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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96) 쌍계입암] 영양 선바위 같은 기개 뽐낸 그녀의 ‘디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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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19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2.03.15 09:57:44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 그림 길은 동해 바다를 거슬러 내려와 청하에서 방향을 틀어 내륙으로 들어간다. 겸재는 특이하게도 우리 시대에도 오지 중 오지인 영양(英陽) 땅에 있는 선바위(立巖)를 그린 두 점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한 점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쌍계입암(雙溪立巖)이며 또 한 점은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림의 제목은 쓰여 있지 않지만 선바위(立巖)를 그린 그림이다. 국립박물관 소장본 그림에는 칠언절구(七言絶句)의 제화시(題畵詩)가 쓰여 있어서 이 선바위가 어디를 그린 것인지 알 수가 있다.

영양 땅은 그동안 접근성이 나빠서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필자도 중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이다. 몇 년 전부터는 접근성이 좋아져 영주에서 봉화 지나오는 국도가 편해지니 일월산 산행도 다녀 보고 외씨버선길도 다녀 보고 하면서 정이 든 땅이 되었다. 겸재 그림 길을 쓰면서는 아예 울진이나 포항 쪽 오는 날이면 영양에 들려 간다.

영양은 오랫동안 영해(寧海)부(府)의 속현으로 있었다 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동국여지승람을 뒤져도 영양을 찾을 수 없어 한참 고생을 했다. 이웃 고을 영해를 찾아보고 나서야 영해에 포함되어 있는 영양현의 기사(記事)를 조금 찾을 수 있었다. 영양이 독립적 행정단위가 된 것이 1683년(숙종 6년)이라 한다. 아차, 그런데 영해(寧海)는 또 어디인가? 영해는 울진 남부와 영덕 북부를 점하는, 한때는 이 지역 최대 고을이었다. 목(牧)이었던 때도 있었고 도호부(都護府), 부(府)인 때도 있었고 1896년에는 군(郡)이 되었다가 1914년에는 아예 폐군이 되면서 영덕군 영해면이 된 땅이니 땅의 내력으로 보면 참 애잔한 곳이다. 지금도 영해면에 가면 옛 고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겸재가 영양의 선바위(立巖)를 그린 것이 청하현감 시절인 1734년 무렵이라 한다. 그렇다면 겸재는 청하(淸河)에서 영덕(盈德)을 거쳐 영해를 지나 영양을 다녀갔을 것이다.
 

두 계류가 만나는 지점에 병풍처럼 버티고 있는 자금병.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흐르는 물이 살짝 보이는 쌍계입암

이제 겸재의 그림 쌍계입암을 보자. 제목은 쌍계입암(雙溪立巖)이라 했고 겸재는 자신의 또 다른 호인 원백(原伯)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가운데는 우뚝 솟아 있는 선바위(立巖)를 그렸고 좌측에는 부용봉(芙蓉峰), 우측에는 병풍처럼 펼쳐진 자금병(紫錦屛)을 그렸다.

현장에 가 보면 필자의 사진이 보여주듯 입암은 부용봉에 붙어 있는, 그림보다는 훨씬 작은 송곳 같은 뾰죽한 봉우리인데 그림에서는 참 많이 우뚝하다. 부용봉도 여러 갈래의 기암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는 아니다. 자금병도 많이 각색이 되었다. 겸재의 그림은 사진처럼 그리는 그림이 아님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그림이다. 그래도 결론은 그림이 볼 만하다는 사실이다.

 

겸재 작 쌍계입암도(간송 소장). 

제목에는 쌍계입암이라 했는데 그림에는 두 개울은 보이지 않는다. 가운데 우뚝 솟은 입암 뒤에서 흘러나오는 청기천(靑杞川)은 살짝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그러함에도 입암 뒤쪽 계류(溪流)에는 물결에 소용돌이를 그려 넣어 눈 밝은 감상자(鑑賞者)는 무언가 눈치챌 수 있게 힌트를 담아 놓았다. 본류로 흐르는 계류는 반변천(半邊川)이다. 옛 지도나 현대의 지도에서 보듯이 두 물줄기는 여기 입암 앞에서 합쳐져 낙동강 상류가 되어 안동댐으로 흘러간다. 반변천은 일월산 대티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데 예전에는 신한천(神漢川)이라고도 했으며 상류는 장군천(將軍川), 아래로 내려오면 대천(大川)이라고 불렀다. 이런 형승을 영양군 읍지에는 北控日月 南襟大川(북쪽은 일월산이 받치고 남쪽은 대천이 품는다)이라 했다.
 

