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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79) 연강임술첩 ③] 미수 선생이 사랑한 연천의 ‘돌글’과 풍광 언제 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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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02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1.06.29 11:21:56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1742년(영조 18년) 10월 보름 밤 경기도관찰사 홍경보, 양천 현령 정선, 연천현감 신유한은 삭녕(朔寧)땅 우화정(羽化亭)에서 배를 띄워 연강(漣江)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이때 출발지 우화정에서 배를 띄워 출발하는 모습을 겸재는 우화등선(羽化登船)이라는 제목을 달아 그림을 그렸다. ‘우화정에서 배에 오른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자는 다르지만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는 오랜 고사성어(故事成語)가 있다.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날아오르는 상황을 이르는 말이다. 겸재가 이 그림의 제목을 우화등선이라 한 것을 보면 이날 배 타고 내려오는 뱃놀이를 신선이 되어 오르는 경지, 즉 우화등선(羽化登仙)으로 승화시킨 제목으로 보인다.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를 살린 멋진 은유인 셈이다.

삭녕(朔寧)은 본디 안삭군(安朔郡)으로 연천의 북서쪽 임진강 상류 지역이며 철원과 장단(長湍)을 경계로 하는 작은 시골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산수가 아름다운 고장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했다. 일찍이 서거정은 삭령을 노래하면서 山勢北來不斷靑 … 江流東去無邊白(산는 북에서 와 푸르름 그치지 않고 … 강은 동으로 흘러 물가 희지 않은 곳 없네)라 하였다. 이런 곳이니 자연 아름다운 정자도 들어섰다. 글씨 잘 쓰기로 유명했던 이산뢰(李山賚)가 군수로 있을 때 임진강과 북천(北川)이 만나는 나룻가(후에 우화정 나루: 羽化亭津) 언덕에 정자를 지었다. 그리고는 미수 허목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이때 쓴 미수의 유우화정서(遊羽化亭序)가 미수기언(眉叟記言)에 전해진다.
 

겸재 작 우화등선도. 

우화정은 안삭군(安朔郡) 읍치(邑治) 동쪽 강가에 있는 정자이다. 임단(臨湍: 임진강변 장단) 상류의 여러 군 중에 안삭군(安朔郡: 삭녕의 옛 지명)이 유독 그 경치가 좋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 위를 강가에 사는 사람들이 대(臺)라고 지칭하였으며 거의 100년간 절경으로 칭송되었다고 한다. 지금 이 군수(이산뢰/李山賚)가 공무가 없을 때 산수(山水)의 고적을 찾아다니다가 이 언덕을 찾아내어 즐기고 대 위에 정자를 지어 툭 트인 전망(展望)을 굽어보았으니, 고명한 이들의 휴식처가 이루어지는 것이 또한 그 때가 있다 하겠다. 앞뒤로 울창한 숲과 산이 있고 강기슭은 온통 흰 자갈이 깔려 있다. 그 위로는 평평하면서 잡초가 우거져 있고, 강물은 굽이쳐 돌아 상류와 하류가 아득하다. 동쪽에는 큰 내가 남쪽으로 흘러오다가 절벽을 지나 정자 아래에서 합류하는데, 그곳에는 옛 나루터와 긴 다리가 있다. 산골이라 인간사가 드물고 길에는 인적이 없으며, 백사장에 도롱이 쓰고 투망질하는 몇 사람들이 서로 얘기를 나누는 정도이다. 나는 연천(漣川)에서 노년을 보내며 임단과 안삭 두 고을의 군수를 지낸 미강(湄江) 이군(李君)과 종유하며 이곳에서 즐겼다. 정월에 몹시 춥고 많은 눈이 내려 고목들은 대부분 말라 죽고 3월까지 꽃이 피지 않았다. 그러나 4월이 되어 강가에 많은 나무가 우거져 짙게 그늘을 드리우고 때마침 비가 막 개어 고아한 풍취가 물씬 일어났다. 이리하여 이 군이 우화정기를 짓고서 내게 서문을 써 달라고 하였다.

