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영⁄ 2025.06.09 11:27:51
서울옥션 4월 경매에 일본 소장자가 출품한 안중근 의사의 미공개 유묵(遺墨·생전에 쓴 글씨) ‘녹죽(綠竹·푸른 대나무)’이 9억 4000만원에 낙찰돼 주목을 받았다. 주인공은 고(故)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의 차녀인 구혜정 여사와 이상현 태인 대표 모자. 특히 이번 낙찰은 이 대표의 적극적인 권유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범LS가의 일원인 이들 가족은 이번 낙찰뿐 아니라 안 의사 유묵을 꾸준히 한국에 들여왔다. 2017년엔 구 여사의 배우자인 이인정 아시아산악연맹 회장이 또 다른 유묵 ‘일통청화공(日通淸話公·항상 맑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을 2억 9000만원에 낙찰 받았다.
낙찰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수집한 문화유산의 가치를 사람들과도 공유하고 있다. 일통청화공은 2017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했고, 녹죽은 현재 전시 준비 중이다. 올해 3월엔 일본이 발행했던 안 의사 초상 엽서를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공개해 시민이 직접 관람할 수 있게 했다. 이 대표는 남·북에서 발행한 전통음악 우표 전 종을 국립국악박물관에 기증해 2021년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여기에 이 대표는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를 비롯해 국립합창단 이사장, 국립극장진흥재단 이사, 대한사이클연맹 회장, 대한체육회 감사 등 문화·체육 분야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으며 사회공헌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이 대표와 만나 이번 녹죽 낙찰 관련 비하인드 스토리 및 그가 특히 문화유산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 최근 가장 화제가 된 건 안중근 의사의 유묵 ‘녹죽’ 낙찰 소식이었습니다. 해당 유묵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이번 경매에 나와서 갑자기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었고요. 앞서 2017년 아버지가 일통청화공을 낙찰 받아 소장하고 있었을 정도로 본래 안중근 의사의 유묵에 관심을 갖고 이를 수집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지난해부터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경매에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시장에 돌았습니다. 모든 경매 현장을 직접 찾아 응찰했고요. 이번 녹죽 낙찰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 부부 모두가 안 의사의 유묵을 소장하는 특별한 사례로도 남게 됐습니다.”
- 낙찰 과정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만만치 않았어요. 무려 3수 끝에 녹죽을 품에 안았어요(웃음).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안 의사의 유묵이 경매에 총 세 번 나왔는데요.
첫 번째로 나온 ‘용호지웅세기작인묘지태(龍虎之雄勢豈作蚓猫之態)’는 19억 5000만원으로 안 의사 유묵 중 최고가 기록을 썼어요. 아쉽게도 첫 응찰 때 놓치고 두 번째 경매 현장도 찾았는데요. 그때 나온 게 ‘인심조석변산색고금동(人心朝夕變山色古今同)’으로, 이는 한미반도체 측에서 13억원에 낙찰 받았어요.
그렇게 두 번의 기회를 떠나보내고 나서 다음엔 꼭 낙찰 받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졌어요. 이는 앞서 경매에 나온 유묵이 세 번째로 출품된 녹죽의 뜻과 이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어요. 인심조석변산색고금동은 ‘사람의 마음은 아침저녁으로 변하지만, 산색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는 뜻인데요. 군자의 변함없는 지조를 뜻하는 녹죽에도 이 정신이 함축돼 있다고 느꼈죠.
또, 보통 안 의사의 유묵은 많은 글자 수에 세로로 써진 것이 대부분인데, 녹죽은 가로로 쓰였고, 짧은 두 글자에 안 의사의 정신을 함축해 놓아 더 희소성이 있다고도 느꼈습니다. 특히 올해가 안 의사 서거 115주기이자, 광복 80주년이라 이번 녹죽과의 만남이 더 뜻 깊게 다가왔습니다.”
- 안 의사 관련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을 가진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안 의사를 존경하는 건 당연하죠. 또 2010년 개인적인 계기도 있었고요. 당시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신관 재건축을 진행하면서 전 국민에게 ‘벽돌 한 장 가격만큼만 후원해 달라’는 내용의 광고를 신문에 낸 적이 있어요. 같은 해 저희 집에서 큰 아들이 태어났는데요. 어머니가 광고를 보고 ‘아들 부부의 첫 손자가 태어난 걸 기념하는 의미에서 기부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어요. 어머니는 ‘할머니 마음에서 손자도 나라를 사랑하는 바른 마음을 갖고 컸으면 한다’고 강조했죠.