겸재 작 입암도(국립박물관 소장). 

재미있는 것은 겸재의 다른 그림들이 그렇듯이 감상자인 인물을 그려 넣었는데 입암 건너 기슭에 두 사람이 입암을 감상하고 있다. 한 사람은 앉고 한 사람은 서 있다. 사람의 체구로 보면 앉아 있는 이는 동자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나무는 소나무인데 겸재의 다른 그림들처럼 팔 벌려 나란히 나란히 서 있다.

 

영양 옛 지도.
현재의 영양 지도. 

또 다른 입암 그림을 보자. 선바위(입암)를 더욱 강조하여 크게 독립시켜 우뚝 그리고, 좌측 부용봉과 우측 자금병은 앞 간송본보다는 다소 단순화시켰다. 그런데 입석은 층층이 올려져 있는 것 같은 모습이 무너져 내릴 듯 불안감을 준다. 하체보다 상체가 클 때 느끼는 불안감은 필자만 느끼는 것일까? 겸재나 원백이라 쓴 글씨는 없고 우측에 도장 하나 찍혀 있는데 겸재 도장이라 한다.

좌측 상단 제화시는 아래와 같다.

屹立風濤百丈奇. 바람 물결에 기이하게 백 장 높이 우뚝 섰네
堂堂柱石見於斯. 당당한 돌기둥 예서 보는구나
今時若有憂天者. 만약 지금 하늘이 무너질까 하는 이 있다면
早晩扶傾舍爾誰. 언젠가 기울어짐 받칠 이 너 말고 누구겠니?
立巖 입암(선바위)

이 제화시는 겸재의 시는 아니고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의 문집 석문집(石門集)에 있는 시인데 석문집에는 이 시 앞에 입암에 대한 설명이 있다.

“선바위(입암)라 하는데 바위는 적유(산)에 있다. 긴 양 골짜기 사이 강을 임해 우뚝 솟았다. 길이는 대략 백 여 장이고 바라보면 마치 깎아 만든 것 같다. 그 이름을 물으니 선바위라 한다.(題立巖 巖在狄踰, 長洞兩館間. 臨江峭立. 長可百餘丈. 望若削成然. 問其名則立巖云)”.

이 시를 쓴 정영방은 누구일까? 간단히 한국 건축사에서 석문 정영방 관련 부분을 참고해 보자.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은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포내리(浦內里) 출신으로 진사에 합격했으나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로 옮겨 와서 36세 때인 광해군 5년(1613)에 입암 근처에 서석지(瑞石池)라는 별서(別墅)를 짓고 은거한 유학자이다. 그의 문집이 석문집이며 후손들은 과거에 합격하여 두루두루 관직을 거쳤다. 지금도 이곳 서석지는 한국에 몇 안 되는 전통 정원으로 국가민속문화재 108호로 보호받고 있다.

한편 겸재는 1676년생으로 석문 정영방과는 100년 가까운 나이 차가 난다. 어떤 이유로 석문의 은거지 영양 서석지 지역에 와서 그림을 그렸고, 석문의 시가 화제로 그 그림에 남은 것일까? 혹시 석문의 후손들이 가까운 고을 수령으로 온 겸재에게 청을 넣어 입암을 그리게 하고는 화제로 선대의 시를 적어 놓은 것은 아닐까? 정영방의 석문집에는 입암 근처 명소에 대한 시들이 여럿 남아 있다.

임천잡제십육절(臨川雜題十六絶)이라 하여 개울가 16 절경을 노래한 시들이 실려 있다. 줄여서 입암 근처 절경 몇 수만 보자.

