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분포(盆浦)의 절(옥수동 미타사)을 떠난 매월당은 일단 한양으로 들어왔다. 먼 길을 떠나기 위해서였다. 금강산 길이다. 조선인들에게 최고의 여행지는 단연 금강산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가 되면 선비라면 한 번은 다녀오고 싶어 했고 더욱이 화인(畵人)이나 시(詩) 좀 쓰는 이라면 금강산을 그리거나 읊은 작품 한두 개는 갖기를 원했다.
그뿐이겠는가? 번암 채제공이 쓴 만덕전(萬德傳)에는 금강산을 다녀온 여인 이야기가 있다. 1795년(정조 19년) 제주에 큰 기근이 있었다. 만덕이라는 기녀 출신 아낙이 있었는데 장사로 수천금을 모았다. 이때 그녀는 천금의 재물을 내어 관아에서도 못하는 기근 구휼(굶주림 구제)을 하였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정조께서 그녀의 소원을 묻도록 했다. 그녀 왈 “달리 바라는 바는 없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한양 구경과 금강산 구경을 하고 싶습니다”. 채제공의 지원과 정조의 허락으로 그녀는 1796년 한양에 올라와 한양 구경을 했고, 이듬해 금강산에 가 내금강, 외금강을 원 없이 구경했다. 나라에서는 그녀가 지나는 길 수령들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토록 했다. 여장부였다.
금강산의 인기는 외국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599년 조선에 온 명나라의 왕사기(王士錡)는 역관 이규상(李虬祥)을 불러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으니 경유하는 노정을 써 가지고 오라”고 했다. 이때 이규상은 기지를 발휘하여 왜란 이후 모든 길이 다 무너지고 막혀서 갈 수가 없다고 해 이를 모면했다. 금강산은 중국 사람들도 가고 싶어 했던 곳이었다. 조선말에는 동네 노파 중에도 금강산을 다녀오는 이들이 나타났다. 일제강점기에는 철도도 뚫려 수학여행 코스로 각광받았다.
1459년 25살의 매월당도 금강산 길에 올랐다. 여행길이기보다는 운수행각(雲水行脚: 발길 닿는대로 떠도는 것)이었다. 동대문을 나서 수유현 넘고 누원(樓院: 다락원, 도봉동) 지나 의정부를 지났으리라. 축석령을 넘으면 만세교까지가 포천현(抱川縣)이다. 그 뒤는 영평(永平) 지나 김화(金化) 지나면 이제는 북녘 땅이 된 금성과 회양이다. 여기서는 금강산이 코앞이다. 매월당의 여정은 아쉽게도 수유현, 다락원, 의정부, 축석령은 남아있지 않고 포천으로 이어진다. 매월당의 詩는 사후(死後) 흩어진 것들을 모아 매월당집(梅月堂集)을 묶었으니 아쉽게도 지나는 길 듬성듬성 이빨 빠지듯 빈자리가 많다. 詩는 남아있지 않더라도 남아있는 詩들을 이으면 그의 詩 길을 이을 수 있다. 어느 날 마음 바람나면 이 길로 나서 볼 일이다. 이렇게 나서는 이들이 길 잃지 마시라고 이 글을 쓴다.
관북대로 길인 의정부 서오랑점을 지나면 포천의 입구 축석령(祝石嶺)이다. 이 고갯마루에 비가 내려 동으로 떨어지면 포천으로 가서 한탄강, 임진강이 되고, 서로 떨어지면 의정부, 양주로 가서 중랑천이 된다. 이 물은 저자도 앞에서 압구정동을 바라보며 한강으로 들어간다. 한양에서 금강산 가는 사람 대부분은 이 고개를 넘었다. 1792년(정조 16년) 정조도 광릉 행차 길에 이 고개를 넘다가, 돌을 채취하고 묘지를 쓰고 화전을 일구는 것을 보고는 이를 금지했다. 옛 가치관으로는 능(陵)으로 가는 길의 지맥이 훼손되면 안 되기 때문이었으리라. 지봉유설을 쓴 지봉 이수광은 이 고개를 넘어 현등산(운악산) 아래 있는 형님 집에 들렀다. 이때 詩 한 수 남겼다.