금상 8년(현종 8년, 1667) 4월 갑술일에 공암 허목 미수는 서문을 쓰다.

이 군수가 부임한 이듬해에 향교를 보수하였는데, 도리는 5개, 기둥은 2개, 문은 1짝으로 만들었다. 공사를 마치고 제향을 올린 뒤에 남은 비용을 모아 강가에 휴식을 취할 만한 집을 지으매 시원한 정취가 한결 더 좋아졌다. 내 들으니, 고명한 이의 감응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방도가 나온다고 한다. 그러므로 옛사람 중에 국사를 도회지 사람들과 상의하지 않고 농부들과 상의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그 또한 일리가 있다. 이 어찌 놀고 즐기는 곳이기만 하겠는가. 이 점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군수의 휘(諱)는 산뇌(山賚)이고, 자는 중이(重而)이며, 본관은 연릉(延陵: 연안)이다. 허목은 쓰다.
(기존 번역을 살려서)
 

지도 1. 삭녕의 옛 지도. 
지도 3. 연강 주변의 지도. 

遊羽化亭序

羽化亭者. 安朔邑治之東江上亭也. 自臨湍上流數郡之界. 安朔獨稱江山之勝此也. 絶岸巖壁上. 江上人指言臺. 且百年稱絶景. 今太守李侯以無事. 訪山水古事. 得斯丘樂之. 作臺上亭. 以臨寥廓. 高明遊息之具. 蓋亦有時而成者也. 前後有茂林岡巒. 江岸皆白礫. 其上平蕪. 江流灣洄. 上下渺茫. 東有大川. 南流過峭壁. 合於亭下. 有古渡. 有長橋. 峽俗人事絶稀. 道無人. 沙上有被蓑持網者數人. 相呼語. 余老於漣上. 與湍朔二郡太守. 湄江李君遊. 相樂於此. 正月大寒雪. 古木多枯死. 三月無花. 然時已孟夏. 江上多樹林深陰. 適雨新晴. 佳趣自多. 於是李君作羽化亭記. 屬余爲序. 上之八年四月甲戌. 孔巖許穆眉叟. 序.

侯爲郡之明年. 改作鄕校. 五架兩楹一門. 旣成禮事畢修. 贏其餘力. 作臨江閑館. 其勝槩泠然倍之. 吾聞高明之感. 治道之所出. 故古人有不謀於邑而謀於野者. 信矣. 亦豈徒爲遊樂之觀而已. 不可以不識之也. 侯諱山賚. 字重而. 延陵人穆. 識.

 

정수영 작 ‘삭녕 우화정’.

다산(茶山)도 삭녕에 암행어사로 간 일이 있는데 우화정을 차마 지나칠 수 없었나 보다. 글 하나 짓고 시(詩)도 남겼다. 여유당전서에 그 글이 남아 전한다.

우화정기(羽化亭記)

나는 일찍이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중에는 우화정(羽化亭)의 시내와 산, 물과 바위의 뛰어난 경치를 적은 기(記)가 실려 있었다. 이 글을 읽으니, 마치 현포(縣圃: 신선 세계)에 오르고 낭원(閬苑: 신선 세계)에 들어가 선인(仙人), 우객(羽客: 신선)과 이리저리 거닐며 서늘한 바람을 쐬는 것과 같았다. 나는 자나 깨나 그곳에 가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갑인년 (1794, 정조 18) 초겨울에 내가 왕명을 받들어 암행어사가 되어 나갈 때였다. 장현(漳縣)에서부터 걸어서 북쪽으로 가는데, 험한 산을 넘고 시내를 건너 정오(正午)가 지나도록 걸었으나, 겨우 40리를 갔다. 발은 부르트고 가슴은 숨이 차서 헐떡거렸다. 매우 피곤하고 아울러 배도 매우 고팠다.

