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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승계 100년 독일 기업인데, '솜털처럼 경쾌' 어떻게? … 하루에도 몇번씩 ‘홍콩 가는’ 보이러 직원들

베를린 IFA에서 만난 4차산업혁명 ‘좋은 사례’ … “회사는 등댓불 비출 뿐 직원들이 자율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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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57호 베를린=최영태 기자⁄ 2023.09.11 16:08:21

폐플라스틱 등을 업사이클링해 제품화하는 '녹색 지구(그린 플래닛)' 브랜드를 펼치고 있는 마르코 뷜러 사장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느껴보라"며 관련 신제품 전기담요를 자신의 뺨에 대보이고 있다. (사진=최영태 기자)

독일 회사인데, 104년이나 됐다. 전문경영인 없이 일가족이 4대째 경영 중. 노조는 당연히 없고, 따라서 독일 특유의 민주적 공동결정(Mitbestimmung: 노조 대표가 이사회에 자리를 차지하고 경영에 참여) 제도도 없다.

위 사항들을 죽 읽는 것만으로도 중압감이 느껴진다. 독일 중에서도 특히 보수적이라 한국 경상도에 비유되는 남부 독일의 울름(Ulm)에 소재한 회사라니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 회사 직원들은 선입견과는 달리 경쾌하다. 깔깔거리며 대화하고, 근무 시간 중에 툭하면 “홍콩 가자”며 자리를 뜬다. 물론 근무 시간에 홍콩으로 떠나는 건 아니고, 홍콩, 취리히, 비엔나 등의 유명 관광지이자 자회사가 있는 도시의 이름을 붙인 소회의실로 미팅하러 가는 행태다. 일을 하건 않건, 근무 시간에는 엉덩이로 자리를 지켜야 하는 한국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창의적 아이디어는 멍 때릴 때 또는 딴짓 할 때 제일 잘 나온다고 한다. 일상의 틀을 벗어나야 비로소 뇌 회로가 열리며 비상한 생각이 떠오른다는 이치다.

같은 회의라도 “자, 회의실에서 회의합시다”와 “우리, 홍콩 갈까?”는 같을까 다를까? 회의실로 회의하러 가는 발길은 느릿느릿할 것만 같고, 홍콩 또는 비엔나 회의실로 미팅 하러 가는 발길은 왠지 가벼울 것 같다.

신사옥의 '홍콩 회의실'에서 밖을 바라본 모습. 왼쪽 위에 홍콩이란 방 이름과 4명 정도까지 모일 수 있는 방이란 표시가 돼 있다. 앞쪽으로 일반 사무실 풍경이 펼쳐지지만 왼쪽의 높은 테이블에서도 간이 미팅을 가질 수 있다. (사진=보이러의 신사옥 소개 유튜브 동영상 캡처)

역사 깊은 중견 기업으로서, 작년에 ‘독일 100대 가족 기업’ 명단에 42등(정수기로 유명한 BRITA가 21등, 필기도구로 유명한 Faber-Castell이 40등)으로 이름을 올린 보이러(Beurer. 건강-웰빙 전자 업체)는 이처럼 직원들을 경쾌하게 만드는 노력을 다양하게 펼친다.

주도자는 4대째 경영을 맡고 있는 마르코 뷜러(Marco Buehler) 사장. 54세인 그는, 연매출 6000억 원대(작년 기준) 기업의 오너이면서도 자전거로 출퇴근한다. 고급차와 명품이 넘치는 유럽 중심부의 부자지만 “비싼 차도 없고, 고급 시계도 없다”며 자신의 팔을 보여준다.

최근 중국 시진핑은 3연임을 시작하면서 중국이 지향하는 모델 국가로 독일을 꼽았다. 이 말을 듣고 필자는 “경제 강국이지만 디지털에 뒤져 꺼져가는 독일을 모델로 삼는다고?”라며 비웃었다. 그러나 보이러 직원들을 현장에서 보고, 뷜러 사장을 인터뷰한 뒤에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독일 경제가 어렵다고는 해도 보이러 같은 기업이 있는 한 독일 경제의 저력은 만만치 않고, 한국 또는 중국의 선례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시각교정이었다. 다음은 뷜러 사장과의 일문일답이다.

- 보이러는 코로나19가 휩쓴 지난 3년간 185억 원을 들여 새 사옥을 지었고, 신사옥에 기업 정신을 담았다는데?

“기존 사옥에 한계를 느껴 코로나 이전부터 사옥 신축을 구상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덮쳐 왔고, 재택근무로 얼마나 훌륭한 성과를 올릴 수 있는지 증명돼 놀라웠다. 코로나 기간 동안 직원들은 집에서 외롭게 재택근무를 해야 했지만, 사옥 신축에는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하이브리드 신사옥’을 완성하고 작년 4월 입주했다. 회사 근무와 재택근무를 결합했기에 하이브리드다.

