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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66) 최태훈 작가] 조립가구의 매뉴얼을 ‘무효화’해 조각한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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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98호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2021.04.29 11:18:38

(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 최태훈의 작업에서 DIY 가구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구매자 개개인의 개성과 취향을 만족시킬 것 같지만 DIY 가구는 대량생산품이다. 작가는 이런 DIY 가구로 미술 작품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재료에 주목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가?

대학원 재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사용을 위해 디자인되는 제품과 예술 작품인 조각의 차이와 공통점 등에 대해 생각하며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품에 작가의 의도가 실리듯 제품에도 당대의 이슈가 담긴다. 처음에는 자기 계발 담론과 제품의 기능에 초점을 맞췄고, ‘All in one-’(2012~2013), ‘Multitasking device’(2013~2014) 연작처럼 기능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무용해지는 조각을 선보였다. 그러던 중 이케아(IKEA)가 한국에 들어왔고, DIY 산업이 개인이란 주체를 어떻게 정립하고 있는지에 주목하게 되었다. DIY 가구의 광고를 보면 개인을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지만, 역으로 가장 소외되는 것도 개인이다. 나는 어떤 주제에 반대급부적으로 접근하기보다 깊게 침투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DIY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작업하게 되었다. 개인전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2018)에서부터 본격적으로 DIY 제품을 사용하게 되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 이전의 작업에서부터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 전시 전경, 2018, 사진 = 이강준 ⓒ최태훈
‘세나 구성’, 세나(DIY 수납박스), 175 x 175 x 160cm, 2017, 사진 = 이강준 ⓒ최태훈

- 개인전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에 소개되었던 작업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이케아와 같은 DIY 가구는 유닛으로 판매한다. 가구를 완성하려면 매뉴얼대로 조립해야 한다. 그런데 ‘DIY 해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DIY 해커’라 불리는 디자이너들은 이케아의 제품을 매뉴얼과 다르게 조합해 전혀 다른 기능의 사물로 만든다. 이것을 작업에 가져오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DIY 산업에서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 ‘내 마음대로 하기’를 진짜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학부 저학년 때 배우는 조각의 기초적인 조건들을 따라 유닛들을 결합했다. 미리 계획한 형상을 만드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규격을 정방형으로 제한했다. 이는 완성도를 균일하게 맞추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내 직관이나 임의적 선택에 지배받지 않기 위해 해당하는 제품의 유닛을 모두 샀고, 그것을 전부 다 사용하면 작업이 완성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유닛을 원하는 대로 추가하거나 거슬리는 부분을 버리지 않았다. 이것은 앞서 말했던 깊숙이 침투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자소상 2’, 보조 테이블 다리들, 171 x 90.5 x 81.5cm, 2020, 사진 = 정희승 ⓒ최태훈

- 작가가 따랐던 조각의 기초적인 조건들은 “스스로 직립할 것, 모든 방향에서 형태가 다를 것, 어디서 보아도 완성도가 균질할 것, 오브제를 재가공(절단, 절곡 등)하지 말 것”이다. 이에 대해 결국은 작가 본인이 정한 규칙을 따른 것이고, 조각과 관련된 보편적 조건이라기보다 자의성이 더 강해 보이는 규칙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답을 해줄 수 있겠는가?

보편성을 추구하거나 나의 의지를 완전히 배제하는 게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의 목표는 아니었다. 큰 틀에서 보면 나는 자의적인 작업을 하고 있다. 규칙을 세우고 지키려 한 것은 작업을 조금 더 어렵고 재밌게, 그리고 정확하게 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작업할 때 모든 가능성이 열린 상황을 선호하지 않는다. 또 그냥 좋아서, 취향이어서와 같은 근거로 작업을 전개하고 싶지 않다. 날 선 감각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곧 작업의 논리가 되기엔 아직 훈련이 부족하다. 세부 조건 없이 감각에만 의존해서 작업하면 완성된 작품이 그만큼 뭉툭해지거나 엉뚱한 곳에 도달할 수 있다. 내가 부여한 네 가지 조건들은 내가 추상적으로라도 크게 설정해놓은 항로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다.
 