이때 기부를 계기로 안 의사에 대한 존경심이 더 커졌고요. 자연스럽게 유묵에도 관심이 가면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하기 시작했고, 나중엔 소장까지 이어졌죠. 처음 전시를 통해 접한 안 의사의 유묵은 ‘황금백만냥 불여일교자(黃金百萬兩 不如一敎子)’였는데요. 이는 ‘황금 백만 냥도 자식 하나 가르침만 못하다’는 뜻으로, 후손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이어줘야 한다는 어머니와의 의지와도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 유묵이 나왔을 때도 응찰을 했었고요. 뭔가 이것도 인연이 아니었나 싶네요.”
- 2023년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로도 취임했죠. 안중근의사숭모회는 어떤 활동을 하는 곳인가요?
“안중근의사숭모회는 안 의사의 뜻을 기리고 추모하면서 다양한 교육 사업을 통해 안 의사의 높은 기개와 정신을 알리는 활동을 전개합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이사장을 맡고 있고요. 전 2023년 3월 임명장을 받고 이사로 활동해 왔어요. 유묵 수집뿐 아니라 관련 단체 활동을 통해 보다 안 의사의 정신을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뜻 깊고, 책임감도 느낍니다. 저도 안중근의사숭모회를 통해 안 의사 관련 우표, 엽서, 매달, 화폐 등을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 안 의사 관련 유묵뿐 아니라 2020년 국립국악박물관이 개관 25주년을 맞아 북한음악 자료실을 꾸밀 때 남·북한 전통 음악 우표 370장을 기증하고, 올 3월엔 안 의사의 초상이 담긴 새 엽서, 7월엔 1902~1909년 일본 제일은행이 발행한 지폐 12종의 실물을 공개했죠. 우리나라 문화유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느껴지는데요.
“전 역사적 의미가 있는 문화유산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어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문화유산은 각 시대에 맞는 정신을 발현하는 힘을 지녔다고 생각해요. 또 우리의 뿌리와도 맞닿는, 삶의 동반자와도 같죠. 예컨대 개개인의 족보만 봐도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반도의 역사와 연결되는 것처럼요.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도 있습니다. 이번에 낙찰 받은 녹죽은 현 시점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국가의 현실은 과거나 현재에도 같은데요. 이 가운데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우리의 주도권을 갖고,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안 의사의 정신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도 갖게 하고요.”
- 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문화유산이 있나요?
“일본에서 찾아오지 못한 우리의 문화유산이 아직 많습니다. 저는 그 중 대한제국이 1900년 ‘훈장조례(勳章條例)’를 발표하고 근대 훈장 제도를 실시하면서 일본인에게 수여된 훈장을 다시 찾아오고 싶어요. 당시 시대적 상황 속 사실상 강제로 수여된 것과 다름없는 훈장들이죠. 실제로 이 훈장이 1904년엔 초대 조선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에게 수여되기도 했으니까요. 기회만 된다면 이 훈장들을 공식적으로 환수하고 싶습니다.”
- 오히려 ‘치욕의 역사’를 들추는 게 아니냐는 시선도 있을 텐데요.
“전 오히려 그렇기에 더 들여다보고, 꺼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잘못된 과거를 돌아보며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 한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나라를 지키고 사랑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기 위해서요. 안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가 함께 등장한 일본 우편엽서, 일본 제일은행이 1902~1909년 발행한 화폐 12종 실물을 올해와 지난해에 걸쳐 공개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특히 제일은행권은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의 15개 죄악’ 중 하나로 지목한 것이기도 했죠. 화폐엔 구한말 한반도에 철도를 부설하고, 일제강점기 경성전기 사장을 맡는 등 경제 침탈에 앞장선 주역이라는 평가를 받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모습이 실렸어요. 이 제일은행권 화폐는 안중근의사숭모회와 기념관에 기증했습니다.
앞서 2017년 아버지가 낙찰 받아 소장하고 있는 일통청화공의 경우 경매 시장에 나왔을 당시 안 의사의 유묵임에도 생각보다 큰 관심을 받진 못했습니다. 오른쪽에 적힌 ‘贈淸田先生(기요타 선생에게 드린다)’는 한자 때문이었죠. 일본인 간수의 이름이 적혔다는 것에 거부감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전 오히려 이 자체가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역사라 생각했어요. 또한 일본인 간수과장조차 안 의사의 높은 절개와 지조에 감복해 글씨를 받았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고 봤고요. 그래서 아버지를 설득해 경매에서 해당 유묵을 낙찰 받았습니다. 이렇듯 의미 있는 문화유산에 관심을 가져 왔고, 지금도 꾸준한 관심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이번 녹죽의 경우 서울옥션을 통해 낙찰 받았는데요. 옥션뿐 아니라 문화유산 조사, 수집을 위해 어떤 방편을 활용, 노력을 기울이고 있나요?
“서울옥션처럼 대형 옥션도 있지만, 작은 규모의 옥션도 있고요. 해외 옥션 등 아주 다양합니다. 이 정보들을 얻기 위해선 꾸준히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어요. 또 주목받는 문화유산의 가치도 시대에 따라 바뀌기에, 세상 돌아가는 뉴스도 많이 살펴야 하고요. 이런 과정을 통해 더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느끼게 됐습니다.”
