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9호 천수림(사진비평)⁄ 2024.04.02 14:57:00
임흥순은 1990년대 후반부터 영상과 영화, 사진 등을 통해 사회 속에서 목소리 없이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왔다. 개인사에서 한국 근현대 사회사로 연결되는 지점에 관심을 두고 권력과 불평등, 개인과 국가의 주권 문제에 대해 다뤄왔다. 타이완의 작가 후이팅도 식민주의와 국가 정체성, 집단사와 개인의 기억 등의 복잡한 문제를 다룬다. 특히 여성의 노동에 관심을 두고 있다.
임흥순, ‘추억록’
여성의 일을 주제로 한 수원시립미술관 기획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6월 9일까지)은 일을 하며 살아온 여성들의 헌신적인 삶에 대한 경의를 담았다. 강용석, 권용주, 김이든, 로사 로이(독일), 방정아, 임흥순, 카위타 바타나얀쿠르(태국), 후이팅(대만)이 참여했다. 사진, 설치, 비디오 매체를 통해 작업하는 임흥순과 후이팅은 ‘오래된 사진’을 푸티지로 활용했다. 과거의 정지된 이미지가 어떻게 빅히스토리로 재탄생할 수 있을까.
‘위로공단’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한 임흥순은 수상 후 “봉제공장 시다로 살아온 어머니와 백화점 의류 매장, 냉동식품 매장에서 판매원으로 일한 여동생의 삶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시다의 아들’이었다.
위로공단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여성 공장 노동자들 소위 ‘여공’이라고 불리던 여성 노동자들이 직면한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을 주로 다뤘다. 1970년대 여공으로 불렸던 여성 노동자들부터 다양한 노동 현장에서 만난 마트 점원, 콜센터 상담원, 승무원 등의 이야기를 담았다.
여성, 노동, 역사에 대한 관심은 위로공단 이전 작업인 ‘내 사랑 지하’, ‘이천 가는 길’, ‘추억록’(Memento, 2003) 등의 작업에서도 다뤘던 주제다. 도시 빈민이자 노동자였던 부모님의 이야기는 다양한 작품에서 등장하지만, 특히 추억록은 더 도드라진다. 이번 기획전에서는 추억록 외에도 위로공단과 ‘려행’은 전시연계 스크리닝에서 만날 수 있다.
임흥순의 미디어 작품 추억록에서는 그의 가족 스냅사진과 부모님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을 담은 이미지가 등장한다. 2채널인 영상의 왼쪽에는 작가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젊은 시절이 담긴 스냅 사진과 다양한 자료사진이 오른쪽에는 가족사진을 찍으러 모인 가족 3대를 기록한 영상을 병치시켰다.
추억록은 사진첩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사진집Ⅰ’, ‘사진집Ⅱ’ 새롭게 촬영한 ‘가족사진’으로 구성돼 있다. 이 외에도 가족 앨범에 있는 임흥순 개인 사진과 교과서, 인터넷 등의 출처에서 수집한 공공 기념물 사진을 절충한 작품이다.
사진집Ⅰ에는 주로 1970~80년대 가사와 노동에서 벗어난 어머니의 사진이 들어있고, 사진집Ⅱ는 아버지의 사진으로 이뤄져 있다. 어머니의 사진은 대부분 동네 모임에 가거나 공장 동료들과 소풍을 갔을 때 찍은 것이다. 사진 찍기를 좋아한 작가의 어머니는 화려해 보이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사진 촬영하거나, 기념비, 자동차 옆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녀의 사진에는 언젠가 어딘가에 큰 정원이 있는 2층짜리 집을 갖고 싶다는 평범한 노동자 계급 여성의 동경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반면에 아버지는 친구나 동료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1970년대 노동자들의 여가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1977년에 찍은 한 사진에는 ‘국가 안보를 위한 교육, 개혁 활성화’라는 슬로건이 적힌 건물도 보인다.
추억록의 작가노트엔 “지난 40년 동안 우리 가족이 생활하고 일했던 서울 장안동과 답십리 일대는 이제 고층 아파트와 아스팔트 도로로 가득 차 있다. 한때 그 지역에 있던 양파 밭과 작은 아파트, 공장의 모습은 이제 사진 속에만 남아 있다”고 적혀 있다.
런던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이자 예술가인 조지 클라크는 ‘빨강, 파랑, 그리고 노랑 - 임흥순 - MMCA 작가연구 1’(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임흥순의 작품을 선형적 시간 개념이 아닌 생태학적 순환 개념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했다. 개인과 가족의 이야기에서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역사로 이행하는 그의 작업에 ‘스냅사진’ 한 장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역사가 담겨 있다.