이때 갑자기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눈에 띄었는데, 그 절벽 꼭대기에는 날아오를 듯한 정자가 서 있었다. 풀과 바위를 더위잡고 그 정자에 올라가서 정자의 앞면을 바라보니, 바로 우화정(羽化亭)이었다. 아, 이것이 바로 우화정이다. 이에 난간에 기대어 사방을 바라보니 산봉우리들은 이리저리 꾸불꾸불 이어져 있었고, 구름 빛과 돌 빛이 난간과 서까래에 아른거렸다. 두 강줄기가 합류하는 곳은 옷깃같이 환하게 빛나는데, 고기 잡는 사람과 모래 위의 물새는 강 가운데 있는 섬을 왕래하였다. 이 같은 경치를 바라보노라니 마음과 눈이 확 트이는 것 같았으며, 피로도 곧 가셨다. 나를 따라온 손이 술과 물고기를 사 가지고 왔으므로, 그와 함께 즐겁게 취하도록 마시면서 해가 저물어 가는 것조차 알지 못하였다. 저녁때가 되자 손이 나에게 길 떠나기를 재촉하며 말하기를,

“공(公)이 호랑이에게 변을 당하면, 어떻게 신선이 되시겠습니까?”

하였다. 서로 바라보며 크게 웃고는 서운한 마음으로 자리를 일어났다.
(기존 번역을 살려서)

羽化亭記

余嘗讀許眉叟之書. 其記羽化亭溪山水石之勝. 若登縣圃入閬苑. 而與仙人羽客. 消搖乎御泠風也. 夢寐思一至而不得焉. 甲寅首冬. 余奉命爲暗行御史. 自漳縣徒步北行. 踰險涉川. 日過午僅四十里. 足爲之繭. 脅爲之喘. 疲困至極. 兼之飢甚. 忽見石壁削立. 當壁之頂. 有亭翼然. 攀而上. 瞻其額. 乃羽化亭也. 嗟乎. 此羽化亭也. 於是馮檻四望. 山巒邐迆. 雲光石色. 照映軒楣. 兩水合流. 襟帶皎然. 漁人沙鳥. 往來洲渚. 心目谿然. 勞疲卽蘇. 客之從行者. 買酒與魚而至. 欣然一醉. 不知日之將暮也. 旣夕. 客趣余前就途曰公將虎變. 安能羽化. 相視大笑. 悵然而起.

그때 지은 시 한 수도 읽고 가자.

삭녕군 우화정에 올라

푸른 시내 모래톱 싸고 도는데 碧澗銜沙觜
붉은 정자는 돌머리 위에 紅亭枕石頭
잠시 왕하*(어사) 임무로 인해 聊因王賀職
사영운**의 유람도 아울러 즐기네 兼作謝公游
흰 눈은 산가 지붕에 여전하고 小雪依山屋
골짝 이내 속에 배타고 내려가네 孤煙下峽舟
가난한 시골 마을 수심과 탄식 일어 窮閭有愁歎
오래 머물 생각일랑 못하겠네 不敢戀淹留


*왕하: 한나라 때 암행어사. 도적조차 사랑하여 교화시켰다.
**사공: 송나라 영가태수 사영운(謝靈運). 유람과 시를 사랑했다.

다산답게 명승을 지나면서도 백성의 가난함에 마음 아파한다. 사실 오늘의 주제 연강임술첩은 다산의 이런 마음과는 거리가 있다. 백성의 고달픔에 가슴 아파하기보다는 소동파의 그 멋을 따라하기에 여념 없었던 아픔이 있다. 눈 딱 감고 겸재의 그림 우화등선(羽化登船, 80쪽)을 보자.
 