포천의 큰형 댁에 유숙하며宿抱川白兄宅
아침은 해랑의 안개를 깼는데 朝破海郞霧
산골짜기 깊고 숲 색은 혼미하네 峽深林色昏
축석령엔 찬 구름이고 雲寒祝石嶺
가산촌엔 해가 지는구나 日落稼山村
언덕 위 버들이 새 기운으로 돌아오는데 岸柳還新意
개울 모래는 옛 모양 그대로 溪沙自舊痕
현등산에 누워 있는 게 편치 않아 懸燈臥未穩
말 몰아 다시 양문역으로 가네 策馬又梁門
지봉도 버드나무에 새 기운 도는 때 축석령 넘어 양문역으로 가는 것을 보면 그도 금강산 길에 오른 듯하다.
이제 포천으로 들어가면 기념물과 문화재를 만난다. 대부분이 매월당 이후 살다 간 이들의 흔적이지만 포천인이거나 인연을 맺은 이들의 자취이다.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던 사육신 유응부의 충목단(忠穆壇), 이항복의 화산서원, 조경-이덕형의 용연서원, 신도비와 석물이 빼어난 인평대군 묘역, 순교한 천주교인의 아픈 역사와 흔적들, 포천 옛고을 산성, 수백 년 혼자서 옛고을을 지키는 돌부처….
그런데 사실 포천은 조선 탄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지역이기도 하다. 고려 장군 이성계의 전장(田庄)이 포천에 있었다. 이성계를 요동 정벌에 보내면서 총사령관 최영은 출전하는 장수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아 충성을 바치게 했다. 이때 아들 이방원은 이 사실을 간파하고 이곳에 있던 한씨 부인, 강씨 부인을 비롯하여 전 가족을 피신시켰다. 만일 이때 가족이 인질로 잡혀 있었다면 조선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의 추(錘)는 한 순간에 방향을 바꾼다.
다시 매월당으로 돌아가자. 그는 포천의 큰 역원 안기역(安奇驛)이나 관아의 객사에 들지 못하고 어느 인가(人家)에 들어 하룻밤 신세를 진다.
포천 인가에서 머물며
표연히 지팡이 짚고 풍악(금강산)으로 향하는데
아스라이 구름산 눈에 들어 어른대네
흥겨우니 미주(美酒) 한 잔 안 할 수 없고
멋진 詩 읊자 하니 좋은 밤 다시 오네
외로운 등잔 창밖으로는 먼 길 가는 기러기 소리
오두막 울타리ㅅ가 들불을 보는데
옆집 개는 컹컹대며 꽃 아래서 짖는구먼
나그네 마음은 청초하고 하릴 없네
宿抱川人家
飄然一錫向楓嶠。 縹緲雲山入眼遙。 遣興且無沽美酒。 愛吟時復度良宵。 孤燈窓外聞征雁。 矮屋籬邊看野燒。 隣犬狺狺吠花下。 客心淸悄政無聊。
인가 마당에서 바라보니 山山이다. 남으로는 요즈음 우리 기준으로 보면 한북정맥이 이어져 뻗어가니 현등산(운악산), 수원산, 국사봉, 죽엽산이 보였을 것이고 북으로는 소요산에서 뻗어 내려온 왕방산 줄기가 이어졌을 것이다. 매월당은 아스라이 구름 속에 산이 보인다고 했다. 포천 땅 하룻밤 나그네 머물다 가려니 어찌 한 잔 안 할 수 있겠나. 산 사이 ‘개울을 안고’(抱川) 자리 잡은 고을이니 이때도 포천의 물은 달았을 것이다. 맛난 술(美酒) 한잔을 한다. 이쯤 되면 포천(일동) 막걸리의 대선배쯤 될 것이다. 술이 있으니 詩도 한 수, 등잔불은 깜빡깜빡, 봄 되어 돌아가는 기러기도 울어 옌다.
매월당이 잠잔 그곳은 이제 포천의 번화가가 아니라 외딴 고을이다. 관아가 옮겨가 구읍이 되었다. 군내면 구읍리라는 마을이다. 한가한 옛고을에는 관아 터와 향교와 삼국(백제) 시대부터 그 땅을 지켜온 산성만 남았다. 산성으로 올라 본다. 상당한 규모의 반달형 퇴뫼식 산성이다. 기왓장도 보인다. 발굴할 때 마홀수해공구단(馬忽受解空口單)이라는 와당도 출토되었다 한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포천을 고구려 때 마홀군(馬忽郡)이라 불렀다고 나오니 오래된 산성이다.
산성 골짜기에는 미륵불 한 분이 눈, 코, 입 다 잃은 모습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계신다. 아마도 그분은 아랫고을에서 하룻밤 유(留)하고 간 매월당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타박타박 청년 매월당의 발소리도.
나무 바람 같은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