈 수 없고 일반 사찰로 갔을 것이다. 수종사 앞쪽 기슭에는 암자 터가 남아 있는데 니사(尼舍: 비구니 거처) 터였다. 한편, 현빈 유씨는 후에 머리를 깎은 의빈 권씨의 손아래 동서가 되며, 금성대군이 의안대군(방석)의 봉사손(奉祀孫)이 되었으므로 비록 폐출은 되었으나 할머니가 되는 셈이다.
한 번쯤 염두에 두어볼 대상이다. 누군가 이 현빈유씨에 대해 소설 한 편 써보면 좋을 것 같다. OO유씨에 대해서는 계속 조사가 필요하다.
錦城大君: 세종의 6째 아들로, 왕자의 난 때 비명횡사한 의안대군 방석이 후손이 없으므로 세종께서 금성을 의안대군의 봉사손이 되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의빈 권씨가 키웠기에 지극히 의빈을 따랐고 의빈도 금성대군을 지극히 사랑하였다.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하여 형 세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1457년).
이런 사전 지식을 가지고 명문을 풀어 보자.
太宗太后인 貞懿翁主(의빈 권씨)가 舍利塔을 조성하다.
施主는 □□柳氏와 錦城大君이 하다.
正統四年(세종 21년,1439년) 己未년 十月 日 세우다.
그런데 누구의 사리를 넣은 사리탑일까? 의빈 권씨(정의옹주)는 1468년 사망하여 반정리에 묻혔으므로 1439년에 세운 사리탑에 그녀의 사리를 봉안할 수 없다. 즉 정의옹주 사리탑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정의옹주 사리탑이 아니라 정의옹주가 화주(化主)가 되고 유씨와 금성대군이 시주(施主)해서 세운 사리탑이다. 그 속에 봉안한 사리는 부처님 사리(佛舍利)일 것이다. 부처님의 사리는 3층, 5층, 7층… 탑에만 모시는 것이 아니라 부도형 탑에도 모셨음은 여러 사례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사리탑을 ‘승탑(僧塔)’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치 못하며, 더욱이 ‘정의(혜)옹주 사리탑’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2019년에 보물 2013호로 지정되었으니 전문가의 연구가 있으면 좋겠다.
이제 수종사 종각 뒤쪽 길로 하산이다. 아랫마을은 사제(莎堤)마을이다. 운길산에 등을 기대고 형성된 마을인데 언제나 양지바르고 따듯한 마을이다. 한음 이덕형 선생의 별서(別墅)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선생은 은퇴 후 이곳에 와서 여생을 보냈다. 이때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는 가사 사제곡(莎堤曲)을 남겼다.
漢水東흐로訪水尋山야龍津江디내올나莎堤안도라드니第一江山이임업시려다 (漢水東땅으로 訪水尋山하여 龍津江 지나 올라 莎堤 안 돌아드니 第一江山이 임자 없이 버렸는데).
한음과 노계 사이는 정승과 종6품 무관으로 정을 나누기 어려운 처지였으나 서로의 학문을 알아보았기에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노계는 이곳에 은둔한 한음의 마음을 가사로 읊은 것이었다.
별서 터에는 지금도 두 그루 은행나무가 옛터를 지키고 있고 하마석이라 부르는 받침돌도 남아 있다. 그런데 하마석(下馬石)을 자세히 보니 성혈(星穴)이 완연한 고인돌이다. 아마도 누군가에 의해 오류가 생겼으리라.
마을을 벗어나 강가로 간다. 강가 습지와 버려진 땅에 ‘물의 정원’이라는 공원을 조성하였다. 넒고 넒은 데다가 자연을 살린 공원이 마음에 든다.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머지않아 수도권에 좋은 공원으로 소문이 날 것 같다. 공원에는 다산의 시(詩)도, 한음의 시도 새겨 세운 시석(詩石)이 서 있다. 공원길을 걸어나오면 운길산역이다. 이 앞 강이 옛날 용진(龍津)나루였다. 이제는 나루는 없고 다리 위로 차들이 쌩쌩 오간다. 아, 가을 바람에 날려간 시간이여.(다음 호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