立石 在合江. 高十餘丈. 입석은 강이 합쳐지는 곳에 있다. 높이 10여 장이다.
六鰲骨未朽. 撐柱五雲層. 杞婦獨癡絶. 謾憂天或崩.
여섯 길 자라뼈 썩지 아니하고
다섯 구름층에 기둥으로 버티는구나
기(杞)나라 여인네들 심히 절규해도
하늘이 무너질까 공연한 근심이지

集勝亭 在立石上 집승정 입석에 있다.
爲待漁舟子. 巖扉夜不扃. 淸宵林下見. 月滿集勝亭.
고깃배 기다리다
밤에도 바위 사립 잠그지 않았네
맑은 밤 숲 내려다보니
집승정에는 달이 가득

芙蓉峯 卽集勝之上峯 부용봉 곧 집승정의 상봉이다.
誰將玉井蓮. 種在銀河畔. 煙雨去相遙. 孤芳猶未綻.
누가 옥정의 연꽃을 보냈나
은하의 언덕에 씨앗 심었지
이내와 비는 아스라이 내리는데
우뚝한 꽃몽오리 아직 터지기 전

紫錦屛 자금병
紫蓋丹扆北. 芙蓉壁月東. 人間奇絶地. 盡在一屛中.
자줏빛 덮은 붉은 북쪽 병풍과
부용봉 절벽 달은 동편에
인간 세상 기이한 절경의 땅
모든 게 한 병풍 안에 있구먼

 

입암과 부용봉.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 설명을 보면 입암 옆에 집승정이 있고 집승정이 있는 산봉우리는 부용봉이며 건너 바위벽은 자금병이라 했다. 이 자금병과 부용봉(입암) 사이를 석문이라 해서 영양읍지에는 쌍계입암 대신 석문입암이라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집승정은 어떤 건물이었을까? 광해군, 인조의 시대는 난세였는데 인목대비 폐비사건과 관련하여 영양으로 유배 온 학자가 있었다. 그 이름은 약봉 서성(藥峰 徐渻: 1558~1631). 이이, 송익필의 문인으로 59세 되던 1616(광해 8년) 유배 와서 6년여를 지냈다 한다. 집안 후인들이 정리한 약봉유고(藥峰遺稿)의 부록을 보면,

 

집승정 사적: 집승정 옛터는 지금 영양현 남쪽 20리 자양산 아래 입석 옆이다. 옛 광해군 때인 병진년(1616년)에 우리 선조 약봉 선생이 영해부에서 유배살이를 하셨다. 영양은 영해의 속현이다. 입암은 큰길 옆에 있는데 산수가 매우 기이하다. 약봉 선생께서는 여기에 서까래 몇 개 엮고 집승정이라고 편액했다. (集勝亭事蹟: 集勝亭遺址. 在今英陽縣南二十里紫陽山下立巖之側也. 粤昔光海丙辰. 我先祖藥峯先生謫居寜海府也. 英爲海屬縣. 而立巖在於孔路之旁. 山水甚奇絶. 先生乃構數椽. 扁以集勝)

 

자금병과 부용봉 사이의 석문.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약봉유고에는 석문 정영방을 비롯하여 자주 찾아뵙던 이들의 시들을 찾아오려 놓았다. 이 글과 굳이 관련이 없으니 소개하지는 않는다. 약봉에 비해 근 20년 연하인 이들은 아마도 약봉과의 교류를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특히 석문 정영방의 서석지는 집승정과 근접한 거리에 있었으니 더욱 가까웠을 것이다. 이제 석문 정영방의 서석지를 찾아간다. 입암에서 지근거리에 동래정씨 집성촌인 연당마을이 있다. 석문이 입향하여 서석지를 지은 이후 동래정씨 마을이 되었을 것이다. 마을도 옛 모습이 어느 곳보다도 곱게 남아 있고 그 중심에는 서석지가 있다. 연못을 파고 돌을 넣어 서석(瑞石)이라 이름 짓고 매국송죽(梅菊松竹)을 심어 사우단(四友壇)을 만들고 본당인 경정(敬亭)과 주일재(主一齋) 등 소박한 건물을 배치해서 유학자의 멋과 마음 공부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보길도의 세연정을 생각하면 상상이 될 것이다.

 

연당마을의 옛집 대문.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석문집에 보면 이렇게 서석지를 조성해 놓고, 말은 경정잡영삼십이절(敬亭雜詠三十二絶: 경정에서 이렇게 저렇게 읊은 32절)이라면서 유학자의 도리를 굳게 강조하고 있다. 재미없는 글이니 한 편만 읽고 가자.

