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산에서 태조의 아픔을 함께 한 매월당은 소요사를 떠나 남행길로 나선다. 다음 행선지는 회암사(檜巖寺)다. 소요사를 찾아갔던 개울을 끼고 내려오면 지금의 소요산역이 자리 잡은 큰 길이 나오고 그 옆으로는 한탄강으로 북류(北流)하는 신천(莘川)을 만난다. 신천은 한 때 오염되는 아픔을 거쳤으나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매월당의 그 시절이나 다름없이 맑게 흐른다. 현재 신천에는 그 옆 뚝방도로, 3번 국도, 경원선 철길이 나란히 지나는 길들이 있지만, 매월당 시절에는 경흥대로와 별도로 신천 옆으로 삼방로(三防路)가 의정부 ~ 양주 ~ 연천 ~ 철원 ~ 평강 ~ 분수령 ~ 삼방 ~ 안변으로 이어졌었다. 지금의 3번 국도는 대부분 이 길 위에 만들어졌다.
현재의 이정표 기준으로, 매월당은 소요산역 ~ 동두천역 ~ 보산역 ~ 동두천 중앙역 앞까지 내려왔을 것이다. 후세에는 이곳에 이중경(李重庚)이 지은 가정자(柯亭子)라는 정자가 생겨 이정표가 되기도 했다. 이곳에서 좌회전, 동쪽으로 길을 잡으면 왕방산 방향으로 가는 364번 지방도로인데, 오지재고개(옛이름 석문령/石門嶺)를 넘으면 송우리에 닿는다. 예부터 포천으로 넘어가는 샛길이었다.
이 364번 지방도로 중간에는 세조가 사냥했다는 어등산(於登山)과 천보산(天寶山) 사이를 넘는 장림고개가 있다. 오지재고개와 장림고개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수가 합쳐져 미 2사단 앞으로 흐르는데 동쪽에 머리를 두고 흐르는 개울이라 해서 동두천(東頭川: 옛이름 사천/沙川)이라 하다가 동두천(東豆川)이 되었다. 동두천시의 어원은 이 개천에서 생긴 것이다.
회암사 가는 지름길엔 인적 끊기고
매월당은 장림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회암사로 가는 지름길이다. 얼마 전 고개 아래로 천보터널이 생겨 이제 고개를 넘는 사람은 드물다. 잊힌 길에 잊힌 돌부처가 고개를 지키고 있다. 고려말 조선초 모신 것이라 하니 아마도 매월당의 발길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회암사 9 암자의 하나였을 절터라 하는데 있었다는 탑은 없어지고 탑동(塔洞)이라는 지명만 남겼다.
고개를 넘어 내려간다. 잊힌 길이라서 장마에 길은 패이고 잡초는 길을 덮었다. 아랫마을로 내려가면 작은 공단(工團)이 있는데 그 아래 어디메쯤인가가 후세에 방랑 시인 김삿갓이 자란 고향 동네라 한다. 그의 시를 보면 스스로를 양주(楊洲) 사람이라 했으니 그럴 것 같다. 개울을 건너는 다리 이름도 김삿갓교라 붙였다.
이제 회암사지를 찾아간다. 지금은 빈터만 남았지만 매월당 시절, 손꼽히는 대찰이었다. 매월당은 1459년(세조 5년) 늦가을 회암사에 도착하여 그의 느낌을 시로 읊었다.
회암사
고송(古松)과 등나무 덩굴 얽혀 무성하고
오솔길 한 줄기 깊이 골짜기로 들었는데
불전(佛殿)에는 여전히 삼세(三世)의 향(香)불 남았지만
법문(法門)에는 이제 오종(五宗)*의 선맥(禪脈) 끊겼네
높은 누각은 구름에 싸여 있고
쓸쓸한 절 마당엔 잡초만 무성하네
승경(勝境)은 완연히 나란사(那爛寺)**와 같건만
한(恨)이라면 부처님 법 전할 이 없다는 것
*오종(五宗): 선종(禪宗)의 다섯 종파. 법안종, 운문종, 위안종, 임제종, 조계종(法眼宗, 雲門宗, 潙仰宗, 臨濟宗, 曹洞宗)
**나란사(那爛寺): 인도 마갈타국 왕사성에 있던 절
檜巖寺
古松藤蔓暗相連. 一徑深深入洞天. 佛殿尙留三世火. 法門今絶五宗禪. 崢嶸樓閣雲爲鎖. 牢落庭除草作氈. 勝境宛如那爛寺. 恨無人道祖燈傳.
천보산 아래 회암사는 아름답기 그지없는데 고승들(지공, 나옹, 무학)은 다 떠나 선맥(禪脈)을 전해줄 이 없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런 매월당에게 다행스럽게도 그곳에는 숨은 선맥이 있었다. 해사(海師)라는 노승이었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기록을 찾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한 가닥 하는 매월당이 원각경을 읽고, 노사의 가르침에 감사하는 예물까지 드린 것을 보면 대단한 선객(禪客)이었을 것이다.