저 아래 연강이 보인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의 과장법을 다시 한번 확인하다

좌측 우뚝한 석벽 위에는 우화정이 보인다. 물줄기는 임진강 본류와 북천(北川)이 만나 우측 하류로 흐른다. 이 물길이 바로 연천 임진강(漣江)을 거쳐 한탄강과 합류하여 마전(麻田), 장단, 파주로 흘러 한강과 합류한다. 물길 뒤로는 우뚝한 연봉들과 우람한 수직의 바위 기둥들이 도열해 있다. 마치 단양의 사인암(舍人岩)이나 중국의 계림(桂林), 황산(黃山)의 연봉들처럼 석회암(石灰巖) 봉우리들을 연상시킨다. 강 위에는 오늘의 주인공들이 탔을 큼직한 유람선이 보이고 사공은 마악 상앗대를 움직여 배를 출발시키고 있다. 뒤로는 세 척의 배가 보인다. 이날의 뱃놀이를 시중들기 위해 아랫것들이 탄 배일 것이다. 우화정 아래 강가와 다리 위에는 오늘의 뱃놀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출발한 뱃놀이는 홍경보와 신유한의 글에서 보듯 물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런데 우화정이 있는 삭녕 우화정 나루 주변 모습은 과연 겸재의 그림 같은 모습이었을까? 저렇게 우뚝한 산과 바위 기둥들이 도열해 있을까? 가 볼 수 없는 북녘 땅이기에 궁금증은 더욱 커진다. 그런데 다행히 겸재의 이 그림 이후 50여 년 뒤 동일한 구도로 우화정을 그린 그림이 전해진다. 문인화가 정수영(鄭遂榮, 1743~1831)이 한강과 임진강을 유람하고 1796년 명승을 그린 26편의 그림 두루마리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이 그것이다.

그 25번째 그림(81쪽)에 우화정이 있다. 구도는 겸재의 뷰포인트와 일치한다. 우화정은 우뚝한 석벽 위에 있지도 않고 주변의 산들도 우리가 임진강 주변에서 흔히 보는 산들이며 산에 바위들도 기암괴석이 아니다. 사진을 찍는다면 아마도 정수영의 우화정도가 실경(實景)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겸재 그림의 특징을 다시 볼 수 있다. 필자 눈에는 겸재는 철저히 애호가(愛好家)가 선호할 그림을 그렸다. 보이는 것을 모티브로 해서 어느 때는 과장도 하고, 재배치도 하고, 키우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변형도 하고…. 소장가에게 매혹적으로 보이는 그림을 만들어 낸 것 같다.

사실 겸재의 그림을 영상에 담아 그 현장을 찾아다닌 필자는 때때로 이거 너무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특히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를 그린 그림은 더욱 그런 느낌을 받은 날들도 있었다. 그림을 모르는 필자에게는 이런 것이 예술적 완성도인지, 마케팅에 철저한 화가의 면모인지 잘 판단이 되지 않는다.

삼곶리 적석총 뒤로 웅연이 보인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신비로운 글이 새겨져 있다는 문석

각설하고, 유람선은 강을 따라 내려가는데 악공들의 주악 소리는 강가에 퍼지고 배 위에서는 퉁소 소리가 달빛에 너울거리면서 술잔은 기울어지고 진미(珍味)는 차려져 나온다. 어찌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 흥에 겨운 관찰사는 뱃전을 두드리며 한 곡조 뽑고 다시 술잔을 기울인다. 옥에 티는 양천현령 겸재와 연천현감 신유한은 반 잔만 마셔도 취하는 위인들이었으니 관찰사 홍경보는 혼자 흥을 낸 셈이다. 이렇게 배는 내려와 북한 측, 이제는 황강댐이 막고 있을 황강 앞을 지나고, 이제는 휴전선이 막고 있는 지역도 지나 횡산(橫山) 마을 앞 강가에 있다는 문석(文石)을 지나 삼곶리(三串里) 앞 웅연(熊淵, 熊灘)에 도착하였다.

 

신비로운 석문이 있다는 문석에 미수 선생이 새겨놓은 각자의 탁본. (자료사진)

웅연을 찾아가는 옛사람들은 으레 횡산마을과 그 앞 강가에 있는 문석(文石)을 찾아보곤 했다. 중국 황허(黃河)와 낙수(洛水)에서 나왔다는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주역의 팔괘와 수리(數理)의 원리를 예시해 주었다는 전설 같은 믿음이 있는데 횡강(橫江) 앞 문석에는 예서(隸書) 같기도 하고 초서(草書) 같기도 한 글씨로 보이는 글자가 새겨 있는 바위가 있는데 이 신비로운 글자를 보고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이곳에 들리곤 했다 한다.