‘자소상 4’, 네스팅 테이블 다리들, 169 x 105 x 87.5cm, 2020, 사진 = 정희승 ⓒ최태훈

- 대량생산된 기성품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작가, 작품을 제작하는 조건을 제시하는 작가가 드러나기 때문에 예술가의 권위가 더 강하게 부각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미술가이고 내 작품에 작가적 아우라가 담기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일이 현대 미술임을 명확하게 인지하며 작업하고 있다. 내 작업에는 형식적으로도 작가라는 존재가 강하게 드러난다. 전통적인 조각처럼 보이지 않을 뿐이다. 앞으로 내게 주어진 과제는 특정한 방식이나 명쾌한 언어로 설명되는 작업을 하지 않는 것이지 저자성을 지운다거나 예술이 아닌 어떤 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 DIY 가구를 매뉴얼대로 만들지 않고 자신만의 조건에 근거해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행위는 사회 구조와 규칙에 대한 탐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작가 역시 사회적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한편 매뉴얼을 무효화하는 작업이 지적인 유희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궁극적으로 작가가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작가로서 비판적 사고를 하는 건 중요하지만 내가 해온 ‘해킹 조각’들은 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지거나 지적인 유희를 끌어내는 데 집중되어 있지 않다. 그보다는 조형적인 실험에 중점을 두고 있다. 오늘날 기성품의 형태와 유통방식을 문법으로 삼은 조각이다. 사회적인 담론들은 작업의 전제에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부분이다. 나는 10대 후반부터 흙을 만지면서 조각을 공부해왔다. 그럼에도 조각보다는 제품과 같은 사물들을 훨씬 더 많이 접촉하며 살고 있다. 사물에 비하면 아직도 조각은 낯설고 어렵다. 같은 입체인데도 둘은 아주 다른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에는 수많은 이데올로기와 맥락들이 겹쳐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런 상이한 감각을 좀 더 섬세하게 분별해서 둘 사이를 선명하게 나누거나 통합하는 일을 하고 싶다. 결국은 인간의 지각에 관한 이야기이다.
 

‘트랙터’ 전시 전경, 2020, 사진 = 이지양 ⓒ최태훈

- ‘자소상’ 연작(2020)은 전통적인 재현 조각에서부터 추상 조각, 동시대적 설치를 아우르는 조각의 역사(흐름)의 압축인 동시에 미술가 그 자체에 대한 탐구로 보인다. 작가 자신(예술가)을 관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정말 많은 질문과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 작업이다. 어떤 부분에 가장 중점을 두고 진행했는가?

완성되어 내 손을 떠난 작품들은 그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의미들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도 내 작업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일은 중요하고, 어렵기도 하다. 당연하게도 내가 지나온 길들이 앞으로의 작업을 위한 토대가 된다. 질문에서 이야기한 지점들이 머릿속에 있긴 했지만, 그것을 작품에 다 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자소상’에서는 신체라는 키워드가 등장해 작업이 확장된 것 같다. 기성품을 재료로 사용했지만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와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었다. 개념적으로 보자면 작가의 초상만큼 개인적이고 내밀한 작업도 없다. 그러한 초상 조각을 추천 알고리즘으로 선택된 기성품을 이용해 만든 무언가로 대체한다는 것이 흥미로웠고, 그것이 오늘날의 개인을 보여주는 방식으로도 적합하다 싶었다. 나 자신을 유일한 존재가 아닌 어떤 유형으로 분류한다는 것은 작가의 초상을 떠올릴 때 기대하는 방식이 아니다. 사람들은 작가를 일반적이지 않은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싶어하니까 말이다.
 

‘고정 ↔ 이동’, 235 x 55 x 60cm, 마네킹에 의복, 스탠딩 의자, 2020, 사진 = 이지양 ⓒ최태훈

- 전시 ‘트랙터(Tractor)’(2020)에서는 색채에 시선이 갔다. 이전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의 색채 표현이었다.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었는가? 전시장에 뿌려진 스프레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도 궁금하다.

윤민화 큐레이터와 함께 했던 2인전 ‘트랙터’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전시였다. 나는 유니클로(Uniqlo) 옷을 입고 이케아 가구를 쓰는 인물을 상상했다. 그런데 이들이 언젠가부터 의자를 낯설게 느끼고 자신의 몸에 맞지 않다고 각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우리가 적응해왔던 것과는 다른 힘이 전시장에 작용하고 있다고 상정하고 인물들을 설치했다. 그런 다음 그래피티 작가 XEVA를 섭외해 스프레이 작업을 진행했다. 전시장에 있는 사물들이 어떤 힘에 의해 당겨지고 밀쳐지듯이 상호작용하고 있으니 공간에 펼쳐지듯 물감을 뿌려달라고 작업의 개념과 방향을 설명했다. XEVA 작가가 프리 스타일로 작업했기 때문에 색 선택도 즉흥적이었다. 이후 작가가 사용한 색상과 패턴들을 이용해 내가 작업을 추가했다. 스프레이 작업으로 마네킹과 의자의 구체적인 형상은 약화되고 공간에 무형의 운동감이 부여되었다.

- 작업을 진행할 때 본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술사의 지점들을 염두에 두는가? 그리고 본인의 지점을 생각하는가?

예술가는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나 하고 싶은 것을 창작하는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현대 미술가는 공동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사람 같다. 나는 나보다 앞서간 이들이 그려놓은 지도 위에 오늘의 좌표를 상상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지도 안에서 나에게 숙명적으로 주어지는 과제를 피해갈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게 과거를 잘 학습해서 발전시키는 방식은 아니다. 오히려 관습에서 벗어나 미술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것을 내놓을 때 새로운 미술이 된다. 물론 새로움이 공동의 지도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나는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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