후이팅, ‘화이트 유니폼’
타이완 작가 후이팅은 비디오, 퍼포먼스,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주로 여성의 노동조건과 환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번 수원시립미술관 기획전에서는 대만의 변형 도시락을 만드는 여성들의 노동현장을 다룬 작품 ‘화이트 유니폼’(2017)을 만나볼 수 있다. 단편영화와 사진 시리즈로 구성된 화이트 유니폼은 타이베이 인근 치두에 있는 대만 철도청 주방 직원들과 협력해 제작된 것이다. 도시락은 일제 강점기의 문화적 유산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만일제 치하 시기부터 이어진 열차용 도시락 산업의 현주소를 탐색한 화이트 유니폼에서는 주로 대만의 변형 도시락을 만드는 여성들의 작업을 살펴본다. 작가는 대만식 도시락 상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주로 여성의 작업과정을 따라간다. 스텐실을 이용해 김을 잘게 잘라 밥 위에 얹는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도시락은 대만의 모국어인 호키엔어(Hokkien)로는 벤동(bendong), 만다린어(Mandarin)로는 비안탕(biantang)으로 불린다. 이 도시락은 일제 강점기의 문화적 유산으로 남았다. 화이트 유니폼은 장거리 기차 여행에서 도시락을 먹는 소박한 즐거움과 추억을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식민주의와 국가 정체성, 성차별과 노동관계, 집단적 역사와 개인적 기억의 복잡다단한 문제를 소환한다.
이 영상 속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스텐실을 사용해 밥 위에 얹을 김을 잘게 자르고, 벤동 상자 표지에 있는 역사적인 디자인을 재현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첨부된 사진에 기록된 이 디자인은 대만의 철도가 수출용 천연자원 수송을 위해 집중적으로 개발되던 일제강점기(1895~1945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벤동 상자에는 이렇듯 그 시대의 역사적인 디자인을 재현하고 있다. 대부분의 디자인은 샌드위치, 치킨 도시락, 타이중산 바나나를 광고하는 일본어 문구 등 전시 선전물을 포함한 추상적인 디자인도 포함된다. 영상 안에는 철도 여행의 역사적 장면(일제강점기 시절)을 담은 푸티지 영상과 직원 및 상사의 인터뷰를 교차 편집해 보여준다. 작가는 기차 여행 속에서 즐기는 도시락의 소소한 즐거움을 통해 집단사와 개인의 기억, 성별의 차이와 노사관계, 식민주의와 국가 정체성 등의 복잡한 사회 역사적인 문제를 다룬다.
대만의 계엄령 시대에 성장한 작가는 학창 시절에 받았던 엄격한 규율, 훈련과 노동, 당시 사회가 신체와 성별을 정의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녀의 작업에는 자수를 수놓듯 개인과 반복적인 제작 과정, 개인과 집단의 역사가 대비를 이루며 얽혀 있다.
후이팅은 이 외에도 대만의 일련의 식민지 및 정치 체제가 노동력에서 여성의 역할과 여성 노동과 관련된 특정 상품을 어떻게 결정했는지를 고찰한 ‘봉제밭(Sewing Field)’, ‘리크수 치암실롱(Lík-sú Tsiam-tsílâng)’ 시리즈에서는 대만의 여학교를 찍은 오래된 사진을 재사용했다. 작가가 선택한 오래된 사진들은 대부분 여학생들이 여럿이 모여 바느질, 자수, 꽃꽂이 등의 장면이 담겨 있는 것들이다.
특히 노동력에서 여성의 역할에 관심이 많은 작가는 이외에도 이미지와 비디오를 자수와 결합해 일상에서 이미지를 식별하는 방식에 도전했다. 70년 동안 같은 공장에서 이뤄진 대만 철도 승객을 위한 정교한 도시락의 단조로운 준비는 마치 자수를 놓는 것과도 같다.
<작가소개>
임흥순(IM Heung-soon, 1969년 출생)은 시각예술가이자 영화감독. 현재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현대미술과 공공미술로서의 다큐멘터리 영화, 개인과 공동 작업, 전시 공간과 극장, 일상의 현장을 넘나들며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기획, 제작하고 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환생’(MoMA PS1, 2015),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MMCA 현대차 시리즈, MMCA, 2017), ‘고스트 가이드’(더 페이지 갤러리, 2019), ‘타이틀 매치’ 등이 있다. 2002년과 2010년 광주비엔날레, 2015년 샤르자 비엔날레와 베니스 비엔날레, 2016년 타이베이 비엔날레, 2018년 카네기 인터내셔널 등 다수의 국제 전시회와 영화제에 초대됐다. 영화감독으로서 ‘제주의 기도’(2012)를 시작으로 8편의 장편 영화를 발표했다. ‘위로공단’(2014)으로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을, ‘려행’(2016)으로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센터 P 등 국내외 주요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후이팅(Hou I-Ting, 1979년 출생)은 가오슝에서 태어나 현재 타이베이에서 활동하고 있다. 디지털 이미지와 비디오를 자수와 결합해 일상적인 이미지를 식별하는 방식에 도전하는 동시에 평범한 시각적 경험을 재구성한다. 스위스 취리히 쿤스트라움 발체투름에서 열린 제25회 비디오엑스 실험영화 및 비디오 페스티벌(2023), 독일 볼프스부르크 쿤스트뮤지엄에서 열린 임파워먼트(2022), 창원국제조각비엔날레, 일본 가나자와 21세기 현대미술관, 칠레 산티아고 라 모네다 문화센터, 호주 제9회 아시아 태평양 현대미술 트리엔날레, 스페인 사라고사 역사센터 등의 전시에 참여했다. 타이베이미술관, 가오슝미술관, 국립대만미술관, 콴두미술관, 화이트 래빗 갤러리, 퀸즐랜드 미술관, 현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글: 천수림 사진비평
이미지 제공: 수원시립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