해사(海師)님의 경전 가르침에
감사하여 수정 몇 알로 답례함
노사(老師)님은 나를 쪼아 밝은 구슬알로 만들어 주시니
보답했네 (노사님께) 영롱하고 맑은 수정(水晶)으로
하나하나가 스스로 청정(淸淨)한 본래 모습 지니고 있어
짐짓 진흙 속에 던져도 역시나 또렷하지
謝海師講經. 以水晶數珠爲答
老師琢我明珠顆. 我報玲瓏淡水晶. 个个自有淸淨態. 試投泥滓亦分明.
회암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려 충숙왕 15년(1328) 때 인도 승려 지공화상(指空和尙)이 원나라를 거쳐 이곳에 왔는데 이곳 지형이 인도의 아란타사(阿蘭陀寺)와 유사하여 절을 지었다고 한다. 회암사는 그 후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중창하고 그 제자 각전(覺田) 등이 공사를 마쳐 대찰이 되었다 한다.
이때 중창한 절의 규모는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이 기록한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修造記)’에 나오는데 262간(間) 규모에 승려도 3000명에 이르렀다 하니 그때의 흔적이 지금 절터에 잘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절터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조선 시대 사람들과의 인연 때문이다. 첫째는 태조 이성계와 자초(自超) 무학대사다. 요즈음 말로 하면 무학대사는 태조의 멘토(mentor)였다. 삼봉 정도전이 이성계의 정치 파트너로서 조선 건국을 기획했다면 자초 무학은 정신적 스승, 멘토로서 이성계의 의지처가 되었다.
회암사와 태조 이성계, 무학대사의 관계에 대해서는 야사도 많지만,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중 하나를 보면, “직접 자초 무학대사가 있는 회암사에 거둥하기도 하고, 내관을 보내어 자초 무학에게 문안드리게 하고, 곡식을 수시로 내리고, 화재가 나거나 역질이 돌면 재빨리 다른 절로 옮기게 하지를 않나, 용문사로 가겠다 하니 끝내 못 가게 잡아 놓지를 않나, 경기도민을 동원하여 무학대사의 부도를 미리 만들게 하지 않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도 이러하니 미처 기록 안 된 태조의 무학대사에 대한 사랑은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으랴.
용의 형상을 한 봉황새 기와
태종실록에는 회암사에 대한 더 많은 기록들이 전해진다. 왕위를 물리고 태상왕(太上王)이 된 태조의 기록이 태종실록(2년, 1402년 6월)에 실려 있는데, ‘태상왕이 소요산에서 회암사(檜巖寺)로 행차하였다. 태상왕이 회암사를 중수(重修)하고, 또 궁실(宮室)을 지어 머물러 살려고 하니(太上王自逍遙山幸檜巖寺. 太上欲重修檜巖寺, 且營宮室而留居)’.
이런 태조의 바램으로 회암사는 임금이 머무는 별궁과 같은 공간을 갖추게 된다. 발굴된 회암사 터의 북쪽 공간은 사찰 건축 배치가 아닌 궁궐 건물 배치를 따르고 있다. 이 터에서 발굴된 기와는 청기와였으며 용마루 끝을 장식한 치미는 용의 형상에 봉황 수막새도 출토되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회암사지의 저 배치가 바로 이때의 일이겠구나, 하는 상념에 젖으니 600년 전이 어제인 듯하다. 태종은 아버지를 조알하러 때때로 회암사에 들리곤 했다. 이럴 때면 국가의 의결기구 의정부(議政府: 지금의 국무회의 격인 국가최고의결기구의 명칭)도 자주 양주 땅에 와서 열렸으리라. 의정부란 지명이 이때 생겼다고 한다.
한편 회암사에는 출가한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도 이곳에서 절의 중수도 추진하고 수도하였다(세종실록 17년). 이때 양녕대군의 객기랄까, 허허로움이랄까 하는 일화도 세종실록에 기록돼 있다. 동생 효령이 수도하는 회암사에서 사냥한 새와 짐승을 구워 먹는 일이 발생하였다. 아우 효령이 말리자 양녕이 한 마디 한다. “부처가 만일 영험이 있다면 그대의 5, 6월 귀에 낀 테는 왜 벗기지 못하는가. 나는 살아서는 국왕(國王)의 형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또한 불자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佛如有靈, 君之五六月耳掩, 何不爲脫之乎? 我則生爲國王之兄, 享有富貴, 死亦爲佛者之兄, 誕登菩提, 不亦樂乎?)”
옛 흔적만 남은 회암사 터를 내려다보면서 ‘범생이 아우’와 ‘망나니(아니면 통큰) 형’의 모습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진다. 허허로운 회암사 터에 이제 그들도 모두 시간 속으로 사라졌구나.