 

소치 허련이 그린 미수 은거당. 
미수 은거당 터의 알림석. (자료사진)

연천 출신으로 관직을 떠난 후 연천에서 살다 죽어서도 연천에 묻힌 미수 허목 선생은 유난히 연강(漣江)을 사랑한 이였다. 코로나가 풀리면 다시 자유롭게 미수 허목이 사시던 곳을 방문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소치 허련은 미수의 고택을 찾아 그림을 그려 놓았다. 미수는 횡산과 문석에 대한 기록도 미수기언에 남겼다.

횡산기(橫山記)

횡산은 연천(漣川) 북쪽 강가에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송림(松林)과 사장(沙場)이 아래위로 가득 펼쳐지고, 남쪽 언덕은 모두 층층의 높은 바위이며, 늘어선 산봉우리와 우거진 숲 앞에는 옛 나루가 있다. 강 속에 돌이 많아 배가 돌에 부딪히며 지나가는데, 물살이 세어서 잘못했다가는 배가 돌부리에 걸려 건너가지 못한다. 서쪽으로는 장경대(長景臺) 석벽이 바라보이고, 동남쪽은 석저 협구(石渚峽口)이다. 절벽 위에는 도영암(倒影庵)이라는 절이 있는데, 절이 강을 굽어보고 있어서 중이 가사(袈裟)를 입고 치건(緇巾)을 쓴 채 염주를 굴리며 불경을 외는 모습이나 도끼를 들고 나무하는 자, 동이를 들고 물을 긷는 자, 쌀을 씻는 자, 빨래하는 자들의 그림자가 모두 깊은 못에 거꾸로 비치므로, 내려다보면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다. 그 아래는 망저탄(望諸灘)이요 또 그 아래는 장군탄(將軍灘)인데, 장군탄 아래 웅연(熊淵)의 바위 벼랑에서 기이하게 쓰인 석문(石文)을 보았다.

강가에는 석린(石鱗)과 석묵(石墨)이 나고,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 옛날에 90살 된 효자 정희열(鄭希說)이 있었는데, 거상(居喪)을 잘하여서 3년 동안 죽만 먹으면서 곡을 하였고, 나이가 90이나 되었는데도 부모에 대한 애모(哀慕)의 마음이 줄어들지 않았다. 사속(私屬)인 금월(今月)은 일찍 과부가 되었으나 재가(再嫁)하지 않았고, 80여 세가 되도록 그 자손들에게 남을 속이지 말고 남과 다투지 말라고 가르쳤는데, 이것이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마을의 풍속으로 전해 오고 있다. 마을 어른들이 전하는 고사(古事)가 이와 같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 절부(節婦) 두 사람이 나왔으니, 수재(秀才) 권술(權述)의 처 정씨(鄭氏)는 강가에 절부문(節婦門)이 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이름을 잊었다.

미수는 기록한다.
(기존 번역 전재)

橫山. 漣川北江上佳村. 有松林沙渚. 上下瀰漫. 南岸皆層石高巖. 列岫茂林. 前有古渡. 江中多石. 挐舟江石而過之. 水急失勢. 則舟橫石上. 不可渡. 西望長景石壁. 東南爲石渚峽口. 巖壁上有僧舍. 曰倒影庵. 佛壁臨江. 僧袈裟緇巾數珠誦佛者. 與持斧而樵者. 抱瓮而汲者析者. 洴䌟者. 皆倒影於重淵. 俯之如鑑. 其下望諸灘. 又其下將軍灘. 將軍灘下熊淵. 石崖觀石文異書. 江干出石鱗石墨. 多壽考. 前有九十孝子鄭希說. 善居喪. 三年食粥哭. 年九十. 哀慕不衰. 私屬今月早孀. 不再嫁. 年八十餘. 敎子孫以不欺不爭. 里中至今成俗百年. 村父老傳言古事如此云. 丙子之亂. 節婦二人. 秀才權述妻鄭氏. 江上有節婦門. 其一人. 亡名. 眉叟. 記.