敬亭 경정(서석지의 본당 건물)
有事無忘助. 臨深益戰兢. 惺惺須照管. 毋若瑞巖僧.
일이 있으면 돕기를 잊지 말며
깊은 물에 선 듯 더욱 전전긍긍하라(조심하라)
깨닫고 깨달아 반듯이 훤히 관장하고
서암승 같이 되면 아니 되느니라

여기서 서암승이란 말은 심성 수양을 하지 않고 참선만 하는 서암의 중처럼 되지 말라는 말이라 한다. 송나라 진덕수(眞德秀)가 경전과 도학자들의 저술에서 심성 수양에 관한 격언을 모아 편집한 책 심경(心經)에서 “서암(瑞巖)의 중(僧)은 매일 항상 스스로 자신에게 묻기를 ‘주인옹(主人翁)은 성성(惺惺)하신가?’ 하고는 또 답하기를, ‘성성하노라’”고 하는 의미 없는 일만 한다고 하는 말이다. 이렇듯 석문은 영양 서석지에 은거하여 철저히 성리학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그랬는지 서석지 앞 후기 신라 약사여래불은 심하게 훼철(毁撤)되어 치유가 어려운 중상 상태에 있다. 이런 석문의 취향과 잘 맞는 주변 동학(同學)들이 있었다.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名), 호은 조전(壺隱 趙佺), 사월 조임(沙月 趙任) 등이었다. 이들은 성리학에 입각하여 생활하고 실천했다.

모범이 된 그녀 장계향

이들 중 석계 이시명의 아내는 누구와 견주어도 훌륭한 여류였다. 그녀의 이름은 장계향(張桂香)이다. 아버지는 영남의 큰 학자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인데 제자 이시명이 상처(喪妻)를 하자 묻지도 않고 외동딸 계향을 두 애가 딸린 여덟 살 위 이시명에게 시집보냈다. 계향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어깨너머로 소학을 떼고 여러 경전에 눈떴는데 아버지는 부도(婦道)를 생각하여 예기(禮記)에 치중토록 했다는 것이다.

 

장계향의 표준영정.

이렇게 시집온 계향은 며느리로, 아내로, 어머니로, 할머니로 모범이 되었다. 그녀의 시(詩)와 서(書)는 당대에 겨룰 여류가 없었으며 지금 남아 있는 유품들을 보아도 최고다. 세간을 나면서 유산도 받지 않고 부부가 자수성가했으며 황무지를 개간하고 산에 도토리를 심어 흉년이 닥치자 수십 명을 구휼하였으니 노블레스 오불리쥬를 실천한 이였다. 노년에 들어 저술한 ‘음식디미방’은 한문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저술한 우리나라 최고(最古, 最高)의 한글 요리책이다. 당대 사람들은 장계향 할머니를 여중군자(女中君子)라 했다. 요즈음도 어디 음식점에 갔다가 ‘디미방’이라는 상호를 만나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이 땅 최고의 여류, 그곳에 가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녀가 10대에 썼다는 시 한 수 읽고 가련다.

蕭蕭吟 소록소록 읊으며
窓外雨蕭蕭 창 밖 빗소리 소록소록
蕭蕭聲自然 소록소록 그 자연의 소리
我聞自然聲 자연의 소리 듣고 있노라면
我心亦自然 내 마음도 자연

이제 기왕에 먼 고장까지 왔으니 두 곳만 더 들러 가리라.

청록파 시인 조지훈 생가가 있는 주실마을. 남향 햇빛 아래 편안한 옛 마을인데 조지훈 문학관도 있고 조지훈 시공원도 있다.

 

산해리 모전탑.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모전탑의 감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또 하나는 국보 187호 산해리 모전석탑(模塼石塔). 영양은 옛 후기 신라 때에는 상당히 번성하던 불국토였던 것 같다. 곳곳에 석탑이 있는데 어느 것 하나 조악한 탑이 없다. 필자가 만난 탑만 해도 6곳에 있는 석탑이었다. 그중 입을 담을 수 없게 하는 탑이 산해리 오층 모전석탑이다. 갈 때마다 감회가 깊다.

절은 몇 개의 기와편이 되고
터는 풀밭 되었네
이름은 잊혀져 알 수 없음 되었네

거기 천년도 훨씬 넘겨 탑 하나 서 있네
사람들은 국보라 이름 짓고
번호로 이름 붙였네
묻지도 않고 몇 호라 부르네
죄수가 되었네

그건 죄일지도 몰라
사라질 때 사라지지 못한 거
잊힐 때 잊히지 못한 거

 

옛 탑을 그린 지도.

탑은 오늘도 하늘에 얼굴 묻고 있다.

나 그리운 게 참 많단다

국보 187호 앞에서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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