- 개인적인 수집 역사의 시작은 언제였나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였어요. 당시 한국에 거주하고 있던 이스라엘인 가족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족과 함께 갔는데요. 제 또래 아이가 자기가 모은 거라고 자랑하면서 다양한 우표를 붙인 스크랩북을 가져와 상 위에 딱 펼쳐놓았는데, 마치 형형색색 빛나는 보석 같았어요. 색깔이 알록달록한 게 예쁜 딱지를 모아놓은 것 같기도 했고요.
그걸 보고 집에 돌아와서 혹시 우표가 붙어 있는 편지 봉투가 없는지 찾아봤어요. 그 이후부터 조금씩 우표 수집을 시작했고요. 처음엔 예쁜 그림이 그려진 우표 위주로 모으다가, 점점 우표를 모을수록 종류도 다양하고, 각 우표에 담긴 의미와 가치도 저마다 다르다는 걸 알았고요. 그렇게 수집의 재미를 늘려갔고, 나중엔 경매 시장에서도 우표 분야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또 우표뿐 아니라 다양한 미술품, 화폐, 문화유산도 다루는 걸 배웠고요. 그 관심이 현재의 북한화폐, 문화유산 수집까지 이어져 어느덧 두 분야에서는 주목받는 컬렉터가 됐습니다.”
-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건립할 계획은?
“제 역량으로는 아직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좋은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현재까지 수집한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릴 수 있는 전문적인 도록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문화유산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도록을 보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성으로요. 또 문화유산 전시 제안이 들어오거나, 관련해 자문이 들어오면 적극 임하고 있습니다.”
- 이번 녹죽 또한 전시 예정인가요?
“일통청화공과 함께 8월 서울 중구 덕수궁에서 열리는 국가유산청 광복 80주년 특별전을 통해 시민에게 선보일 예정입니다. 문화유산을 수집해 그걸 창고에만 두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더 많은 사람들과 그 가치를 나눠야죠.”
- 전시를 꾸준히 여는 이유는?
“문화유산 실물이 주는 힘이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온라인으로 세계 각국의 유산을 마우스 클릭, 스마트폰 터치 한번으로 언제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게 됐지만, 그것도 모두 실물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굳이 로마를 찾아가고, 루브르 박물관을 찾아가는 이유이기도 하죠.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던 문화유산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으니까요.
이는 꼭 문화유산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에요. 현재 전 세계적 인기를 끄는 케이팝 분야에서 블랙핑크를 좋아하는 팬들은 유튜브 영상만 찾아보는 게 아니라 직접 콘서트에 가서 현장을 느끼죠. 이처럼 충실한 실물의 힘이 없다면, 온라인 공간에서의 문화가 발휘하는 힘의 영역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생각합니다. 이것이 꾸준히 전시를 여는 이유입니다.”
- ‘대한민국 기부가이드북’을 발간하는 등 기부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기부 문화가 보다 활성화되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나요?
“국내외에서 대표적으로 화제가 된 건 ‘이건희 컬렉션’ 사례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부의 수준이 세계적으로 올라갔죠. 해외에서는 소위 ‘이건희 미술관’이라고 불릴 만큼 영향력이 큰 컬렉터의 기부로 세워진 미술관들도 많고요. 물론 이런 힘 있는 컬렉터의 기부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전 소규모 컬렉터의 노력 또한 중요하고, 이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봐요. 이런 소규모 컬렉터의 뜻을 우리 사회가 존중, 격려하며 받아줄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고요.
또 기탁 문화도 활성화됐으면 합니다. ‘기탁’은 여러 여건상 ‘기증’보다는 유연한 형태이기에 기탁을 통해 좋은 문화유산을 국민이 향유할 수 있게 끄집어내는 계기를 더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 기탁 박물관을 보다 활성화하면 그것도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애호 활동이 사회 저변으로 확대될 수 있는, 의미 있는 사업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 앞으로 이루고 싶은 또 다른 목표는?
“현재 국립합창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데요. 안 의사와 관련된 공연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공연장 일부에 안 의사의 유묵 실물을 전시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고요. 만약 여러 여건으로 이를 실현하기 어렵다면 공연 연계 강좌를 연다던지 여러 구상을 하고 있고요. 영역 간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더 생동감 있게 우리 문화유산이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제가 발견한 아주 작은 우표, 동전 하나 속에 숨겨져 있던 메시지, 정보 등이 발견돼 조명 받을 때 뿌듯함을 느낍니다. 투박한 원석을 빛나게 가공한 연마사가 된 느낌이랄까요. 앞으로도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줄 수 있는 문화유산 수집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박제화된 유산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 속에서 함께 호흡하는 문화유산을 찾아서 국민에게 소개하고, 알려나가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