웅연석문기(熊淵石文記)

웅연은 장경대(長景臺)에서 아래로 15리 되는 연천 서쪽 지역에 있다. 내가 난리 이후 남쪽으로 돌아왔을 때는 석문이 알려진 지 이미 몇 년이 지난 뒤였다. 가서 보았더니, 푸른 돌에 검은 빛깔의 글씨가 무척이나 기괴하여 뭐라고 형용할 수가 없었다. 권영숙(權永叔: 본명 권수. 숙종 때 황해도 관찰사)은 “석문이 돌이 처음 생길 때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기화(氣化)로 해서 생성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는데, 그 말이 옳다. 이어서 점을 치기를, “천리에 순종하여 상하가 화응(和應)한 것이니, 바르지 않으면 그 집안을 흉하게 할 것이다. 남모르게 스스로 덮어 둔다 해도 보지 못하는 이가 없다” 하였다. (기존 번역 전재)

熊淵石文記

熊淵. 在長景下十五里漣西之地. 吾自亂後南歸. 石文已出數年. 往觀之. 石靑字黑. 怪怪奇奇. 不可名狀. 權永叔曰. 石文與石俱生. 不可知. 或氣化成之. 其言得矣. 從而筮之曰. 順從而上下應也. 非正凶其家. 暗而自蔀. 無人不覿.

 

지도 2. 연강임술첩의 마지막 지역. 

그런데 미수 선생이 기록한 횡산과 문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도 2를 참고로 해 보자. 연천 중면에서 이 지역 지명 유래를 그려놓은 지도인데 미수의 글이나 연강임술첩 기록을 이해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된다.

 

두루미 마을을 알리는 표지판.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70년간 침묵 중인 장군교 교각이 보인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지도에 번호 1은 비끼산이다. 산이 강에 면하지 않고 비켜 앉아 있어 비끼산인가 보다. 한자로 쓰면 횡산(橫山)이 된다. 미수 선생의 횡산기는 바로 이곳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은 군사분계선 바로 남쪽 앞이다. 이곳에는 태풍 전망대가 있다. 강가로 내려오면 문석(文石)이 있다 한다. 문석에는 미수 선생이 써 놓은 글씨가 있다. 그러나 미수 선생이 횡산기에 기록한 나루(津)도, 절(도영암)도, 마을도 없다. 마을은 한참 아래로 옮겨 왔다. 번호 2는 미수 선생의 기록에 남아 있는 망저탄(望諸灘)인데, 지금은 망재여울이라 부른다. 고구려가 신라를 감시하던 망루가 있었다 한다. 4는 장군탄(將軍灘)이다. 지금은 장군이여울이라 부른다. 삼곶리와 강내리(장군리)를 잇던 다리(장군교)가 있었다. 지금도 다리 교각이 70년째 침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5는 괴미소라 부르는 물길이다. 괴미소는 곰소(곰소: 熊淵)이다. 안쪽 마을 6은 세 개의 산부리가 뻗어 나왔다 해서 삼곶리(三串里)가 되었다 한다. 이 지역은 이제는 사람의 발길은 끊어지고 두루미의 지역이 되었다. 남쪽 땅 최고의 두루미 월동지라 한다. 두리미도 보고 싶고 문석(文石)에 쓰여 있다는 글씨 석문(石文)도 궁금하다. 지금은 휴전선 아래 최북단이고 지뢰의 위험과 코로나로 인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문이 열려 평화 관광 코스가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접근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삼곶리 백제 적석총이 웅연에 가장 가깝다.

큰 나무 두 그루가 있어 한나절 웅연을 바라보며 힐링하였다. 웅연 앞 강물에서 손을 씻을 수는 없었지만 맑은 바람과 푸른 숲, 강물을 바라보며 그날의 뱃놀이를 그려 보고 온 날이다.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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