회암사의 영욕은 그 후에 발생하였다. 50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중종의 첫째 아들 인종은 후사 없이 즉위 7개월 만에 승하했다. 이에 중종의 둘째 아들 경원대군이 13대 임금(명종)으로 즉위하니 때는 1545년, 나이 12세였다. 할 수 없이 중종의 계비인 어머니 문정왕후가 이후 8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된다. 이 일이 결과적으로 회암사의 빛과 그림자가 되었다.
왕후의 불교 진흥에 사시안 뜬 사대부
문정왕후는 당대의 명승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를 모시고 불교에 심취한다. 회암사를 중창하고 승려의 도첩제(度牒制: 승려 신분을 인증하는 제도)를 부활하고, 승과(僧科: 승려 과거시험)를 부활하여 지금의 코엑스 봉은사 앞마당에서 실시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같은 시대의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통로였다.
그 당시 문정왕후 발원으로 그려진 16세기 조선 불화가 400여 점 되는데 조선시대 불교 미술의 걸작이라 할 만하다. 아쉽게도 대부분 일실되어 손에 꼽을 정도만 남아 있다.
이러하니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조선의 유생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사방에서 소(疏)가 올라오고 여간 소란스러운 게 아니었는데 문정왕후는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1565년(명종 20년) 문정왕후가 급서(急逝)한 것이다.
때를 만난 유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요승(妖僧) 보우를 처단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1565년 제주도로 귀양 가게 되고 거기에서 제주 목사 변협에게 무참히 주살(誅殺)되었음이 명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가 남긴 저서도 모두 사라졌다. 다행히 그가 죽은 지 8년 후 사명당의 발문이 담겨 있는 허응당집(虛應堂集)이 발간되었고 일본 학자 다까하시 도루(高橋亨)에 의해 발견된 것(1959년)은 정말 다행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명종실록 21년(1566년) 4월 20일 기록에 보면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欲焚蕩檜巖)’는 기록이 있다. 그 뒤 회암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다음 기록은 선조실록(1595년)에 실려 있다. 회암사 옛터에 종루가 있는데 그 아래 큰 종이 묻혀 있으니 그것으로 화포를 제조하자는 것이다. 황룡사 다음으로 큰 사역(寺域)을 자랑하던 회암사는 명종, 선조 간(間) 사라졌다.
회암사 터에서 근래에 발굴한 출토품이 박물관에 전시되었는데 그릇은 모두 깨어지고 부처는 산산조각 나거나 목이 부러진 채로 발굴되었다. 아프간의 탈레반만 저지르는 만행이었을까? 조선은 성리학이 세(勢)를 얻으면서 생각이 다른 이는 모두 이단(異端)으로 모는 극단의 외통수로 나아갔다.
오늘은 눈이 하얗게 쌓인 회암사 터를 바라본다. 모든 것이 순백으로 덮였다. 그 옛날 매월당은 후세에 이곳에서 일어날 일은 까마득히 모르는 채 상당 기간을 회암사에 동별실에 머무르며 원각경을 읽고 옛 선사의 의발(衣鉢: 선사의 가사와 발우라는 말인데, 불법을 뜻하는 의미로 쓰인다)에 접한다.
지공의 의발과 나옹의 의발을 접한 시를 남겼는데 나옹의 의발을 읊은 시 한 수 읽고 가자.
나옹선사 의발
연대(燕代)*에서 운수(雲水)**하며 지공께 예(禮) 올리고
절주(浙西)***에서 법인(法印) 받아 동방으로 오셨네
남을 위해 기(氣) 발하시니 선림(禪林)에 우뚝하고
임금께 말씀 깊으니 법해(法海)에 웅장하네
천보산 안개는 소나무 숲 뿌옇게 덮었고
여강(驪江)**** 물 툭 터 흐르니 달빛도 몽롱쿠나
허심(虛心)한 의발(衣鉢)은 상기도 남아
천고에 우뚝 절집에 자리했네
懶翁衣鉢
燕代雲遊禮指空. 浙西提印又來東. 爲人吐氣禪林將. 對御談玄法海雄. 天寶霧埋松慘淡. 驪江水闊月朦朧. 空餘衣鉢今猶在. 千古巍巍鎭梵宮.
*燕代: 중국 河南, 河北 일대, 나옹선사가 法을 찾아 다닌 지역
**雲遊: 운수납자(雲水衲子)의 떠도는 생활
***浙西: 절강성 서쪽, 지공으로부터 法을 받음
****驪江: 여주 앞의 한강(漢江). 나옹선사는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함
나옹도 무학도 지공도 모두 떠나갔지만 한국 불교의 선맥을 이은 회암사 세 선사의 승탑과 비(碑)는 천보산 오르는 뒤 언덕에서 회암사 터를 내려다보고 있다. 두 손 모읍니다. 나무 백설 마하살.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