 

회사원들은 하루에 30분이든 1시간이든 시간과 노력을 들여 출-퇴근한다. 재택근무만으로 훌륭하게 일을 마칠 수 있다면, 왜 힘들여 출퇴근해야 하나? 그런 노력에 걸맞는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바로 ‘만남’이다. 서로 다른 직원들이 만나 의견과 정을 나눠야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진다.

하이브리드 신사옥 ‘보이러 캠퍼스’의 새 근무 규칙은 회사 60%, 집 40%다. 주 5일 중 사흘 출근, 이틀 재택이 기본이다. 3 + 2 근무 시스템 적용 뒤 직원들이 매우 행복해 한다. 물론 개인별 조정이 가능해 신축성이 있다. 홈오피스 설치 비용의 절반은 회사가 부담한다. 소프트웨어 개발직처럼 직종에 따라 재택근무 비율을 더 높일 수도 있다. ”

각 부서별 개인 좌석 옆에는 커다랗고 키 큰 테이블을 배치해 언제든 자리를 옮겨 다른 기분으로 미팅을 할 수 있게 설계했다. (사진=보이러 제공)

- 새 사옥 사무실 배치의 특징은?

“새 사무실은 기본적으로 열린 공간(open space)이다. 업종에 따라 4개 ‘섬’으로 나뉘어 있지만, 언제든 좌석에서 빠져나와 우연한 만남, 인간적 순간이 가능하도록 비공식적으로 만날 회의실이 곳곳에 설치돼 있다. 편안한 만남은 특히 젊은 MZ세대 직원들에게 중요하다. 그들에게 일은 일일 뿐이지, 일평생에 걸친 경력 관리는 중요 관심사가 아니다. 보이러는 500여 제품군에서 매년 약 65개의 신제품을 내놓는다.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회사이기에 부서들 사이의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

신제품 개발에서 인간적 요소(human factor)는 무척 중요하며, 우리는 전체 개발 과정에서 이러한 성격이 유지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친근한 만남이 가능하도록 4층에 무료 카페가 운영된다. 다양한 형태의 좌석에서 홀로 또는 여럿이 커피를 마실 수 있다. 화사하게 칠해진 칸막이 좌석에서 홀로 일하거나 쉴 수도 있다. 개방적이고 따뜻한 우리 사무실이 보이러의 경영 철학을 말해준다. 회사와 직원은 이렇게 서로 주고받는(기브 앤 테이크) 관계다."

다양한 형태의 좌석이 마련된 사옥 4층의 무료 카페. (사진=보이러 유튜브 동영상 캡처​​)
'머리 식히는 공간. 그냥 쉬세요' 등의 문구가 보이는 사옥 4층의 무료 카페. (사진=보이러 제공)

- 하이브리드 신사옥에 대한 직원들의 만족도를 테스트해 봤는가, 숫자적으로?

“그런 숫자적 테스트를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직원들 표정에서 그들이 매우 행복해 함을 안다.(웃음)”

- 경영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직원들에게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당신이 제시하는 비전은 무엇인가?
 

“물건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웰빙과 건강으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회사라는 점이다. 온화함, 부드러운 정감을 만들어내고 지구에 좋은 일을 하는 것 등이다. 숫자가 아니라 이런 철학을 제시하는 게 나의 비전이다.”

- 경영자들은 흔히 외부에서는 그런 아름다운 말을 하지만, 막상 회사로 돌아오면 “올해는 무조건 몇% 성장해야 한다”며 숫자를 제시해 직원들을 쥐어짠다. 한국 직장인들이 힘들어하는 이유다. 당신도 그런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최근 몇 년간 인플레이션과 전쟁 탓에 경영이 힘들었다. 하지만 올해 한국 법인 ‘보이러 코리아’가 신설되는 등에 따라 10~15% 성장을 전망한다. 나는 숫자를 먼저 제시하지 않는다. 회사의 철학-비전이 앞서고 돈은 뒤따라올 뿐이다.

우리가 제품을 개발하는 것은 고객과 최종 사용자를 위해서이지 시장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것이 우리의 성공 공식이다. 고용자로서 우리는 사람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간단한 위계질서와 스스럼없는 문화를 갖춘 가족 회사다. 열린 대화와 솔직한 의견 교환, 직원들의 걱정과 사안에 깊이 개입하도록 회사는 권장한다.”

컬러풀하게 채색된 개인 휴식-업무 공간. 방해받지 않고 일하거나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사진=보이러 유튜브 동영상 캡처​​)

- 당신은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등대 프로젝트’라는 단어를 말한 적이 있다. 강압적으로 사원들을 몰아가는 게 아니라 경영진은 등댓불처럼 방향만 비추고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오게 만든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되는가?


“맞다. 훌륭하게 이해했다. 회사는 방향만 제시하고 직원들이 즐겁게 그 방향으로 따르게 해야지, 강압적으로 끌고 가려 해서는 안 된다. 신사옥의 사무실은 기본적으로 툭 트인 오픈 공간이다. 하지만 그런 공간에서 일하기를 원치 않는 개인-부서도 있다. 그런 경우는 조정해주면 된다. 재택근무든 사무실 근무든 회사는 등댓불만 비춘다.”

- 본 기자는 이번 취재에서 특히 독일 특유의 공동결정 제도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IFA 전자 전시회(9월 1~5일 베를린에서 개최)의 보이러 부스에서 물어보니 보이러는 가족 기업이라 공동결정 제도를 실행하지 않는다고 해 실망도 했다. 노조가 없고, 4대째 승계 경영을 하면서도 당신은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평평한 위계질서(flat hierarchies)’를 자랑했다. 가족 기업에서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 회사의 위계질서는 단순한 4단계다. 경영진 → 팀 리더 → 리더 → 직원이다. 이런 위계질서여서 신속한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4단계라지만 소통은 완전히 열려 있다. 내가 언제든 직원에게 말을 건넬 수 있듯, 직원들도 언제든 내게 말할 수 있다. 직원들에게 직접 확인해보라.”

- 새 사옥 장만 뒤 직원 채용이 더욱 용이해졌다고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직원 채용의 원칙은 무엇인가?
 

“변화가 빠른 세상이다. 그렇기에 직원은 전문성을 갖췄으면서도 변화에 즉시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보이러의 문화에 잘 젖어들면서도 ‘변화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을 가장 먼저 채용한다.

가족 회사라는 점도 채용에 도움이 된다. 경영진이 장기 비전을 제시할 수 있고, 직원들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 올해 보이러 코리아가 신설된다. 한국 시장에서 특히 주력할 제품군은?

“보이러는 1919년 전기담요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꾸준히 신제품과 기술 개발을 해온 보이러 전기담요는 한국에서도 인기 상품이다. ‘보이러 그린 플래닛(Beurer Green Planet)’이란 이름으로 친환경적이면서도 오래 쓸 수 있는 보온 제품군을 계속 내놓고 있다.

남성을 위한 ‘멘케어(MenCare)’, 여성을 위한 ‘우먼스 라이프(Woman's Life)’ 제품군, 그리고 치아 건강을 위한 ‘덴털케어(DentalCare) 라인을, 10여 년 전부터 시작한 미용 제품군과 함께 앞으로 더욱 다양하게 펼쳐나갈 것이다. 보이러 코리아가 새 상품을 때맞춰 공급할 것이다.”

IFA의 보이러 부스에서 포즈를 취한 마르코 뷜러 사장. 뒤쪽으로 '멘케어', '그린 플래닛' 등 이번 전시에서 보이러가 주력한 제품 라인업을 말해주는 간판이 보인다. 

-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은 일견 운동선수 출신 같은 날씬한 몸매를 갖고 있다. 어떤 운동을 하는지?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한다. 나는 비싼 차도 없다. 조깅과 자전거 타기 운동을 한다. 내 웃는 얼굴이 회사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미침을 잘 알고 있다.”

독일 경영학 박사인 최동석 전 한양대 교수(현 최동석인사조직연구소 소장)은 책 ‘4차산업혁명과 제조업의 귀환’에 다음과 같이 썼다(435쪽).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은 (중략) 업무수행 과정에서는 자기주도적 능력, 의사소통 능력, 자기조직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구성원들의 독립된 자율적 주체로서의 능력과 잠재력이 더욱더 강하게 요구되고 있다.” 자기주도적, 소통, 자율적 등의 단어가 눈에 띈다. 

100년 역사의 가족기업이면서도 직원들이 희희락락하는 보이러에서, 최 박사가 말한 ‘4차산업혁명 노동의 좋은 사례’를 엿본 듯 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뷜러 사장은, 본 기자가 독일 언론의 기사를 미리 읽고 회사의 비전, 등대 프로젝트 등을 물은 데 대해 “그간 독일 등의 기자들과 여러 번 인터뷰를 해봤지만 오늘처럼 수준높고 흥미있는 인터뷰는 처음”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기자로서 행복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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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러  4차산업혁명  전기담요  IFA  공동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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